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동행(同行) 1 - 임철우
네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 정문을 지나 백여 미터쯤 들어가면 길은 두 갈래로 나누어지고, 바로 거기 길이 나눠지는 지점에 서 있는 전화박스 곁에서 우리는 만나게 되어 있었다.
내가 너무 일찍 온 걸까.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세 시 오 분 전. 나는 조금 초조해하고 있었다. 집을 나와서 버스를 타고 와 그 자리에 서게 될 때까지 초조함은 줄곧 집요하게 목덜미를 잡아당기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다. 그건 훨씬 이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어젯밤 전화를 받는 순간부터, 아니 그보다도 더 먼저, 그러니까 네가 일 년 반만에 처음으로 나타났던 일주일 전의 그 충격적인 밤으로부터 나의 초조함은 이미 시작되었으리라. 너는 마치도 주술적인 힘을 지닌 북소리처럼 어둠 저편으로부터 갑자기 그리고 은밀하게 나를 덮쳐 왔다. 그 북소리 속에서 본능적으로 나는 어떤 불길한 파괴의 냄새를 감지했다.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조심스럽게 지켜 오고 있던 휴식과 평온하고 느슨한 일상의 생활감각을 밑바닥부터 송두리째 휘저어 놓고 말리라는 걸, 그리고 어쩌면 머잖아 그것들과 가차없이 결별해야만 하는 최악의 상태까지도 감수해야 할지 모른다는 위험스러운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북소리가 점점 가까와질수록 나의 불안과 초조함은 배가해 가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의식의 어느 한 구석에선가 위험신호를 알리는 빨간 비상등이 급박하게 작동을 시작했을 때, 적어도 나는 적절하게 방어자세를 취하든가 아니면 다가오고 있는 그 위험으로부터 달아나거나 했어야 옳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피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경계신호를 울리고 있는 의식의 저편 한구석으로부터 보다더 강력하고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그 북소리를 기다려 받아들이기를 명령하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를 몰아세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결국 기다릴 도리밖에 없었다. 더욱 확실하게 가슴을 채워 오는 너에 대한 애정으로 전율하며 나는 끝내 너와 또 네가 안겨 줄 불길한 것들마저도 함께 받아들여야 할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인기척이 들렸다. 짐짓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던 나는 이내 긴장을 풀었다. 네가 아니었다. 젊은 여자가 전화박스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수화기를 들고 동전을 집어넣는 동작을 나는 유리창 너머로 모두 지켜보았다. 집에서 걸레질이라도 하다가 나온 참이었는지 그녀는 허름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저예요. 네네. 어떻게 되었다구 하던가요……어머. 낳았어요? 그래, 뭣이죠. 아들?……네엣? 아니, 낳았는데……에그머니나. 저를 어째……
여자는 울상을 짓고 있었다.
또 사산이라니……세상에……두 번씩이나……세상에.
수화기를 걸고 여자가 나오기 전에 나는 급히 시선을 거둬들였다. 여자는 고개를 떨군 채 힘없는 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녀의 발뒤꿈치에서 슬리퍼가 혓바닥을 날름대며 끌려가고 있었다.
다시 시계를 확인했다. 세 시가 조금 넘은 시각. 그래도 너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전화박스 곁에 우체통이 서 있었다. 전신을 빨간 색으로 칠한 그것의 빛깔이 까닭 모를 위기감을 주었다. 접선, 문득 그런 불쾌한 단어가 떠올랐으므로 나는 무심결에 좌우를 휘둘러보았다. 무슨 스파이극 혹은 범죄극에서나 쓰여지는 그 고약한 어휘에 대해 왠지 강렬한 적개심이 치밀어 올랐다. 대신에 <만남>이라는 지극히 정감 어린 말을 쓰고 싶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가 이 전화박스를 표시점으로 하고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누군가는 서슴없이 그런 불쾌한 어휘로 서술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나는 또한 시인해야만 했다.
자꾸만 솜털처럼 일어나는 기분 나쁜 예감을 털어내려고 애쓰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아파트 단지 내를 연결하는 길로 이따금 택시가 나가고 들어오고 했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많이 눈에 띄지 않았다. 출근시간이 지났기도 했으려니와 어제부터 갑자기 기온이 떨어진 늦가을 날씨 탓도 있으리라. 사과궤짝을 거꾸로 엎어놓은 듯한 시멘트 건물들이 끝간데가 보이지 않도록 사방으로 이어져 나가 있었고 그 너머로 잿빛 하늘이 묵직하게 걸려 있었다.
한결같이 분홍색 페인트를 덕지덕지 개어 바른 채 규칙적으로 늘어서 있는 그 균일한 구도 속에서, 그리고 건물 측면마다에 씌어져 있는 숫자들과, 저마다 똑같이 유지하고 있는 건물 모서리의 칼로 자른 듯한 대담한 각도에 대해서 나는 까닭 모를 심한 혐오감과 반발을 느끼며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너는 나타났던 것이다. 처음에 나는 너를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의외에도 정문 쪽에서 나타난 너는 참으로 이상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꾹꾹 눌러 쓰고 있는 차양의 넓은 모자는 시골 국민학교 운동회를 연상케 했고, 짙은 검정색의 잠바는 H건설회사라는 글자가 노랑 색으로 가슴팍에 뚜렷이 박혀 있었다. 세상의 의심스런 눈초리부터 벗어나기 위해 너는 어디선가 그 모자와 유니폼을 구해 걸치고 이렇게 나온 것이리라. 하지만 그런 차림새는 오히려 어색함을 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런 몇 가지의 소도구들이 너를 너답지 않게 위장시키기에는 좀 빈약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나와 주었구나. 많이 기다렸니.
아니.
너는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 그건 너의 오랜 버릇이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호들갑을 떨지도 않았고 내 어깨에 와 닿는 충격도 훨씬 미미했다. 무엇보다 너는 불안한 시선을 연신 좌우로 날려보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인 듯했지만 사실은 어느 것이나 모조리 달라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숨길 수가 없었다. 우리 둘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그 분명한 변화가 나는 서글펐다.
대관절 어디서 오는 거냐. 이 근처 어디인가보지 그 집이?
나는 네 얼굴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여전히 남아 있는 불안함으로 나는 조바심을 하고 있었다.
벌써 잊었니. 그런 얘긴 묻지 않는 게 너나 나를 위해서 좋은 일이야. 모르는 게 속 편하니까…….
짜아식.
내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고 애매하게 네가 따라 웃었다. 웃자란 보리밭처럼 무성한 구레나룻 사이에서 내비치는 치아가 유난히 하얗게 빛났다. 넌 거의 수염을 깎지 않는 모양이었다. 처음 네가 나타났던 날, 내가 물었을 때 너는 조금이라도 얼굴이 달라 보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수염을 그냥 두기로 했노라고 대답했었다.
우리는 아파트 단지 정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나는 우리가 이용할 몇차시간표에 대해 설명했다. M시로 가는 열차는 시내에선 매일 세 차례뿐이었지만, 가까운 S읍에서는 비교적 자주 있었다. 서울에서 M시로 다니는 열차들이 S읍을 경유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시내에서 M시를 왕복하는 버스는 거의 매 십 분 간격으로 운행되고 있었으나 암만해도 그보다는 안전한 열차를 택하기로 했다고 너는 어제 전화로 내게 말했었다.
좋아. S읍으로 가는 거야.
마침내 네가 결정을 했다.
거기서라면 마침 한 시간 후에 완행열차가 있어. 하지만 정작 S읍까지 가는 게 문젠데……
괜찮아. 택시로 가면 돼. 돈은 내게 있으니까 염려 말고.
넌 선선히 대답했다. 우리는 정문에 다다랐다. 경비실 안에서 경비원인 듯한 두 사내가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너는 앞장서서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몇 가지 궁금한 것들이 있었으나 그냥 묻지 않기로 했다. 네 말마따나 모르는 것이 피차 좋을지도 모르니까. 어쨌든 넌 비밀투성이였다. 아직도 나는 네가 기거하고 있는 집조차도 정확히 모르고 있는 형편이었다. 전화를 걸어오는 건 언제나 네쪽이었고 어제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밤 열 시가 막 지날 즈음이었다.
M시로 가는 열차편 좀 알아봐 줘. 너랑 같이 동행하고 싶은데 그래 주겠니? 단도직입적으로 너는 그렇게 말했다. 이 날은 강의가 있었다. 몇 과목은 이 날 종강할 것이라고 했다. 아마 대학에서의 마지막 강의가 될 터였다. 하지만 그까짓 강의쯤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보다 나는 M시에로의 위험한 나들이의 이유에 대해서, 또 왜 하필 나와의 동행을 네가 요구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퍽 궁금했다. 그러나 그 문제 역시 입을 다물어 두기로 하자. 어차피 동행할 거라면 차차 알게 되겠지.
정문 앞에서 택시를 탔다.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운전수는 S읍까지는 시외요금을 내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오백 원을 깎은 액수로 합의를 보았다. 차는 종합운동장을 끼고 난 고가도로의 오르막길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잠시 우리는 침묵했다. 멀리 산이 보였다. 산의 거대한 몸체가 언제나처럼 도시를 품에 안은 채 묵묵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우직한 선머슴 같은 산의 무릎에서 이 도시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들어 살고 있었고, 우리 둘 역시 거기서 나고 자라 온 것이었다. 하지만 산은 이젠 어느덧 짙은 남빛 슬픔의 빛깔로 음울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차장 너머 멀리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문득 너와 나를 떼어놓았던 지난 일 년 반의 시간과 그 마디 끊긴 시간의 한쪽 끝을 저마다 손가락에 감아쥐고 다시 되돌아온 지금의 우리 둘을 생각했다. 그래. 우리는 어쨌든 다시 만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전의 우리가 아님을 서로가 깨닫고 있었다. 전장으로부터 돌아온 귀환병들처럼 우리는 여전히 우리였으나, 또한 우리는 더이상 우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실로 까마득하게 오랜 세월같이 여겨지는 일종의 진공상태와도 같았다. 너와 나 사이에는 거대한 협곡이 밑도 끝도 가늠하기 어려운 깊은 아가리를 벌린 채 존재하고 있었고, 그 양쪽 벼랑 끝에 마주서서 우리는 이 순간 아찔한 절망감과 당혹감으로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곁에서 어깨를 바싹 붙이고 앉아 있는 네 옆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좀체로 지워지지 않고 있는 그 서먹한 느낌이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지를 따져 보려 했다. 그러나 이내 너의 짙은 구레나룻과 부어 오른 듯 생기 잃은 뺨, 그리고 무심한 척하고 있었으나 사실은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있는 너의 눈빛 속에서 나는 쉽사리 서글픔을 읽어내고 말았다. 무엇보다 네가 깊숙이 눌러 쓰고 있는 그 우스꽝스런 모자와 검정잠바와 잠바에 쓰인 H건설회사라는 생소한 글자에게서 나는 우리들의 단절된 시간을 절박하게 확인했다.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어쩌면 그것 때문인지도 몰랐다. 예전엔 그처럼 당당하고 활기에 넘치던 너에게서 내가 읽어야 할 것은 결코 그따위 애잔한 아픔이나 서글픔이어서는 안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고 우린 어쩔 수 없이 시인해야만 했다. 그런 모든 변화들을 배태하게 만든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냉정하게 돌이켜 생각해 보기에는 그 여름 이후 아직 우리들의 망가져 버린 의식은 회복되어 있지 못한 상태였다.
요즘은 손님이 많은 편인가요?
문득 네가 운전수에게 묻고 있었다.
어이구. 말도 마슈, 기름값은 내릴 줄 모르고, 또 얼마 전에 택시가 이 백 대나 새로 더 나왔답니다.
사람 수효에 비해 차가 많은 편이라서 신통치가 않다고 그는 대답했다. 너는 이런저런 얘기를 끄집어내어 그와 주고받았다. 그런 네 음성이 어딘가 조금은 과장되어 있는 듯했다. 아마 너는 불안함을 감추기 위해 입을 열었을 것이다. 그리고 보니, 운전수는 이따금 앞거울을 곁눈질하며 우리들을 살펴보곤 했다. 어쩌면 그것이 운전수들의 단순한 버릇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 때문에 너는 퍽 조바심을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벌써 일 년 반이 지난 일이다.
하루하루를 입에 풀칠하기에 바쁜 사람들이 이처럼 어설픈 소도구로 변장하고 나선 네 얼굴을 쉽사리 포스터 속의 사진과 일치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기야 또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았다. 며칠 전에 너를 돌고개 근처에서 목격했다는 이야기를 학교에서 우연히 들은 적이 있었다. 마침 문학부 앞 벤치에 앉아 있던 나는 가슴이 철렁해서 돌아다보았는데, 그 말을 하고 있는 녀석은 전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어쩌면 너도 그 녀석을 모를 것이다. 그렇듯 정작 자신은 모르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전혀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언제든지 확인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가장 두려운 일일 것이었다.
차는 광천동 공단 앞을 지나 S읍으로 가는 길을 마악 접어들고 있었다. 하늘은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고 길게 뻗은 아스팔트 도로가 한층 칙칙한 빛깔을 하고 있었다. 이내 국군병원이 좌측으로 스쳐 지나갔고 차는 언덕을 넘어섰다. 거기서부터는 시외였다. 길 양쪽의 집들이 차츰 뜸해져 갔고 저만치 들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차가 속력을 내고 있었다.
네가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일 주일 전이었다. 그날 저녁 식구들과 함께 TV 앞에 앉아 있다가 나는 그 전화를 받았었다. 뜻밖에도 K였다. 그는 나보다 먼저 졸업해서 고시공부를 하고 있는 참이었다.
웬일이냐. 전화를 다 걸구.
그냥…… 뭐 좀 보여줄 게 있어서 그래. 지금 우리집으로 와.
느이 집으로?
잠시 의아해하던 나는 문득 긴장하고 말았다. 어딘가 들떠 있는 듯한 K의 음성에서 언뜻 짚이는 게 있었다. 택시를 타고 K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외등도 없는 컴컴한 골목을 걸어들어가며 난 줄곧 흥분해 있었다. 일 년 반 동안의 길지 않은 시간이 너를 만나러 가는 내 가슴을 그처럼 어지럽게 휘저어 놓을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정말 생각해 보면 그간 우리는 너무 오래 살아 버린 모양이었다. 그 몇 번의 계절이 바뀌었던 일 년 반 동안에 겨우 스물 일곱 살 동갑나기인 우리는 터무니없이 늙어 버린 것이었다. 내 직감은 맞았다. K가 대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시간 전에 네가 불쑥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반갑다.
네가 맨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우리는 손을 꽈악 움켜쥐고 한순간 게걸스레 서로를 응시했었다. 너와 내가 맨 먼저 나눈 인사는 그것뿐이었다. 신파극에서처럼 와락 얼싸안고 포옹을 할 수도 있었다. 혹은 눈에 물기가 핑그르르 돌만큼 오래 굶주려 왔던 우정의 재회를 감격적인 장면으로 그럴 듯하게 그려내는 것도 그런 대로 좋았으리라. 죽은 줄만 알았던 친구와의 극적인 해후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기이할만치 우리는 말을 절약하고 있었고, 나는 자꾸만 끊어지는 호흡을 정돈하려 애를 써야 했다.
몸이 부쩍 늘었구나.
글쎄 말이다. 맨날 먹고 자고 하다 보니까 이렇게 하마같이 살만 쪄버렸어. 허허.
정말 너는 네 말마따나 하마가 되어 있었다. 원래 몸집이 크긴 했지만 전에는 그처럼 비대하다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두부같이 물렁하게 느껴지는 군살과 얇은 셔츠를 들추고 나온 불룩한 배를 보고 있으려니 너무 의외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상상하고 있던 네 모습은 초웨한 얼굴과 비쩍 말라 버린 몸뚱이 쪽에 보다 가까왔었다. 그렇지만 사실 그건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른다. 한여름에조차 창문을 마음놓고 열기 힘든 불안 속에서 날마다 방구석에 갇혀만 지냈을 터이므로 운동부족일 것은 뻔한 이치였다. 그러고 보니 그건 살이 아니라 부어 오른 것이라고 해야 옳을 대단히 불균형적인 건강상태라는 사실을 나는 곧 깨달았다.
덕분에 방구석에서 책만 봤겠구나. 짜식. 무식한 티를 많이 벗었겠는데.
응. 그럭저럭. 하지만 그까짓 책…… 봐서 뭘하겠니.
나는 예전에 하듯, 우리들 사이의 농지거리를 해묵은 약속처럼 꺼내어 억지로 맞추어 보려 했으나, 그것마저 잘 되지 않고 말았다. 잠시 침묵이 끼어들었다. 무언가가 자꾸만 우리를 서먹하게 만들고 있었다. 죄스러움과 쑥스러움, 꺼림칙함과 불편함…… 그런 대단히 혼탁하게 엉크러진 감정들이 너와 나, 그리고 K를 에워싼 채 견디기 어려운 끈끈한 막을 형성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 하고픈 말은 산더미 같았는데 정작 나는 겉배운 외국어처럼 서툴게 더듬고만 있었으니……. 하기야 네가 떠난 뒤, 남은 우리가 보내야 했던 몇 개의 계절을 지금 와서 얘기한들 뭘하랴. 강의실의 빈 의자들을 자꾸만 외면하려고 애쓰며 우리가 비운 그 숱한 술잔과 천지 같은 넋두리와 악취 풍기는 갖가지 절망의 몸짓들을 어떻게 전해 줄 수 있을 것이냐.
살아 있을 거라고 믿었어. 고생이 많았겠구나.
뭐 그럭저럭…… 죽지 않으니까 살게 되더라. 허허.
우리는 동시에 웃었다. 그리고 자신의 것과 똑같은 상대방의 어설픈 웃음을 확인하는 고통스러움을 참아내야 했다. 역시 끊어진 실 마디는 이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다시 아까보다 훨씬 더 선명해져 오는 서먹함을 나누어 지니며 우리는 침묵했고 또한 소리 없이 저마다 우리는 절망하고 있었다. 그 서먹함은 마치도 내가 상상하고 있던 말라깽이인 너의 모습과 하마같이 부어 오른 지금의 네 모습과의 사이에서 드러나는 차이만큼이나 나를 당혹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한순간, 나는 네 얼굴에 떠오르고 있는 짙은 피로의 흔적을 지켜보다가 불현듯 몸을 떨고 말았다. 그토록 절망적인 피곤함을 네게서 확인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 어떤 유랑자의 눈빛도 그처럼 짙게 드리워진 피곤을 지니지는 못할 것 같았다. 쉬고 싶어. 그렇게 얘기하고 있는 듯한 얼굴로 너는 내 앞에 앉아 있었다.
그래. 이렇듯 피곤에 지친 모습으로 너는 다시 고향을 찾아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고향은 이미 너를 따뜻하게 맞아줄 수 없는 이방인의 동네로 변해 있었다. 이 도시의 골목길과 구멍가게 하나하나까지도 모두 훤하게 외우고 있을 만큼 너는 여전히 고향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이제 이 도시는 더이상 예전의 너를 기억해 주지 않고 있었다. 바로 그 까닭에 너는 이렇듯 고향에 돌아와서까지도 어둠에 몸을 숨긴 채 밤에만 박쥐처럼 기어나와야 하고, 또 다른 사람을 시켜 친구를 불러내도록 해야 하는 것이었다. 택시는 긴 콘크리트 다리 위를 통과하고 있었다. 다리 아래로 빈약한 강줄기가 저만치 늦가을의 퇴색한 들녘을 구불구불 기어나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담배연기를 내보내지 위해 유리문을 반쯤 열었다. 바람은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어왔다. 비행장을 옆에 낀 곧고 넓은 도로에서 운전수는 꽤 속력을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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