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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격자의 용기 - 임병식

Joyfule 2013. 1. 5. 21:01

 

목격자의 용기 - 임병식

 

 

 

이즘 발생하는  사건을 보면  지능범이 많아서 범인 붙잡기가 쉽지않다. 막상 잡았다고 하더라도  증거가 없으면 풀어주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증거확보는 중요성을 넘에 필수가 되고 있다.  번연히 범인인줄 알아도 증거를 잡지 못하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증거에는  물증도 중요시 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인적증거이다. 보다 구체적인 사항을 파악할 수 있어서다. 이 인적증거에는  범인의 자백이외도  공범의 토설, 제 3자의 목격담이 포함된다. 

 

이즘  신문을 보면  정권이 바뀌어서인지 과거 정부에서 일어난 의문사 사건이 장식을 하고 있다. 소위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가 설치된 후  활동성과로 보인다. 

 

 세인의 주목을 받은 사건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다음 사건의 수사 전진은 주목을 받는다. 바로 독립운동가이며 사상계 발행인이었던 장준하선생 추락사망 의혹사건이다. 그리고  서울대법대 최종길 교수 사건과  전 중앙대 안산켐퍼스 학생회장이었던  이내창군 사망관련 사건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아직은 이렇다할  뚜렸한 증거가 없어서 결정적인 내용은 아직 내놓고 있지 못하다. 두말할 것도 없이 물증뿐 아니라 인적증거가 턱없이 부족한  때문이다.  그걸  지켜보며 새삼  증거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현대 수사의 요건은  증거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심증이 가더라도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허사다. 한데, 현실 속에서 그런 확실한  증거를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본래 범인의 속성이라는 게 자기의 죄를 본능적으로 감추려 하는데다, 증언을 해줄 사람도  귀찮케 여겨  잘 나서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길을 가다보면 가끔 도로변에 뺑소니차에 친 피해자 가족이 목격자를  찾아나서   현수막을  내걸어 놓은  광경을 보는 때가 있다.  누군가가 보았으리라는 기대감에서 그런 것이지만, 이는 한편 생각하면 그만큼  증거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증표이기도 하다.  수년 년, 여수에서는 그런 본보기의  사례가  있었다. 여순사건이 발발한 50주년을 맞아 일부의 사회단체에서 '이제는 세월도 흐를만큼 흘렀으니 당시 진압군에 의해 사살된 사람들을 위해 묘지단장을 새로이 해주고 그 앞에 빗돌이나 세워주자'고 운동을 벌렸는데, 그때 이를 가로 막고 나선 용감한 시민 한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무고한 시민들이 아니라 중부역자들이었습니다. 군인들이 일렬로 세워놓고 총살을 시키기  직전, 마지막 하고 싶은 말을 물을 때 그들은 '인민공화국만세'를 부르고 죽은 사람들입니다." 하고  당당하게  나서서  증언을 했던 것이다. 그 한마디에 묘지 단장을 추진하던 사람들은  슬그머니 꽁무니 빼고 말았다. 그리고 추진하던 그 일도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보도 내용을 보면 신문마다 의문사 사건을 크게  다루고 있는데, 문제의 사건, 중앙대 전 학생회장 사망사건 의혹도  풀려면  누군가의 결정적 증언이 있어야 가능할 것 같다. 당시 발생한 사건의 개요를 짚어보면 대강 이러하다.  변사자가 여수 거문도 유림해수욕장에 나타난 후 시체로 발견된 것이 1984년 8월15일 오후7시경이었다. 이 시각은 아직 긴 여름해가 지지 않고 있던 무렵이다. 그러므로 그 장소가  유원지인 점을 감안하면  누군가 본 사람이 분명히  있었으리라고 추측이 된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사망사실을 목격한 사람이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사망에 이르게 된  과정도 보면 본 사람이 있을 법 한데 말이다. 당시 수배를 받고 있던 그가 신분노출이 우려되는 남녘 외딴 섬에, 그것도 아무런 연고가 없이 와서 돌아갈 여비도 없이 머무른 점이나, 주검이 발견된 지점이 미끄러운 바위지대도 아닌데 넘어져 앞 아마에 깊은 상처가 나있는 점등은 분명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이미 보도도 됐지만, 그곳은 그렇게 수심도 깊지 않아 익사위험이 있는 곳도 아니다. 부검결과도 물을 먹은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점을 종합하면   타살가능성이 있는데 오리무중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건을 수년이 흐른 오늘 말에 와서 가린다는 건 아무래도 무리로 보인다. 관건은 오직 용기있는 목격자의 증언만이 의혹을 해소시킬  열쇠 같은데 ,그걸 기대하기가 어렵다. 독립운동가 신채호선생은 살아생전 일제와 맞서 싸우면서 침묵하며 나서지 않는 많은 비겁자의 침묵을  질타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 이런 비겁자가 있는 건 아닐까. 그런 비겁자가 진실을 목격하고도 침묵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진실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본다. 진실을 밝히는 일은 피해당사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일 뿐 아니라, 바른 역사를 가꾸어 가는 뜻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만에 하나 누군가에 의해 피살되었다면  그의  해원 (解寃) 를 위해서도 반드시 진상은 규명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방관 말아야할 절실한 일이다 .어느 철학자는 말하기를 역사란 용기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발전하고 진보 되어 간다고 했다. 바른 역사를 지켜나가기 위해서라도  투철한 사람들의  신고의식이 아쉽기만 하다.(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