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관 자료 ━━/추천도서

독립과 자주를 향한 영욕의 90년

Joyfule 2020. 3. 30. 00:35



독립과 자주를 향한 영욕의 90년

 

이택휘 ㅣ 전 서울교육대학교 총장

 

 

역사의 대하적 인식

 광복 50년 그리고 광복을 위한 투쟁 50년, 이 파란만장한 한국 근현대사 한세기에 관한 정리는 이제는 단절과 갈등의 시각에서 결과하는 단편적 역사인식을 지양하고 발전과 통합의 시각에서 역사의 대하적 흐름을 공정하게 인식해야 할 때에 이른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차세대에게 온전한 민족사를 물려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대전환기적 한 세기를 주도해온 민족지도자들에 대한 정리와 조명 또한 어느 특정한 관점에서의 편견을 극복하고 총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광범위한 사실적 자료의수집이 선행되어야 하고 이들 자료에 대한 체계적 분서과 정리가 차분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대통령 李承晩에 관한 모든 것을 종합하여 정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전환기적 민족사 한 세기를 총체적으로 인식히기 위한 체계적 접근의 첫걸음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1875년에 태어나 1965년 타계하기가지의 만 90년에 걸친 그의 생애는 한국 근현대사의출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대내외적으로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던 풍운의 조선조 말기에 이미 항일민족운동의 선봉에 서서 청년기를 맞이하고, 1919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민족의 광복을 위한 독립운동을 이끌었으며, 1948년에는 신생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주도하였다.

 

그는 우리 민족이 미쳐 전근대의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시대에 이미 시간적으로는 근대와 현대를 그리고 공간적으로는 동양과 서양을 함께 지녔던 매우 드문 민족지도자였다.

 

거의 한 세기에 걸친 李承晩의 생이를 조명하면, 누가 무어라고 해도 그의 일생을 일관하여 지배한 사상은 '민족의 자주와 독립' 이었다. 일제가 적극적으로 한반도를 침략하기 시작한 19세기 말엽부터 무력강점으로 나라를 빼앗겼던 암울한 식민지의 극한상황에서 李承晩은 서울에서, 워싱턴과 하와이에서 그리고 상해에서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영일이 없는 나날을 보냈던 것이다. 그리하여 광복을 맞은 그의 나이는 어느덧 칠순의 노령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복직후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38선 이남에서나 38선 이북에서나 많은 민족독립운동의 지도자들 가운데서 특히 '李承晩 박사' 에게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주도하고 분단된 국토를 통일하여 진정한 민족의 자주독립, 곧 제2의 광복을 실현하는 데 앞장서줄 것을 기대하였다.

 

반세기가 흘러간 지금 전후세대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과연 정말로 그러했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1940년대 후반기 대다수 한국인들의 정서가 그러했던 것은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국권수호에 앞장선 청년

실로 한국 근현대정치사에서 李承晩에 대한 논평은 '국부'로부터 '독재자'에 이르기까지 다양다기하다. 항일언론인, 항일투사, 李박사, 건국 대통령, 반공투사. 노애국자에서 국부로까지 불리었는가 하면, 친미주의자, 친일파 비호자, 국토분단의 주범, 독재자 등으로 규탄되기도 하였다.'

 

우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으며 대한민국의 건국대통령이었던 민족의 지도자를 그렇게 불러 왔다. 이것이 한국현대사 인식의 현실적 수준이다. 이제는 이 수준을 넘어서는 논의와 정리가 요청되는 시점이다.

 

李承晩의 본격적인 항일투쟁은 1895년 야만적인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된 명성황후의 복수를 계획하다가 수배되는 20세의 피끓는 청년기로부터 시작된다. 배재학당 재학 중 '협성회' 결성을 주도하고, 졸업 후에는 주로 언론활동과 민중운동을 통해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한 적극적 활동을 전개하였으니, 이 모두가 20대 청년시절의 활약이었다.

 

1898년에『협성회회보』창간에 참여하여 그 주필로서 활동하였는가 하면, 같은 해에 한국 최초의 일간지『매일신문』을 창간하고 이어서『제국신문』을 창간하는 등, 언론을 통한 국권수호운동을 열정적으로 전개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은 언론을 통한 국권회복 운동과 동시에 독립협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만민공동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등, 민중운동을 통해서 국권수로에 앞장섰다. 그는 러시아와 프랑스가 한국정부에 대해 이권을 요구하자 이를 저지하려는 독립협회의 운동에서 총대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외인부대 창설을 중지시키려는 독립협희의 운동에서도 총대위원이 되었다. 1899년 초에 박영효 등의 이른바 황제폐위운동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체포, 투옥되어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그는 옥중생활에서도 그가 창간한『제국신문』에 논설을 썼으며 그의 최초의 저서『독립정신』을 탈고하는 놀라운 의지를 보여 주었다.

 

1904년 8월 특사로 석방된 뒤 이 해 11월 고종의 밀사로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 미국행이 李承晩의 생애에 있어서는 또 하나의 전기가 되었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 최초의 전기가 배재학당 입학이었다면, 미국행은 두번째 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의 미국행은『한미우호조약』에 명기된『상호방위조문』의 발효를 탄원하기 위해 고종의 밀서를 휴대하고 결행된 것이었다. 1905년 2월 미 국무장관을 면담하고, 같은 해 8월에 李承晩, 윤병구 두 사람의 밀사가 루즈벨트 대통령을 접견하면서 독립청원서를 전달하였다.

 

임정과 국민이 원한 초대 대통령

한편 이번의 미국행에서 그의 일생의 전기가 되는 조지 워싱턴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가 이 대학을 다니는 동안에 한국에서는 1905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사조약이 조인되고, 그 이듬해에 일본 통감부가 설치되어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부임했으며,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이준 열사가 헤이그에서 자결 순국하는 등 상황이 급전직하로 변화하였다.

 

그는 조지 워싱턴 대학을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그리고 1910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제법을 전공한 그가 박사학위 취득 축하연에서 윌슨(W. Wilson) 총장에게 "있지도 않은 국제법을 공부하라고 햇으니 등록금을 돌려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다고 하겠다.

 

일제의 강압적인 식민통치가 시작된지 2년째인 1912년, 이미 미국에서의 학업 기간 중에 기독교인이 되어 있던 그는 미국의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리는 '국제감ㄹ리교 대표회의'에 평신도 대표로 참석하고 그 길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이 회의에서 "기독교나 민주주의 정신은 약한 자를 보호하는 데 있다. 지금 일본은 무력으로 한국의 주권을 빼앗고 한국인을 잔혹하게 탄압하고 있다. 그러하니 세계의 기독교인들은 모름지기 단결하여 이 피압박민족을 하루 빨리 해방시키고 아시아의 평화를 이룩하며 나아가 세계평화유지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 이후 하와이로 건너가서 활동하던 중 1919년 국내에서 3 · 1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3 · 1독립운동은 李承晩을 포함한 모든 해외동포에게 새로운 힘과 희망을 갖게 하였다. 이 해 4월 11일 상해임시의정원은 李承晩을 국무총리에 추대하고 이틀 뒤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9월에는 임시정부 대통령에 선출되었는데 뒤늦게 1920년 12월 28일에야 초대 대통령 취임식을 가졌다. 3 · 1독립운동을 계기로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도 국내외에서 조직적인 민족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의 국내의 독입운동단체들이 대개는 미국에 있던 李承晩을 그 지도자로 추대하였다. 연해주의 임시정부는 李承晩을 국무총리로, 그리고 13도 대표들의 선포한 서울의 임시정부는 李承晩의위상이 어떠했는가를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그 뒤에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 하와이를 중심으로 활약하다가, 1932년 임시정부의 전권대사로서 제네바의 국제연맹에 파견되었다. 이 때 그의 일생의 반려가 된 프란체스카 도너를 만났다. 1941년 초에『일본 내막기 (Japan Inside Out)』를 출간했는데, 그는 이 책에서 "일본이 결국은 미국에 도전할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아 태평양전쟁을 예견하였다. 그는 항일 민족독립운동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본질을 극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2차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그의 육성은 미국의 소리(VOA) 방송의 전파에 실려 태평양을 넘어 왔다. 1943년 5월에는 임시정부가 대통령 李承晩의 명의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공식 서한을 보냈다.

 

신생국 지도자의 시련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우리 민족은 그렇게도 고대하던 광복을 맞았다. 그러나 한반도는 패전국 일본의 '영토' 였다는 강대국 국제정치의 힘의 논리에 따라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국내에 있던 여운형 등은『조선인민공화국』을 선언하고 아직 환국하지도 않은 李承晩을 주석을 추대하였다.

 

1945년 8월부터 정부수립에 이르기 까지의 시기는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명멸했는데, 어떤 이념이나 노선을 지향했건 간에 대부분의 경우에 정국의 주도권, 나아가서 새 국가건설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그 지도자로서 '李承晩 박사'를 추대해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만큼 李承晩을 지도자로 추대하는 데는 정치세력들에게 있어서나 일반 국민들에게 있어서나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는 묵시적 동의가 이루어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당시의 국민적 정서가 그를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데 결정적 요소가 되었다.

 

1946년 모스크바 3상회의가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논의하자 국내에서는 이를 반대하는 운동이 격력하게 전개되었다. 공산당도 처음에는 이 대열에 참가하는 듯하다가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꾸어 신탁통치를 찬성하고 나섰다. 이는 물론 북한 점령군인 구 소련군 사령부의 지령에 따른 것임을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를 계기로 李承晩은 공산주의자들을 매국노로 규정하고 완전히 결별하였다. 그의 유명한 반공노선은 이 때부터 확고해졌다고 볼 수 있는데, 그는 이미 미국에서 활동할 시기에도 구 소련의 세계전략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공산주의가 궁극적으로 민족의 자주독립을 통한 민족 · 민주국가의 건설에 결정적인 장애가 된다고 판단했다. 그는, "공산주의도 얼런 생각하면 그럴 듯이 보인다. … 실은 그 허울좋은 이념을 미끼로 가족과 민족, 정부와 국가의 단결을 모두 파괴하고 마침내는 크레믈린 독재 아래 노예가 되게 한다"고 규정하면서(1947년 1월 14일) "한국은 지금 사상적으로 우도 아니고 좌도 아니고 중간에 엉거주춤한 채 갈 바를 모르고 … 군정 당국의 미지근한 정책 아래 … 민생은 극도로 도탄에 빠졌다. … 한국인 스스로 정부를 세워 처리함이 한국을 살리고 … 민주주의의 첩경"이라고 역설했다. (1947년 1월 28일)

 

즉 그의 반공산주의 노선은, 첫째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둘째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하여 주장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단순히 정권의 획득이나 유지를 위한 방편만으로 활용되었다고는 결코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는 1950년 10월 평양 수복 후 환영대회에서 "나의 동포, 더구나 공산당이ㅡ 학정 속에서 해방된 이 동포들과 내가 한데 섞일 수가 없다면 나는 대통령이 되고 싶지도 않고 살고 싶지도 않다"고 연설하며 군중 속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반공산주의 노선이 아니었다면 한반도가 동구권이나 쿠바와 같이 또 하나의 구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하여 그야말로 또 다른 종속의 시대가 열렸을 것이라는 끔찍한 가정을 가능하게 한다.

 

그는 상상을 초월하는 민족이익의 보호자였다. 패전국 일본의 어선들이 한국전쟁기의 혼돈을 틈타서 한반도 연근해의 수산자원을 남획해가는 사실을 알고 李承晩 대통령은 비록 전시의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우리 어민과 민족자원의 보호를 위하여 두만강 입구로부터 남ㅂ해를 거쳐 압록강 입구에 이르기까지의 광대한 구역에「평화선」을 선포하여 주권을 행사하였다. 이는 우리 수산자원의 보호를 위해 일본 어선의 침범을 막고 나아가 장차 일본과 전후배상처리를 포함한 외교교섭에 잇어서 이니셔티브를 잡는 데 유리한 고지를 확보한다는 원대한 뜻이 있었던 것이다. 

 

카리스마의 상실

그는 비록 신생 약소국가의 대통령이었지만 능숙한 솜씨로 자주적 외교를 구사하였다. 특히 대미 외교에 있어서, 그를 친미 일변도로 몰아붙이는 견해도 있지만 실제로 그는 실리적이며 소신있는 대미 외교를 전개했던 것이다. 미 군정 시기의 하지 중장과의 관계 또한 그러했다. 유엔군 포로수용소에 수용 중이던 2만 7천명의 반공포로 석방은 강대국은 물론 전세계를 놀라게 했던 과감한 조치였다.

그는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의 신봉자였다. 토지개혁의 실시를 국가건설 과정의 구조적 필수요소로 보았고, 전시에도 처음부터 계엄령을 선포하거나 헌법을 정지시키지 않았으며, 전쟁의 와중에서도 가능한 지역에서 지방자치를 실시했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희망과 능력과 결심을 가졌으니 우리나라를 민주주의 세력 아래서 통일하고야 말 것"(1957년 9월 15일)이라는 그의 결심에서 민족통일에 관한 그이 이념을 분명히 볼 수 있다. 1960년 4

 

李承晩 대통령을 가리켜 '외교에서는 귀신인데 인사에서는 등신' 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가 정치파동, 3선개헌, 3 · 15부정선거 등으로 집권 후반기 몇 해 사이에 오점을 남기어 평생의 공적을 스스로 무너뜨린 것은 분명히 '인사에는 등신'이라는 평가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신생국 지도자들이 스스로의 카리스마가 상실된 것을 깨닫지 못해서 불행한 최후를 맞는 것과 마찬가지로 李承晩 대통령도 그의 신화가 상실된 것을 자각하지 못했던 데서 비극이 싹텄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역시 한국 근현대사를 주도해온 거인이었다. 그는 외롭게 죽어 조국에 묻혔지만, 그가 떠난 뒤에 개인적으로 얼마나 청빈하고 검소했는가 하는 것을 알고나니 한편으로는 "아, 그랬구나" 하는 감회가 서린다.

 

더우기 그가 간 뒤의 남북한 지도자들이 그와 같은 인간적인 도덕성이라도 지녔더라면 하는 비감한 생각과 함께 말이다. 광복 58주년, 이제 그가 생전에 바라던, 그리고 우리 모두가 바라는 통일된 민주국가의 건설이 아직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