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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同行) 2 - 임철우

Joyfule 2015. 10. 6. 07:37

 

 

단편소설:

동행(同行) 2 - 임철우

 

     아름다운 동행...Rarindra Prakarsa Photography

 

역전 광장은 한산한 편이었다. 여기저기 현수막과 안내판 따위가 세워져 있는 광장을 우리는 가로질러 가야 했다. 역사 왼쪽에 파출소가 보였고 여행장병 안내소라고 씌어진 간판을 지나 대합실로 들어섰다.

나는 천정 바로 밑에 비스듬히 붙어 있는 시간표를 확인했다. 역시 삼십 분 후에 M시행 완행이 있었다. 문제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였다. 돌아다보니 너는 저만치 구석진 곳에서 서성거리고 있었으나, 나는 네가 내심 안절부절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불안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퀴퀴한 냄새로 가득한 대합실 안에서 유난히 우리들만 이물질처럼 다른 사람들 속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것만 같은 어리석은 조바심이 일었다. 교실 하나 크기 정도의 대합실 안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거기엔 의자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알고 보니 그것들은 모두 옥외 광장에 놓여 있었다. 아마 건물이 비좁은 탓인 듯했는데, 쌀쌀한 날씨에 쫓겨 사람들은 대부분 대합실로 들어와 무료히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어떻게 할까. 우리는 잠시 망설였다. 근처에 다방이 있긴 했으나 네가 반대했고, 그렇다고 무모하게시리 번잡한 대합실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우리는 밖으로 나가 광장의 벤치에 앉기로 했다. 긴 나무의자가 열 두어 개쯤 나란히 놓여 있었다. 우리는 귀퉁이를 차지했다.

한동안 우리는 담배만 피웠다. 가까운 공중변소로부터 지린내가 흐물흐물 풍겨 나왔다. 대부분이 시골사람들인 남녀들은 눅진한 암모니아 내음을 옷에 묻히며 번갈아 드나들고 있었다. 맞은편 의자엔 젊은 패거리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계집애들이 둘 끼여 있었고 나머지 셋은 입영영장을 기다리고 있을 또래의 사내들이었다. 하나같이 건달기가 몸에 밴 사내녀석들의 얼굴은 불쾌하니 달아올라 있었고 계집애들은 멋대로 히히덕거렸다. 어쩌면 같은 패거리 가운데 하나였을 어떤 사내의 결혼식에나 참석하고 돌아가는 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땅콩이며 오징어 따위를 어수선하게 늘어놓고 낄낄대며 먹고 있는 그들의 주위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이 나는 차라리 부러웠다.

 

대합실 건물의 외벽에 갖가지 벽보가 어지러이 붙어 있는 게 보였다. 불조심. 자연보호. <속은 인생 어제까지, 밝은 인생 오늘부터>라고 적힌 방첩포스터, 그리고 그 옆으로 하사관 모집광고와 지명수배자들의 사진도 나란히 붙어 있었다. 이십 칠 세. 신장 백 칠십 오 센티미터. 미남형에 호리호리한 체격. 그 아래에 고등학교 교복 차림의 네 사진도 틀림없이 끼여 있을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지금 바로 내 곁에 앉아 있는 우스꽝스런 차림의, 얼핏 보면 사십대쯤으로나 뵈는 더부룩한 구레나룻의 뚱뚱한 사내를 나는 새삼스레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사진 속에 앳된 소년의 모습을 떠올리며 혼자 쿡쿡 웃고 말았다. 너는 무심한 표정을 내게 돌리고 있었다.

왜 그래.

아냐, 그냥. 흐흐흐. 네 사진 본 적이 있니?

어디……?

내가 턱끝으로 벽보를 가리키며 웃었고, 잠시 그쪽으로 눈길을 주고 있던 너는 고개를 저었다.

임마, 너 그 치들한테 고맙다고 해야겠더구나. 몸이 후리후리한 미남형이란다. 너더러. 으흐흐흐.

그래?

비로소 너는 조금 웃었다. 그러더니 이내 낮게 한숨을 깔아 내쉬며 허공에 시선을 던지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후회를 씹으며 발끝에다가 시선을 박았다. 온몸이 모래 속에 묻힌 듯 꺼끌꺼끌한 느낌에 커다랗게 고함이라도 내질렀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지난 일 년 반 동안 우리는 어디에서고 네 얼굴과 마주쳐야만 했었다. 극장이나 다방, 식당, 대합실, 술집, 당구장…… 그 어디를 가나 너는 줄곧 우리를 따라다니며 끈질기게 괴롭히는 것이었다. 지난 봄, 졸업여행을 갔던 제주도 어느 여관의 방안에까지 쫓아들어온 교복차림의 너 때문에 그날 밤 우리는 녹초가 되도록 술을 퍼마셨고 엉망으로 추태를 떨어야 했다. 하지만 차라리 그때가 더 우리에겐 마음 편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엄지손가락만큼 작은 사진 속에 너를 가두어 놓고 나서 이따금 낡은 앨범을 펼치듯 적당한 양의 감상과 자기합리화를 취향껏 덧칠해 가면서 너를 들여다볼 수 있었을 동안만은 그래도 너는 우리들에겐 여전히 기억 속의 이름으로서만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네가 다만 과거의 기억 속에서 머물러 있어 주는 한, 그래도 우리는 술에 취하면 잠들 수가 있었고, 가끔은 아픈 상채기를 손톱으로 할퀴어대면 저주 섞인 넋두리를 퍼부어 대다가도 그것이 끝나면 사실은 더 많은 일상의 권태와 망각 속으로 쉽사리 몸을 던져 넣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은 피곤했었다. 너무나 피곤하고 힘겨웠으므로 우리는 차라리 잠들어 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마비된 의식과 교살 당한 영혼의 희뿌연 혼돈의 나락을 향해 까마득히 침몰해 가도록 내버려두고 싶었다.

그래. 모두들 가라앉고 있었다. 저마다 탈색된 눈빛으로 심연의 저편으로 어느덧 차츰차츰 가라앉아 가고 있는 참이었다. 잠들어라. 깊이깊이 잠들어라. 영영 깨어나지 않을 잠 속으로 투신하라. 깊이깊이. 오래오래……. 어디선가 감미로운 음악처럼 그렇게 끊임없이 귓전에 불어오는 소리. 소리. 소리. 그 불경한 주문을 들으며 우리는 침하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저마다 그 감미로운 속삭임을 이렇게 은밀히 서로서로 따라서 되뇌인다. 잊어라. 잊어버려라. 옛날은 옛날일 뿐. 기억은 기억일 뿐. 보다 새롭고 싱싱한 내일을 위해 악몽은 흔적조차 남기지 말고 지워 버려라. 깨끗이. 완벽하게…….

아아. 그런데 하필 이 순간에 네가 나타난 것이다. 그 불쾌하고 섬뜩한 악몽의 흔적을 우리의 졸리운 뇌리로부터 감히 곡괭이질해내기 위한 하나의 음모로서, 그리고 그 악몽의 명백한 증거물로서 네가 나타난 것이다. 기억하라. 기억하라. 기억하라. 어거지를 쓰듯, 우리의 이 몽롱한 최면의 당밀분을 함부로 휘저어 희석시키려는 당돌하고 무모한 음모와 함께 너는 어쩌면 우리들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공모하여 억지로 너를 가두어 놓기를 원했을지도 모르는 저 네모난 사진 속으로부터 돌연히 뛰쳐나와 지금 이 순간 우리 앞에 분명한 실체로 서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너는 이제 다시금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통증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빵봉지며 낡은 휴지조각들이 발밑을 굴러 지나갔다. 너는 그새 몇 개의 담배를 연거푸 피워 물었고 나는 자꾸 시계만 들여다보았다. 저쪽에서 히허덕대며 장난질을 하고 있던 술 취한 젊은 녀석 중의 하나가 토하려는 시늉으로 왝왝 소리를 내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자라에서 일어났다.

개찰이 시작되고 있었다. 내가 앞서서 개찰구를 나섰다. 우리는 각자 표를 따로 지니고 있었다. 그러기를 네가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만일의 경우에는…… 하고 넌 말했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는 않았다. 기차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화단 귀퉁이의 벽돌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화단엔 말라붙은 사루비아가 드문드문 꽂혀 있었다. 반대편 플랫폼에 멈추어 있는 열차 안에서 승객들이 무심한 눈길로 이쪽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 너머로 하늘은 한층 짙은 잿빛으로 무겁게 걸려 있었다.

미안하다. 자꾸 심부름 시켜서…….

문득 네가 말했다.

미안하긴. 짜식. 새삼스럽잖아.

나는 건성으로 웃음을 흘리다가 갑자기 내가 했던 말을 다시 입안에 집어넣고서 우둑우둑 씹어 삼키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관절 왜 이럴까. 어째서 오늘은 너와 나누는 말들이 이렇듯 모조리 이상스런 꼴로 변해 버리기만 하는 것일까.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애매하게 피해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걸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아. 지금껏 거처를 옴길 때마다 늘 그랬어.

 

손가락으로 성냥개비를 분지르며 너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한줌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 속에는 녹슨 쇠붙이 내음과 비릿한 석탄 냄새가 스며 있었다. 커다란 등을 구부린 채 앉아 있는 네 모습은 마치도 야단을 맞고 난 어린애 같았다. 피해라고…… 대관절 누가 피해를 주는 쪽이고 누가 당하는 쪽이란 말인가. 고향에 돌아와서까지 이렇듯 숨어다녀야 하는 너는 누구며 태연한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세상을 활보할 수 있는 나는 또 누구이냐. 결코 장난스럽지 않은 표정으로 그런 식의 말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불현듯 지독한 거부감을 느꼈다. 정말이지 너와 나는 한 번도 그런 식의 거북한 대화를 나눈 적이 전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우리들을 예전의 우리일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결국 나는 아까와 똑같은 의문을 반복하고 있었다.

 

기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맨 뒷칸으로 올랐다. 생각보다 빈 자리가 많았다. 구석진 창 쪽을 택해 우리는 마주보고 있었다. 퍽 낡고 지저분한 인상을 주는 객차였다. 푸른색 천으로 씌워진 의자는 쿠션이 거의 없이 팍팍했고 군데군데 엉겨붙은 껌 자국이 남아 있었다.

예정된 시각보다 오 분 늦게 완행열차는 출발했다. 시커멓게 석탄 가루를 뒤집어쓴 역 건물과 주변의 낮은 함석 지붕들이 서서히 뒤로 밀려나가기 시작했다. 역 근처의 모든 집들은 한결같이 지저분하고 우중층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나는 멀리 시가지 너머로 어둡게 내려앉아 가고 있는 잿빛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비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가지를 벗어나자 열차는 점점 빠르게 진동을 시작했고 이내 탁 트인 벌판이 차창 밖으로 펼쳐졌다. 이따금 늦은벼를 배고 있는 농부들의 모습이 보였다. 경운기에 가득히 볏단이 실려 논길을 지나가기도 했고, 지붕에 빨간 고추가 널린 외딴 농가의 마당에서는 갓난애를 업은 계집아이들이 고무줄을 넘고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약간 마음이 느긋해지는 느낌이었다. 너는 비스듬히 모자를 위로 올려 쓴 채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때 난 문득 네 이마를 스치고 지나가는 음울한 그늘을 보았다. 그것은 예의 그 피곤함이었다. 넌 여전히 그 짙고 어두운 피곤함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금방이라도 후두둑 무너져내릴 것만 같이 지쳐 있는 네 눈빛이 새삼스레 가슴을 후벼냈다. 그 동안 내가 서울에서 이집저집으로 거쳐를 옮겨 다닌 것만도 자그만치 열 네 차례였어. 때로는 하룻밤만에 쫓겨나다시피 한 적도 있었으니깐…… 정말이지 너무 지쳤어. 더는 이렇게 살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해. 어떤 날은 에라, 될 대로 되라지 하고 벌떡 뛰쳐나가 버리고 싶은 생각까지도 들어. 그렇게 너는 며칠 전 내게 말했었다.

 

제복 차림의 승무원이 유리문을 밀고 나타났다. 그는 우리 쪽을 힐끔 쳐다보았을 뿐 곧 지나쳐 버렸다. 어깨에 두른 붉은 헝겊에는 <공안>이라고 씌여져 있었다. 우리는 무심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황황히 고개를 돌려 버렸다.

네가 여기에 내려와 있다는 사실을 순임이는 알고 있니?

내 물음에 너는 한동안 입을 다문 채 창밖을 내다보고만 있었다.

아니…….

이윽고 너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고개만 한 번 흔들었다.

어째서…… 누구보다도 가장 걱정하고 있을 텐데.

그리고 싶었는데…… 서로를 위해서 아예 참기로 했다. 역시 모르는 것이 약이니까 말야.

너는 담배를 꺼내 물고 있었다. 아마 네 추측대로 순임이 역시 방문을 받았을 것이리라. 알고 있을 거요. 솔직하게 대답해 주시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읍니까. 순임은 그때 무어라고 대답했을까. 몰라요. 아무것도. 아마 그녀도 나처럼 그렇게 대답했으리라. 모릅니다. 내가 그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몰라요. 정말 모른다니까요. 아벨을 흙 속에 묻어 놓고 돌아와 피묻은 두 손바닥을 뒤로 감추며 부인하는 카인처럼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래.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차라리 우리에겐 훨씬 편리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네 말마따나 모르는 것이 약이라니까. 어쨌든 그들 앞에 섰을 때 나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다리에 힘을 주려 애쓰면서도 왠지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대답할 수 있었다. 몰라요. 모릅니다. 너의 행방을 모른다는 사실이 마치 결단코 침해받아서는 아니 될 무슨 엄청난 진리이기라도 하다는 듯이, 그리고 그 사실이 부당하게 의심받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억울해하고 통분해야 마땅하다는 듯이 나는 제법 완강하게 부인했었다.

명백한 무지는 때로 인간을 용감하게 만들기도 하는 법이다. 과연 그랬다. 그때 난 나답지 않게 용감할 수 있었다. 결국 그들은 아무 소득도 없이 나를 돌려보내야 했다. 믿어 보겠소. 하지만, 다음에 또 만날 기회가 있을 테니까. 돌아서는 등뒤에서 사내가 그렇게 말했었다.

지금도 그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겠지?

누구 말야.

순임이.

아마 그럴 거야. 지난봄에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후로는 나도 아직 만나지 못했다만…….

 

기어코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성긴 빗발이 유리창에 부딪치며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유리창을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손바닥을 내밀어 떨어지는 빗방울을 받아 보았다. 빗물의 차가운 감촉이 부드럽게 손에 느껴졌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느닷없이 기차가 급정거를 했고 우리는 모두 의자로부터 몸이 퉁겨나올 듯한 세찬 충격을 받았다. 기차는 얼마쯤을 더 미끄러져 나아가다가 정지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고다. 사람이 치었어!

어디야, 어디.

승객들은 드륵드륵 창문을 밀어올리며 밖으로 머리통을 뽑아내고 있었다. 더러는 벌떡 일어나 출입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기도 했다.

아이구머. 웬 아주머니가 차에 치었능가 본디.

아니여. 남자 같구마이.

살아 있읍니까, 아직?

보나마나 죽?겠지라우. 원 저런. 피 좀 보랑께라우, 피.

저마다 한마디씩 떠들어대는 통에 차안은 온통 법석이었다. 나도 고개를 내밀고 차 안쪽을 살펴보았다. 사고가 난 지점은 건널목 부근인 듯하였다. 승무원인 듯한 제복차람의 사내들 몇이 한데 모여 당황한 손짓을 해가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그 주위엔 수많은 구경꾼들이 반원을 이루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차에 치였다는 사람의 형체는 이쪽에선 보이지 않았다. 그 부근은 시의 변두리쯤으로 여겨졌다. 낮고 초라한 지붕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퍽 가난한 동네 같았다. 나는 다시 의자에 앉으며 젖은 머리를 손으로 털었다. 사고가 났나 봐. 내가 뻔한 설명을 해주었을 때 너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었다.

 

비는 여전히 줄기차게 쏟아져내렸다. 그 속에서 기차는 한참을 멈추어 있었다. 이윽고 밖에 나갔던 사람들이 저마다 옷자락에 빗물을 묻힌 채 객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내 <덜컹>하고 기차가 시동을 걸었다.

자살했다는 것이 참말이랍디여?

웬걸요. 자살이 아니라 사고라던데요. 차단기조차 없는 건널목으로 여자가 빗속에서 급히 뛰어오느라고 미처 기차를 못 본 모양이예요.

집이 바로 근처래여. 돼지를 키움서 살아가는 아주 곤란한 여자라둥만.

어참, 징한 꼴도 다 봤그마이. 그 자리서 즉사를 했드라고이. 쯧쯧.

돼지밥을 받아서 이고 오는 참이었나 봐요. 바께스에서 쏟아진 밥알 같은 것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어요. 안되었지 뭡니까, 참.

기차에 치여 죽으면 보상도 한푼 못 받는다든디. 개죽음했구만, 개죽음.

기차가 쿵쾅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어느덧 시가지를 완전히 벗어나 어둠이 짙게 깔린 들녘으로 나와 있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먹빛 차창의 어둠을 응시한 채 말없이 앉아 있었다.

두두두두두……

더욱 굵어진 빗방울이 세차게 유리창을 두드릴 때마다 발사음 같은 요란한 소리가 났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조금 전 사고지점을 기차가 느린 속도로 지나쳤을 때 우리는 우연하게도 언뜻 가마니에 덮여 있는 그 시체를 보았던 것이다. 그 식어 버린 살덩이가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하얗게 질린 서로의 얼굴을 마주 쳐다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짧은 순간에 상대방의 얼굴로 떠오르는 자신의 것과 똑같은 그 악몽의 흔적을 확인하자마자 약속이나 한 듯 황급히 서로 외면해 버리고 말았다.

 

눈을 감은 채 나는 환상처럼 얼핏 스쳐 지나가 버린 그 음울한 영상을 뇌리에서 지우려고 애를 썼다. 몸을 반쯤 가린 가마니와 그 밑으로 흘러 고였을 진한 먹물과 벗겨져 나간 신발 한 짝, 그리고 건널목의 가로등 불빛에 훤히 드러나 보이던 하얀 밥찌꺼기며 이그러져 나뒹굴고 있던 바께스. 그리고 숱한 구경꾼들. 구경꾼들……. 그것들은 순간, 너와 내가 그토록 안간힘을 써 가며 간신히 덮어두고 있었던 그 악몽의 이부자리 한 자락을 잡아채어 매몰차게 벗겨내고 말았다. 그리고 그 이부자리 속에서 기어코 우리의 수치스런 알몸은 드러나 버린 것이었다. 그것은 섬짓한 윤간의 기억이었다. 안 돼. 안 돼. 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 버렸다.

두두…… 두두두두.

빗방울이 미친 듯 유리차을 두드리고 있었다.

불현듯 시야가 부옇게 흐려져 왔다. 나는 얼른 네 얼굴을 훔쳐보았다. 모자를 눌러쓴 채 너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황황히 손등으로 눈물을 지웠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렇듯 실없이 눈물을 흘리는 부끄러운 버릇을 얻어 버린 것이었다. 술에 취해서도 찔끔대고 깊은 밤 악몽을 꾸고 나서도 찔끔거렸다. 무심히 오가는 행인들 틈에 끼여 낯익은 거리를 지날 때나 눈부신 봄날의 햇살을 밟으며 후미진 골목을 허청허청 걷다가도 핑 까닭없는 눈물이 고여 오곤 했다. 하지만 넌 울지 않는다. 네가 우는 모습을 한 번도 아직 본 적이 없다. 바로 그것이 너와 내가 다른 점일지도 모른다. 쉽사리 올 줄을 아는 나는 또한 등을 돌려야 할 적절한 순간을 포착하는 현명함도 쉽사리 터득하여 그것을 부적처럼 지니고 다닐 줄도 알았다. 하지만 너는 좀처럼 울지 않는 바보스런 녀서이므로 모두들 햇볕 속을 활보하고 있는 이 땅에서 아직도 네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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