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총 - <화왕계> 꽃 임금님
김부식(金富軾, 1075~1151) 씀
김동곤(울산제일고 교사) 옮김
설총의 자는 총지로 할아버지는 나마 벼슬을 한 담날이고 아버지는 원효이다. 아버지 원효는 처음 승려로 불가서佛家書에 두루 통달하였는데, 나중에 환속하여 스스로 소성 거사라고 이름 하였다.
설총은 본바탕이 똑똑해 나면서부터 이치를 훤히 알았다. 우리말로 유교의 아홉 가지 경전을 읽어 후학을 가르쳐 지금까지 학자들이 그를 마루로 존중한다. 글을 잘 지었지만 지금 세상에 전하는 것은 없다. 다만 남쪽 지방에 그가 비석에 쓴 글이 전하지만 글자가 빠지고 떨어져 나가 읽을 수가 없어, 끝내 그의 글이 어떠했는지 알 수 없다.
신문왕이 한여름(5월)에 높고 밝은 곳에서 설총을 돌아보고 말했다.
“오늘 오랫동안 내리던 비가 비로소 그치고 남풍이 서늘하구려. 그러니 맛 좋은 음식과 음악보다는 고상한 말과 좋은 웃음거리로 답답하고 쓸쓸한 마음을 풀었으면 하오. 그대는 틀림없이 그러한 이야기를 들었을 테니, 나에게 들려주시오.”
이에 설총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옛날 꽃 임금님(모란꽃)께서 처음 오시자 향기로운 뜰에 심고 푸른 장막으로 둘러 보호하였습니다. 봄이 되어 아름다움을 드러내니 다른 온갖 꽃들을 넘어서서 홀로 빼어났습니다. 그래서 멀고 가까운 곳에서 아름다운 꽃들이 남보다 뒤질세라 달려와 꽃 임금님을 뵈었습니다. 그때 붉은 얼굴에 하얀 이를 가진 한 예쁜 여자가 화려하게 꾸미고 하늘거리며 꽃 임금님께 와서 말했습니다.
“저는 눈처럼 흰 모래를 밟고 거울처럼 깨끗한 바다를 대하면서, 봄비로 때를 씻고 맑은 바람을 쐬며 얽매임에서 벗어나 즐기는 장미라고 하옵니다. 임금님께서 아름다운 덕을 가지셨다는 말을 듣고 향기로운 장막 안에서 잠자리를 모시고 싶사온데, 임금님께서 저를 받아들이시겠사옵니까?”
그때 베옷에 가죽띠를 한 늙은 남자가 지팡이를 짚고 구부정한 모습으로 비틀거리며 꽃 임금님 앞에 와서 말했습니다.
“저는 서울 밖 큰길가에 살고 있습니다. 아래로는 아득한 들판을 마주하고, 위로는 높은 산에 기대어 사는데, 이름을 백두옹(할미꽃)이라고 합니다. 생각하옵건대 임금님께서는 곁에서 드리는 것이 넉넉하여,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시고 차와 술로 정신을 맑게 하시며 피륙을 넘치게 쌓아 두셨다 하더라도, 모름지기 좋은 약으로 기운을 돕고 아픈 돌침으로 독을 없애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경』에서, ‘실을 만드는 삼이 있어도 왕골과 기령풀을 버리면 안 된다. 그렇듯 모든 군자는 없어짐을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임금님께서도 그러한 뜻이 있으신지요?”
꽃 임금님 곁에 있던 신하가 임금님께 여쭈었습니다.
“두 사람 가운데 누구를 잡고 누구를 보내시겠사옵니까?”
꽃 임금님께서 말씀했습니다.
“늙은이의 말에도 일리가 있으나 예쁜 여자도 얻기가 어려우니 어찌하면 좋을까?”
늙은이가 꽃 임금님께 말했습니다.
“저는 임금님께서 총명하시어 올바른 도리를 아신다고 생각해 여기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렇지가 않습니다. 무릇 임금 가운데 아첨하는 사람을 멀리하고 올곧은 사람을 가까이하는 사람이 드뭅니다. 그래서 맹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임금을 만나지 못하고 일생을 마쳤고, 한나라 때 풍당이란 사람은 낮은 벼슬인 낭중으로 늙어 버렸습니다. 예로부터 이러하였으니 제가 어찌하겠습니까?”
그러자 꽃 임금님께서 말했습니다.
“내가 잘못 생각했소.”
이에 신문왕이 얼굴을 바르게 하고 말했다.
“그대의 이야기는 진실로 깊은 뜻을 가지고 있구려. 이 이야기를 써서 앞으로 임금 되는 사람에게 경계가 되도록 하시오.”
그러고는 설총에게 높은 벼슬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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