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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세계관의 개요

Joyfule 2019. 5. 18. 00:09

 

 

     

      현대세계관의 개요

 

성경적 세계관은 왜 필요한가?

 

성경적 세계관은 어떤 학문적 체계가 아니라 “삶” 그 자체이다. 만약 우리가 호흡하고 있는 이 세계가 성경적인 세계관(또는 그것을 갖고 실천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이 성경적 세계관에 대한 말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세계는 여러 세계관들이 혼재해 있으며, 그럴듯한 거짓 체계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고, 이미 우리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 속에 깊숙히 침투해 있다.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셨듯이 이 세계에 관한 질문에 대한 유일한 해답과,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제시하는 유일한 길을 성경적 세계관이 제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짓 세계관들의 강력한 유혹에 굴복하여 쫓아감에 따라 점점 미궁 속으로 봉착할 수 밖에 없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 글에서는 현대의 세계관들이 발흥하게 된 역사적 변천과정을 조심스럽게 검토해 보고자 한다. 먼저 17세기 말까지 그래도 지배적이었던 유신론적 세계관을 간단히 살펴보고 그 뒤를 이어 등장한 이신론, 자연주의, 허무주의, 실존주의를 검토하여 그 분명한 실상을 대강 파악해 보도록 하겠다.

 

== 기 독 교 유 신 론

 

17세기 말까지 서양에서는 분명히 유신론적 세계관이 지배적이었다. 그때까지의 사람들은 동일한 문화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창조의 규범에 의해서 자신의 삶과 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유신론은 기본적인 세계관이다. 왜냐하면 1700년에서 1900년 사이에 발전한 다른 모든 세계관들은 본질적으로는 유신론적 세계관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각 세계관들은 본질적으로는 신의 본질과 속성, 우주의 본질, 인간의 본성, 인간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 윤리의 기초와 역사의 의미 등 근본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에 대해 유신론적 세계관은 인격적인 하나님의 속성과 섭리에 대해 모든 것을 명확히 설명해 주고 있다.

 

== 이 신 론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와 사랑과 계시 안에서 인간은 진정한 가치와 자유를 가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만한 인간은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세계를 구현하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이전까지의 영향력에서 단번에 빠져 나올 수 없었던 인간의 타협적인 첫걸음을 내딛었던 것이 바로 이신론이었다.

 

이신론은 신을 인정하기는 하되 그 하나님은 내재하지도 않으시고, 완전한 인격도 아니시고, 인간사(人間史)의 주권자도 아니시며 섭리자도 아니시다. 단지 거대한 시계와 같이 저절로 돌아가는 이 세계를 창조하신 -- 마치 에너지와 같은 -- 제 1 원인자이실 뿐이다. 따라서 이 우주는 인과율의 일치체로 창조된 것이기에 결정론적 성격을 띠게 되며 부품과 같은 의미없는 존재, 즉 꼭둑각시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들은 또한 우주는 타락한 것이 아니라 정상이기 때문에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선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윤리가 파괴되었는데, 그 이유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옳다면 세상에 악이란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이신론은 결국 자연주의로 향하는 과도기적 세계관이다. (이신론을 일관성 있게 쫓아가다 보면, 종착역은 자연주의이다.) 그러나 그들은 일관된 해석을 시도하지 않으므로, 모든 문제에 대해 해답을 가지고 있다고 낙관적으로 믿고 있었다.

 

== 자 연 주 의

 

이신론은 유신론에서 자연주의로 넘어가는 타협적인 첫걸음이었다. 이신론에서는 하나님이 “삭감”되었다. 즉 여전히 창조주로 또 암시적으로는 우주의 유지자로 남아 있지만, 인격이 배제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연주의에 이르면 하나님은 훨씬 더 “삭감”된다. 그의 존재 자체가 소멸된다.

 

우선 자연주의의 기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1. 물질은 영원히 존재하며 존재하는 것의 전부이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2. 우주는 폐쇄체계 속에서 인과율의 일치체로 존재한다. 이것은 결국 결정론으로 이어지는데, 결정론 안에서는 인간의 의미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그 탈출구로서 제시한 것이 우주를 불확정적으로 결합했다는 주장이다. 이 개념으로부터 자연주의자들은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와 그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부여했지만 사실 이 개념은 모순이다.

3. 인간은 하나의 복잡한 “기계”이다. 인격이란 우리가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화학적, 물리적 성질의 상호관계이다.

4. 사망은 인격과 개체성의 소멸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인간의 존재는 사망시에 종료되는 것이며 유일한 영원은 단지 우리의 문화 속에서 서로의 삶에 영향을 주는 양식으로서, 우리의 후손 안에 존재한다고 한다.

5. 역사는 인과율에 의해 연결된 사건의 직선적 연속이며, 전체적인 목적성은 없다. 단지 인간들이 어떤 사건에 부여하는 만큼의 의미만을 갖게 되는 것이다.

6. 윤리는 단지 인간에게만 관계된 것이다. 자연주의자들은 모든 사람이 도덕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사실 이 말에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또 비록 타락했어도 그 형상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분적으로 반영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절대적이 될 수 없으며, 상대주의에 빠지게 된다.

 

이제까지 자연주의의 기본내용을 살펴보았는데 이 자연주의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지속성을 가지고 있다. 왜 자연주의 세계관이 이토록 지속성을 지닐 수 있었느냐 하면, 첫째, 자연주의는 정직하고 객관적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며, 둘째, 자연주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일관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자연주의의 장점은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의 이성을 절대시하려는 모든 인간의 교만한 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세기가 채 시작되기도 전에 자연주의의 체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자연주의자들 내부에서 발생한 불일치이다. 우선은 가치의 문제가 골치를 썩이는 첫번째 문제였다. 우연에 의해 던져진 존재가 자신의 능력을 신뢰할 수 있을까? 이처럼 존재의 근거와 이성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인간은 곧 허무주의로 봉착하게 되었다.

 

== 허 무 주 의

 

허무주의는 이성을 전적으로 신뢰했던 자연주의에서 실망하면서 생긴 반이성이었으며, 지식의 가능성에 대한 부정이다. 즉 모든 것은 우연한 것이며 무의미한 것이다. 이 허무주의는 자연주의의 자연적 산물이다. 왜냐하면 자연주의에서 결정론을 탈피하기 위해 시도했던 우연이란 개념은 불확정적으로 결합된 개념을 낳게 됬지만, 실상은 인식되지 않은 불확정성일 뿐이고, 또한 이 우연이란 개념은 부조리로의 문을 열게 되었다. 이것은 인간에게 의미있는 행동을 하기 위한 근거를 제시해 주지 않는다. 이 자연주의는 또한 인식론의 근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어느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주장을 펼 수 없게 되었으며, 이것은 불가지론에 빠지게 되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철저한 자연주의를 고집한다면 그는 반드시 허무주의자가 될 것이다.

 

자연주의의 산물인 과학의 발전과 인간 이성의 신뢰가 제 1,2차 세계 대전에 의해서 급격히 상실되면서 이 허무주의가 만연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은 철저하게 하무주의 인생관에 따라서는 살 수 없게 지음받았다. 만약 어떤 사람이 철저한 허무주의를 고집한다면 니이체와 같이 정신병원에 들어가거나 자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 실 존 주 의

 

실존주의는 허무주의를 초월하기 위해서 발생한 것이다. 이 실존주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와 유신론적 실존주의로 나뉘어질 수 있다.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자연주의의 모든 명제를 긍정하지만 세계를 주관과 객관으로 양분시켜서 객관세계는 부조리하지만, 주관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실존주의는 이 두 세계 간의 불일치를 강조했으며, 객관세계의 부조리에 대하여 맞서 싸우는 주관세계를 선호하였다. 즉 객관세계의 부조리를 충분히 인식하고, 그에 대해 반대하는 진정한 인간이 반란을 일으키고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극명하게 다룬 소설이 까뮈의 ‘시지프스의 신화’, ‘페스트’ 등이다. 이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열정과 확신을 가지고 허무주의를 극복하려고 시도했지만 그것은 단지 유아론, 즉 87년간 존재하다가 사라져 버릴 고독한 자아에 도달했을 뿐이다.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유신론적 명제들을 긍정하지만 종교를 역사에서 떼어내서 그들의 주관주의적 경향에 의해 단지 그 내적 의미만 강조했다. 이처럼 신앙의 역사성을 부인하게 될 때, 신앙은 단지 신화로 전락하게 되어 버린다. 이 실존주의는 허무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현대의 지성인들에게 유일한 대안과 매력으로 그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출처: http://lectio.tistory.com/506?category=272943 [Lectio Divi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