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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의 독립운동기(첫번째 도미외교활동) 2

Joyfule 2020. 3. 30. 00:39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의 독립운동기(첫번째 도미외교활동) 2

 

 충정공 민영환, 한규설, 법부대신 이지용과 미국공사 알렌 등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이승만 박사는 1904년 8월 9일 한성감옥에서 석방됩니다. 당시 대한제국은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기울고 일본의 압제가 강화되자 민영환과 한규설등의 개혁파가 집권하였으나 조정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은 더욱 커져 대한의 독립이 풍전등화에 놓인 실정이었습니다.

 

한성감옥서를 출감한 이승만 박사는 1904년 10월에 개설된 상동청년학원의 교장직을 잠시 맡았다가 11월 4일 고종을 비록한 개혁파 충신 민영환과 한규설의 밀사 자격으로 미국으로 떠납니다. 그 임무는 1882년에 체결된 조미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에 따라 러일전쟁이 끝나고 강화회의가 열릴 때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의 독립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대한독립을 위한 밀서를 지니고 미국으로 떠나는 이승만 박사에게 한규설은 50원의 여비와 공작금을, 그리고 민영환으로부터는 딘스모어에게 보내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민영환 · 한규설의 후원하에 밀서를 간직한 이승만은 일본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하와이 이민선 3등칸을 이용하여 태평양을 횡단하여 1904년 11월 29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합니다. 감리교 선교부의 와드맨 감리사, 윤병구 목사와 교포들의 따뜻한 영접을 받은 이승만 박사는 윤병구 목사와 밤새 의논한 끝에 앞으로 미국에서 열릴 강화외의에 '해외에 있는 한국인들'의 의사를 전달하자고 약속하고 다음날 미본토로 출발했습니다.

 

1904년 12월 31일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 도착하여 주미공사관을 찾아간 이승만 박사는 서기관 김윤정을 만나 자신의 여행목적을 설명하고 협조를 부탁합니다. 그리고 친한파 하원의원 딘스모어를 만나 미국 국무장관 헤이와의 면담을 서두릅니다. 1905년 2월 20일 이승만 박사는 딘스모어 의원과 함께 국무부에서 30분간 헤이 장관을 면담했고, 이 자리에서 헤이 장관은 미국이 한국에 대한 조약상의 의무를 다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그러나 그해 7월 1일 헤이 장관의 사망으로 불행히도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고, 그것은 대한제국의 앞날에 먹구름이 드리워지는 비극의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그 후 7월 초 포츠머스에서 러일 강화회의가 루즈벨트의 중재하에 열린다는 발표가 있었고, 동시에 루스벨트는 자신의 심복인 태프트로 하여금 사전에 미 · 일 현안에 관해 일본지도자와 협의토록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 방문길에 오른 태프트 장관 일행은 7월 12일 호놀룰루에 기항합니다. 그 전에 하와이 한국교포들은 '특별회의'를 소집, 윤병구 목사와 이승만 박사를 강화회의에 파견할 대표로 선정하고 미국대통령에게 제출할 청원서를 채택한 상태였습니다.

 

태프트의 기항 소식을 접한 윤병구 목사는 와드맨 감리사를 통해 태프트로부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이승만 박사와 자신을 소개하는 소개장을 받아냅니다. 이 소개장과 청원서를 가지고 윤병구 목사는 7월 31일 워싱턴의 이승만 박사를 찾아갔습니다. 둘은 필라델피아에 거주하는 서재필을 찾아가 청원서의 문장을 다듬은 후 태프트의 소개장을 가지고 오이스터 베이 소재의 여름 백악관에서 1905년 8월 4일 오후 3시 반, 이승만 박사는 미국 대통령 데오도어 루즈벨트를 만납니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사안이 워낙 중요하므로 정식 외교채널을 통해 청원서를 제출하면 자신이 강화회의에 제출하겠다는 답변을 듣고 이승만 박사와 윤병구 목사는 주미한국공사관을 찾아 갑니다. 두 사람은 김윤정에게 당장 필요한 조치를 취하자고 하나 김윤정은 본국정부의 훈령이 없기 때문에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고 딱 잡아 뗍니다. 이 일을 위해 이승만 박사는 미리 본국의 민영환에게 연락하여 김윤정을 대리공사로 임명하도록 조치를 취해 놓았지만 김윤정은 이미 일본측에 매수된 변절자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승만 박사의 미국 방문 목적은 무참히 좌절되었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8월 9일 민영환 앞으로 사행(使行)이 실패했음을 알리는 편지를 보냅니다. 민영환은 이승만의 사행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있었는데 이마저 실패로 돌아가자 이승만 박사에게 300달러의 후원금을 전해 준 두 달뒤인 1905년 11월 30일 자결합니다. 민영환의 자결은 이승만 박사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이후 이승만 박사가 일생을 독립운동에 일로매진하게 한 자극제가 되었음은 이승만 박사의 귀국 후 민영환의 남은 가족들에게 끊임없는 관심을 가지고 보살핀 것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승만 박사의 처녀외교는 제국주의 국가 간의 막후흥정으로 무참히 실패했으나 이 경험을 통해 국제관계의 냉혹함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훗날 프린스턴대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전공하고 "미국의 영향을 받은 [국제법상] 중립"이라는 빼어난 박사학위논문을 집필하게 된 것같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1945년 4월 이승만 박사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데어오어 루즈벨트에 대한 원망을 유감없이 쏟아 부으며 한국인과 임정에 대한 지원의 당위성을 강력히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 때의 뼈아픈 경험은 특히 건국과정과 건국 후 국가 재건기에 국익을 위한 미국과의 외교협상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 때론 미국을 질책하며 당당하게 협상에 임하게 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