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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기陶山記 - 이황(李滉, 1501∼1570)

Joyfule 2013. 1. 4. 22:09

 

도산기陶山記

  

이황(李滉, 1501∼1570) 씀

김동곤(울산제일고 교사) 옮김

 

 영지산 한 가지가 동쪽으로 뻗어 나와 도산이 되었다. 어떤 사람은 산언덕이 두 번 솟아 도산이라 한다고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산속에 옛날 질그릇 굽던 가마가 있었다는 사실을 들어 도산이라고도 한다.

산이 그렇게 높진 않지만 터가 넓고 모양이 빼어나다. 그리고 위치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아서 그 옆에 있는 산봉우리와 산골짜기가 모두 이 산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듯 사방을 두르고 있다.

산 왼쪽을 동취병이라 이름 하고, 오른쪽을 서취병이라 이름 하였다. 동취병은 청량산으로부터 뻗어 와 도산의 동쪽을 이루었는데, 여러 봉우리가 어렴풋하다. 서취병은 영지산으로부터 뻗어 와 도산의 서쪽을 이루었는데, 높은 봉우리가 우뚝우뚝하다. 이 동취병과 서취병이 서로 마주 바라보면서 남쪽으로 뻗어 이어지다가 굽어 돌아 8ㆍ9리쯤 가서 남쪽 너른 들판에서 합쳐진다.

 

도산 뒤에 있는 시내를 퇴계라 하고, 도산 앞에 있는 시내를 낙천이라 한다. 시내가 산의 북쪽을 둘러 산 동쪽에 들어와 낙천이 된다. 낙천이 동취병으로부터 서쪽으로 달려 산 끝자락에 이르러 출렁거리며 흐르고 깊이 고이기도 한다. 그 몇 리 사이는 깊이가 배를 띄울 만하고, 금빛 모래와 옥 같은 자갈은 맑고 반물빛을 띤다. 이것이 바로 탁영담이다.

탁영담의 물이 흘러 서취병 기슭에 부딪히고는 함께 아래로 흘러 남쪽으로 너른 들판을 지나 부용봉 아래로 들어간다. 부용봉은 서취병이 동쪽으로 이어져 합쳐진 곳이다.

 

처음 내가 시냇가에 터를 잡아 두어 칸 집을 지은 것은 책이나 보면서 몸과 마음을 갈고닦으려 함이었다. 자리를 세 번이나 옮겼으나 그때마다 집이 비바람에 무너지고 말았다. 게다가 시냇가는 너무 쓸쓸하여 마음을 밝히기에 알맞지 않았다. 다시 옮기려 하다가 도산의 남쪽에 땅을 얻게 되었다. 작은 골짜기가 있는데, 앞으로는 낙동강 들판이 내려다보이는데, 그윽하고 아득하며 멀리 트여 있었다. 바위 기슭은 가파르고 돌샘은 달고 차가워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살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농부의 밭이 거기 있어 값을 치르고 샀다. 법련이라는 중이 터를 닦고 집을 짓는 일을 맡았는데 얼마 되지 않아 죽고, 정일이라는 중이 일을 맡아 계속했다. 정사년(1557년)에 시작하여 신유년(1561년)에 집들이 얼추 이루어져 깃들 만하였다.

 

큰 건물은 세 칸이다. 가운데 칸은 완락재玩樂齋라 하였는데, 주자가 자기 집 이름을 두고 ‘즐겨[] 사랑하니[] 일생이 다하도록 싫어하지 않는다.’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동쪽 한 칸은 암서헌巖栖軒이라 이름 하였는데, 주자가 「운곡시」에서 ‘오랫동안 학문에 자신이 없어, 바위[]에 깃들어[] 작은 보람을 바란다.’라고 한 말에서 따온 것이다. 또 합하여 도산서당陶山書堂이라고 이름 붙였다.

작은 건물은 여덟 칸인데, 유생들이 생활하는 곳은 시습재時習齋ㆍ지숙료止宿寮ㆍ관란헌觀瀾軒이라 하고, 합하여 농운정사隴雲精舍라 이름 붙였다.

 

도산서당의 동쪽에 네모난 연못을 파서 그 안에다 연을 심고는 연못 이름을 정우당淨友塘이라 하였다. 그 동쪽에 몽천蒙泉이 있는데, 몽천 위 산기슭을 파서 암서헌과 마주하게 했다. 그러고는 바닥을 고르게 하여 단을 쌓고 그 위에 매화ㆍ대나무ㆍ소나무ㆍ국화를 심고는 절우사節友社라고 이름 붙였다. 도산서당 앞 드나드는 곳은 사립문을 만들고 유정문幽貞門이라고 이름 붙였다. 유정문 밖 작은 길이 개울물과 함께 아래로 나 있어 동네 어귀에 이르면, 두 산기슭이 마주한다. 동쪽 산기슭의 옆구리에 바위를 깎아 터를 만들었으나 힘이 미치지 못해 그 터만 두었다. 마치 절 바깥문처럼 생겨 이름을 곡구암谷口巖이라 하였다.

 

곡구암에서 동쪽으로 몇 걸음을 가면 산기슭이 뚝 끊어져 탁영담 위쪽이다. 큰 바위가 깎아지른 듯이 서서 높이가 여남은 길이나 된다. 그 위에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대를 만들었다. 소나무 가지가 휘늘어져 해를 가린다. 위로는 하늘이 보이고 아래로는 물이 흘러, 새와 물고기가 날고 뛰어오른다. 동취병과 서취병의 그림자가 탁영담에 푸르게 잠긴다. 자연의 빼어난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천연대이다. 서쪽 산기슭에 비슷한 대를 쌓고는 천광운영대라 이름 붙였는데, 그 빼어난 경관이 천연대 못지않다.

반타석은 탁영담 안에 있다. 그 모양이 펀펀하고 비스듬하여 배를 매어 두고 술잔을 나눌 만하다. 장마가 져 물이 불으면 물속에 잠겼다가, 물이 줄고 맑으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늘 고질병에 얽혀, 비록 산에 살아도 책을 읽는 것에만 마음을 쓸 수가 없었다. 남모르게 간직한 근심을 다스리면, 때때로 몸이 가뿐해지고 편안해지며 마음이 깨끗해지고 깨인다. 끝없는 공간을 굽어보고 우러러보면 마음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것이 있어 책을 밀치고 지팡이를 짚고 나선다. 암서헌에서 연못 정우당을 감상하기도 하고, 단에 올라 절우사를 찾기도 한다. 밭을 돌며 약초를 옮겨 심고, 숲을 찾아가 꽃을 딴다. 바위에 앉아 샘물을 희롱하고, 천연대에 올라 구름을 바라본다. 어떤 때는 물가에서 고기를 바라보고, 배 안에서 갈매기를 가까이하기도 한다. 마음 내키는 대로 여기저기 거닐면, 눈길 가는 곳마다 흥이 일어난다. 경치를 보고 흥이 이는데, 흥이 다하면 되돌아온다.

방 안은 고요하고 책이 가득하다. 책상 앞에 말없이 앉아 마음을 살피고 사물의 이치를 따진다. 이따금 마음에 깨닫는 것이 있으면 문득 기뻐하며 밥 먹는 것도 잊는다. 이치를 깨닫지 못하면 벗을 찾아 묻고, 그래도 깨닫지 못하면 힘을 쓰면서도 억지로 통하려 하지 않는다. 한쪽에 두었다가 다시 끄집어내 마음을 가라앉혀 생각하며 스스로 풀리기를 기다린다. 오늘도 이렇게 하고 다음 날도 이렇게 한다.

 

봄이면 산새가 울고, 여름에는 푸나무가 우거지며, 가을이면 바람과 서리가 매섭고, 겨울에는 눈과 달빛이 엉기어 비친다. 이처럼 네 계절의 경치가 같지 않으니 흥취 역시 다함이 없다.

 

큰 비ㆍ큰 더위ㆍ큰 바람ㆍ큰 비가 없으면 아무 때나 나간다. 나갈 때도 이렇게 하고, 돌아올 때도 이렇게 한다. 이것은 한가로이 살면서 병이나 다스리는 쓸모없는 것이어서 옛사람의 문이나 뜰을 엿볼 수가 없다. 그러나 스스로 마음에 즐거움을 주는 것이 적지 않다. 이에 말하지 않을 수가 없어, 드디어 곳에 따라 일곱 자로 한 구를 이루는 시[칠언시]로 그 일을 적어 열여덟 수를 얻었다. 또한 다섯 자로 한 구를 이루는 시[오언시] 스물여섯 수를 지었는데, 앞의 시에서 말하지 못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는 「어리석은 샘」, 「차가운 우물」, 「뜨락의 풀」, 「시내 버드나무」, 「남새밭」, 「화단」, 「서쪽 산기슭」, 「남쪽 물가」, 「취미산」, 「아지랑이」, 「낚시터」, 「달 실은 배」, 「상수리나무 벼랑」, 「옻나무 동산」, 「고기 다리」, 「어촌」, 「안개 낀 숲」, 「눈 내린 길」, 「갈매기 섬」, 「두루미 물가」, 「강가 절」, 「관가 정자」, 「긴 들」, 「먼 산봉우리」, 「흙성」, 「향교 마을」이다.

아아! 내가 불행히도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곳에서 태어나 늙도록 들은 것은 없으나, 산림에서 돌아보니 일찍이 즐길 만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중년에 망령되게도 세상에 나가 먼지바람에 넘어지고 나그네로 떠돌다가 되돌아오지 못하고 죽을 뻔하였다. 그 뒤에 나이가 들어 늙고, 병은 더욱 심하며, 가다가 넘어지니, 세상이 나를 버리지 않았으나, 내가 세상에서 버림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비로소 나를 묶고 있는 것에서 몸을 빼어 시골 밭이랑에 몸을 던지니, 전에 말한 산림의 즐거움이 기약도 없이 내 앞에 다가왔다. 그러니 내가 이제 쌓인 병을 사라지게 하고 남모르게 간직한 근심을 트이게 하며 가난한 늙은이가 편안히 지내려고 한다면, 이곳을 버리고 어디를 구하겠는가?

 

내가 옛사람의 산림에 묻혀 사는 즐거움을 살펴보니 두 가지가 있었다. 노자의 학문을 받들고 고상함을 일삼아 즐기는 사람이 하나요, 마땅한 의리를 따르며 타고난 마음을 기르며 즐기는 사람이 다른 하나다.

앞엣사람의 말을 따른다면, 자기 한 몸만 깨끗이 하려다 윤리를 어지럽힐 수도 있고, 심하면 날짐승이나 길짐승과 무리를 이루면서도 잘못이라고 하지 않게 된다. 뒤엣사람의 말을 따른다면, 즐기는 것이 재강일 따름이니, 전할 수 없는 오묘한 이치는 구하려고 할수록 더욱 얻지 못하게 되니 무슨 즐거움이 있으랴!

비록 그러하나 뒤엣사람처럼 하여 스스로 힘쓸지언정 앞엣사람처럼 하여 스스로 속이지는 않을 것이다. 또 어느 겨를에 세속의 이익이 내 마음속에 들어오는 것을 알겠는가?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옛날 산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름난 산을 얻어 자신을 맡겼습니다. 그대가 청량산에 자리를 잡지 않고 이곳 도산에 자리 잡고 사는 것은 어찌 된 것입니까?”

그래서 내가 대답했다.

“청량산은 만 길이나 깎아지른 듯이 서 있고 깎아 세운 듯한 골짜기가 아슬아슬해 늙고 병든 제가 편안하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또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함에 한 가지도 빠져서는 안 됩니다. 이제 낙천이 청량산을 둘러 흐르지만, 청량산 안에서는 낙천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제가 진실로 청량산에 자리 잡을 마음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청량산을 뒤로하고 도산을 먼저 한 것은, 도산이 산과 물을 함께 지니고 늙고 병든 몸을 편안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했다.

“옛사람은 즐거움을 마음에서 얻었지 바깥 사물에서 빌리지 않았습니다. 공자의 제자 안연이 지내던 누추한 곳이나, 공자의 또 다른 제자인 원헌이 살던 옹기 창이 달린 방 두 칸에 산과 물이 있었습니까? 그러므로 바깥 사물을 기다리는 것은 진정한 즐거움이 아닙니다.”

내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안연과 원헌이 그렇게 산 것은, 때마침 그러하였지만 그들이 편안하게 여겨 우리가 존중하는 것입니다. 안연과 원헌으로 하여금 저처럼 도산과 같은 곳을 만나게 하였다면, 그 즐거움이 어찌 우리보다 깊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공자와 맹자는 산과 물에 대해 자주 말하고 깊이 깨우쳐 주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대의 말이 맞다면, 증점과 생각이 같다고 한 공자의 탄식이 어찌 기수 가에서라고 나왔겠습니까? 그리고 섣달을 마저 보내고 한 해를 마치는 바람을 주자는 어찌 노봉의 산꼭대기에서 홀로 노래하였겠습니까? 이것은 반드시 그럴 만한 까닭이 있어서입니다.”

그 사람이 그렇겠다고 말하고는 물러갔다.

가정 신유년(1561년) 동짓날에 산 주인인 늙고 병들어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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