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이한규목사

디모데전서(4) 리더에게 필요한 자세(2)

Joyfule 2010. 10. 19. 09:38

 

 

 

디모데전서(4) 리더에게 필요한 자세(2) (딤전 1:16-20) 

 

 

디모데전서(4) 리더에게 필요한 자세(2)

디모데전서 1장 16-20절 - 주일설교


<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


  요새 교회성장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목회의 어려움을 호소합니다. 일전에는 교회가 너무 부흥이 안 되니까 목사님이 우울증에 빠져 자살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런 어려운 얘기들이 들려와도 교회에 대한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려움 중에도 대부분의 목회자와 성도들은 열심히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어떻게 더 능력 있는 사람으로 보일까?”하는 것보다 “어떻게 더 사랑할까?”를 더 생각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능력 있는 사람으로 보이려고 하면 일과 환경의 스트레스로 삶이 힘들게 되지만 더 사랑하려고 하면 자신의 직분과 환경과 상황에 감사하며 열심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항상 희망을 크게 말하며 살아야 합니다. 현재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 상황이 축복의 재료입니다. 내 상황은 내 열심에 따라 꽃으로 피어나게 될 꽃봉오리와도 같습니다. 나중에 “그때 조금 더 열심히 할 걸. 열심히 사랑할 걸...”이라고 후회하지 말고,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내 교회를 사랑하고, 내 현실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는 고통과 눈물과 탄식과 슬픔까지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인생은 기쁨과 즐거움이라는 날실과 슬픔과 고통이라는 올실이 엮여 만들어집니다. 모든 순간이 아름다운 인생의 가능성을 안고 우리에게 꽃봉오리로 다가올 때 참고 기다림으로 꽃봉오리를 꽃으로 피워내는 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 리더에게 필요한 자세 >


  디모데전서는 교회생활을 잘하는 교훈들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교회생활 잘 하려면 최소한 직분 하나를 맡고 그 직분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한 가지 일은 맡을 수 있습니다. 못한다고 속단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 주실 때는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힘도 주십니다.


  만약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주었다면 주저하지 말고 기쁘게 맡아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직분을 감당할만한 힘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할 수 없는 일을 하도록 부르시지 않습니다. 작은 다윗이 거인 골리앗 앞에 서도록 부르신 것처럼, 엘리야를 아합 왕 앞에 서도록 부르시고, 다니엘을 사자 앞에 서도록 부르신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한 가지 일은 할 수 있는 정도의 힘과 시간이 있습니다. 그처럼 한 가지라도 직분을 맡아서 같이 참여하다 보면 신앙도 금방 자라게 될 것입니다. 물론 교회 일에 참여하다보면 가끔 안타까운 일도 보고 어려운 순간도 당합니다. 그 순간을 잘 극복하고 계속 맡은 자리를 잘 고수하면 리더의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리더가 되려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1. 본이 되는 자세


  본문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은혜를 주신 이유가 다른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고백합니다.


  이 구절에서 “본이 되게 한다!”는 말은 “남에게 본이 되라!”고 요구하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본이 되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본이 됩니까? 그 사람 위치로 가서 그를 이해하고 받아주어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상대방을 받아주면 모든 오해가 풀리고 결국 그 관계가 회복됩니다.


  서울의 일류 대학을 다니던 한 남녀가 있었습니다. 둘은 서로 좋아해 캠퍼스 커플로 지내다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결혼 10년쯤 되자 남편이 자꾸 바깥으로 돌며 다른 여자와 놀아났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사정도 하고, 위협도 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래서 몰래 뒤를 밟아 여자를 한번 보았는데 자기보다 훨씬 못한 여자였습니다.


  더 자존심이 상해서 목사님을 찾아가 어떻게 해야 될지 하소연을 했습니다. 목사님이 “남편을 아직도 사랑하느냐?”고 물으니까 “사랑하는 마음은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밤에 같이 잠을 잡니까?” 그러자 그분이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더러워진 사람하고 어떻게 같이 잠을 자나요?”


  그 말을 듣고 목사님이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관해 깨우쳐 주었습니다. “더러운 사람을 사랑하려면 나도 더러워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더러운 남편이 싫어도 주님의 사랑으로 남편을 한번 따뜻하게 맞이해 보세요.”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마음을 잡고 가정으로 돌아왔습니다. 목사님이 “어떻게 남편의 마음을 돌렸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남편을 이해하면서 “남편이 밖으로 도는 것은 내 책임이다!”라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해지고, 말이 곱게 나오니까 남편도 아내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다고 합니다.


  “본이 된다!”는 것은 남의 변화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변화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나의 변화를 인식하면서 내가 죄인의 위치에 내려갈 때 진정한 사랑이 나옵니다. 의인의 자리에 서서 죄인에게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의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죄인을 사랑하면 주님이 그렇게 하신 것처럼 죄인의 위치에 같이 서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어려운 사람의 위치에 서서 실제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펴야 합니다. 그처럼 남의 위치에 서 줄 때 우리들은 더 아름다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가끔 교회에는 충성하면서 교인들과 잘 부딪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인은 충성스런 사람도 되어야 하지만 먼저 예수님처럼 본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생활에서 가장 들어야 할 소리는 “저분 충성해! 저분 지도력이 있어! 저분 열심이야! 저분 성경박사야!”라는 말보다 “저분 예수님 닮았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도 저 집사님처럼 살아야지! 나도 저 장로님을 닮아야지!”라는 말을 들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교회에서는 일을 잘하는 능력보다 예수님 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장로님들을 자랑합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들은 제자들이 있어요!” 즉 장로님들의 섬기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교인들도 그렇게 닮는다는 얘기였습니다. 신앙은 목사님의 말씀으로도 자라지만 중직들의 섬김의 본을 통해서도 잘 자랍니다. 훌륭한 인물이 앞서서 가면 그 인격을 닮아 본인들도 그렇게 됩니다.


  직분자가 보여주어야 하는 본이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지만 3가지만 생각해보겠습니다.


1) 희생정신의 본


  사람에게는 개인의 비전과 함께 내가 속한 공동체의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를 질 줄 알아야 합니다. 공동체가 잘 되기를 원하면서 희생은 하지 않는다면 잘될 수가 없습니다.


  이솝우화를 보면 집주인의 결혼식을 맞이해서 동물들이 회의를 여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회자가 말했습니다. “이번 집주인의 결혼식에 음식을 잘 만들어 대접하려는데 여러분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그러자 모든 동물들은 입을 모아 “대찬성이요!”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곧 사회자가 “그럼 요리 재료로 이번에는 거위를 잡읍시다.”라고 하자 거위는 깜짝 놀라 소리쳤습니다. “저는 큰 알을 낳잖아요? 저 수탉을 잡으세요.” 수탉도 소리쳤습니다. “저는 아침을 알려줍니다. 저 양을 잡는 것이 어떤가요?” 그런 식으로 양, 개, 말, 소도 자기만은 잡으면 안 되고 다 남을 잡으라고 했습니다. 그처럼 희생하지 않으면 원하는 잔치는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직분자는 항상 거룩한 일에 먼저 희생하려고 해야 합니다.


2) 유연함의 본


  이런 격언이 있습니다. “유연함은 생명의 현상이지만 딱딱함은 죽음의 현상이다.” 실제로 생명이 있는 것은 부드럽지만 생명이 없는 것은 딱딱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살아 있는 생명력 넘치는 교회가 되려면 직분자는 유연해야 합니다. 물론 중직자가 강직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특히 선과 악을 선택하는 문제에서는 "예!"와 "아니오!"를 단호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좌우를 선택하는 문제에서는 "예!"와 '아니오!'를 유연하게 해야 합니다.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에 서는 문제에서는 “아니오!”를 잘 못하면서 교회 피아노를 좌측에 놓을까, 우측에 놓을까 하는 문제에서만 “아니오!”를 잘하면 그분이 속한 공동체는 악과 싸우기도 전에 불필요한 에너지를 다 소모합니다. 악의 유혹은 과감히 떨치고, 좌우 선택의 문제는 넓게 이해하고 수용하십시오.


  특히 성경을 볼 때 편협하게 보면 안 됩니다. 양쪽 측면의 진리를 다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넓고 무궁한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 이단이라고 여겨지는 그룹에서 잘못하는 가장 큰 잘못 중 하나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생각하는 그것을 딱 못 박고 그것만 믿으려고 하는 자세입니다.


  항상 다른 사람의 입장과 처지를 이해하는 넓은 마음을 가지십시오. 사회에서도 개혁파와 보수파가 창조적 긴장은 유지하되 크게 보고 서로 돕는다면 사회가 적으로 넘치지 않고 이웃으로 넘치는 소중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남을 깎아 내리면 내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나도 깎아 내려지고, 남을 올려주면 내가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나도 올라갑니다. 그처럼 직분자에게는 남을 배려하는 유연한 사고가 있어야 그 공동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됩니다.


3) 객관적 시야의 본


  사람에게는 주관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객관적 사실을 무시하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체험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체험 때문에 말씀을 분별하지 못하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이단적이다!”고 하는데 본인은 “자기가 진리를 아는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주관이 때때로 필요하지만 객관성이 없는 주관은 마음과 영혼을 곧 헐벗게 만듭니다.


  성도들마다 주관이 있습니다. 목회자는 그들에게 객관적 시야를 열어주어야 합니다. 객관성을 자꾸 무시하면 이단의 유혹과 신비주의에 빠지고, 결국 실패합니다. 부모들이 딸에게 “저 청년은 위험해!”라고 하면 결혼을 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설 ‘마농 레스코’나 ‘오리지널 신’이란 영화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자기 주관에 의한 감정적 사랑의 끝은 결국 인생을 파멸로 끝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남녀 간의 사랑은 그런 대로 “둘이 사랑하다 죽었다!”라고 미화될 수 있지만 신앙의 문제에서 그런 식으로 살면 영혼이 파멸됩니다. 객관적 사실을 무시하면 자기 주관이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더 사악한 악이 될 수 있습니다.


  옛날에 목회자 은퇴 제도가 없을 때 팔십이 넘은 한 목사님이 은퇴를 안 합니다.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은퇴하기를 원하는데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의 종이 죽도록 충성해야지.” 그러면서 사람들의 부축을 받고 강단에 올라갑니다. 또 연로하셔서 화장실에 자주 가야 되는데 힘이 없으니까 강단에 요강까지 놓았습니다.


  그런 일이 본인은 충성한다고 하는 것이지만 남이 보기에는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일이 됩니다. 그처럼 객관성을 잃어버린 주관적인 진리는 진리가 아니라 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직분자는 내 행위의 의미를 살필 줄 아는 객관적 시야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분들만이 교회에서 진정한 의미의 본이 되는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양심적인 자세


  본문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산하였느니라.“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는 말은 외식하지 말라는 말이고 말로만 사랑을 말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사랑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분은 눈을 게슴츠레 뜬 상태로 판단을 합니다. ”여기는 예수가 없어!“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말로는 제일 예수님이 있는 것 같은데 사실상 본인이 예수님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7장 22절에서 “주여 주여 하면서 권능을 많이 행한다는 자를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무슨 말입니까? 말로만 ‘예수, 예수’ 하는 자를 조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예수라는 말을 내세우는 말은 적게 하고 진짜 예수님답게 사는 사람이 진실한 사람입니다.


  솔로몬은 21살에 왕이 되어 부귀영화를 구하지 않고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놀라운 지혜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이가 많아지면서 점차 그는 지혜보다는 진실을 구하게 됩니다. 잠언 30장 7-8절에 나오는 솔로몬의 사상이 투영된 아굴의 말씀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한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지혜도 귀합니다. 그러나 진실은 더 귀합니다. 다른 어떤 화려한 것보다 진실이 더 귀한 줄 아는 것이 바로 성숙함입니다. 진실하려고 애써본 사람들이 진실이 얼마나 귀하고 큰 힘인지를 알게 됩니다. 진실은 화려하지 않고 조용한 것 같지만 최후의 승리자는 바로 진실입니다. 진실의 보상을 받아본 사람은 진실이 보화이고 영광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오늘 직분자가 갖추어야 할 자세에 대해서 몇 가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상하는 기준은 '나의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인 줄 알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직분을 잘 감당하려고 힘쓰고 애쓰십시오. 조금 일이 힘들고 환경이 어렵다고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처럼 믿음이 파선하지 마십시오. 본문 마지막 20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들을 사단에게 내어주었다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믿음의 공동체에서 잘랐다는 말입니다.


  요새 직장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회사에서 잘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잘리고, 교회에서 잘리는 것입니다. 교회를 떠날 때 교회가 잘못된 길을 가서 떠나는 경우에는 ‘교회를 떠난 것’이 되고, 자신이 잘못된 길을 가서 떠나는 경우에는 ‘교회에서 잘린 것’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서 교회를 떠나는 일은 혹시 있어도 교회에서 잘리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가끔 어떤 분은 말합니다. “교회가 사랑도 없이 어떻게 성도를 자릅니까?” 자세히 보면 자르는 것도 최종적으로는 사랑이라는 대의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본문 20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사단에게 내어 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때로 교회의 거룩성과 공동체성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제명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제명이 궁극적으로는 그 영혼을 구하기 위한 행위라고 합니다(고전 5:5).


  어떻게 교회에서 잘리지 않을 수 있을까요? 아무리 부족한 존재도 이 한 가지만 있으면 하나님과 교회에서 잘리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겸손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은 꼭 붙잡아 주십니다.


  우리는 이 땅에 그냥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명 주어서 보낸 존재입니다. 그런 사명감을 가지고 좋은 세상을 찾아다니기보다는 좋은 세상으로 변화시키려고 하고 좋은 사람만 찾아다니기보다는 만나는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변화시키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요셉처럼 가는 곳마다 그곳을 변화시키고, 축복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 되는 큰 꿈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꿈을 가지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복된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샛별교회)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