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헬라파 유대인의 상황
디아스포라 헬라파 유대인은 그들이 처한 상황 속에서 기독교를 접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이제 이 질문에 앞에서 언급한 모든 것을 적용해 볼 시점이다. 나는 신약시대 헬라파 유대인과 19세기의 해방된 유대인 간에는 광범위한 정황적 유사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개혁파 유대교 운동과 유사한 무언가가 헬라파 유대인에게 매력 있게 다가갔을 것이라도 짐작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디아스포라 헬라파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을 수적으로 크게 압도했음을 명심하는 것이다. 존슨(1976)은 팔레스타인에는 1백 만 명의 유대인이 살았고 국외에는 4백만 명이 살았다고 제시한다. 믹스(1983)는 디아스포라 인구를 5-6백만 명으로 본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헬라파 유대인은 주로 도시인이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 국외의 초기 기독교인들도 주로 도시인이었다(믹스 1983). 마지막으로 헬라파 유대인은 빈곤한 비주류 집단이 아니었다. 그들은 수 세기에 걸쳐 경제적인 기회를 찾아 팔레스타인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1세기에는 알렉산드라아와 같은 주요 거점 도시에 대규모의 유대인 지역 사회가 있었고, 이들이 부유하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였다. 유대인은 제국의 주요 거점지역 내에 부유하고 인구도 많은 도시 공동체를 세워 디아스포라의 삶에 적응했다. 그런데 이들은 그 적응 방식으로 인해 예루살렘의 유대교에 대해 매우 주변적인 존재가 되었다. 기원전 3세기부터 이미 이들의 히브리어 구사 능력은 토라를 헬라어로 번역해야 할 정도로 형편 없었다(그린스푼 1989). 번역 과정에서 헬라어뿐 아니라 헬레니즘의 관점도 70인역 성서 속으로 잠입했다. 그 결과 출애굽기 22:28은 “너는 신들을(the gods) 모독하지 말지니라”(한글 개역개정에는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로 되어 있다)로 옮겨졌다. 뢰첼(1985)은 이것이 이교도와의 절충을 모색하는 제스처라고 해석한다. 그 의미가 무엇이든 팔레스타인을 벗어난 유대인들은 헬라어로 쓰고 말하고 생각하고 예배했다.
로마의 유대인 카타콤에서 발견된 새김 문자 가운데 히브리어나 아람어는 2퍼센트 미만이었던 반면, 헬라어는 74%였고 나머지는 라틴어였다(피네건 1992:325-326). 디아스포라의 많은 유대인이 헬라식 이름을 가졌고 헬라 계몽주의의 상당 부분을 문화적 관념 속으로 포용했다. 이것은 마치 해방된 유대인들이 18세기의 계몽주의에 반응한 것과 같은 형국이다. 더욱이 많은 헬라파 유대인은 이교 사상의 여러 요소를 부분적으로 포용했다. 간략히 말하자면, 헬라파 유대인 가운데 다수는 이미 민족적 의미에서는 유대인이 아니고 종교적인 의미에서만 유대인인 상태였다.
그렇다고 그들이 또 헬라인인 것도 아니었다. 유대교를 율법에 내재된 민족적 정체성으로부터 분리해 내는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율법은 1세기나 19세기나 동일하게 유대인을 철저히 구별시켰고, 유대인이 일반 시민의 삶 속으로 온전히 녹아드는 것을 저해했다(헹겔 1975). 양(兩) 시대 모두에서 유대인은 사회적 주변성이라는 불안정하고 불편한 여건에 놓여 있었다. 체리코버가 피력했듯이, 헬라파 유대인은 헬라인들 속에 살며 헬라 문화를 포용했지만 동시에 “영적인 게토에 갇혀 ‘야만인’의 한 부류로 인식”되는 것에 모멸감을 느꼈다. 그는 “유대인이 유대인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헬라의 선택받은 사회” 속으로 완전히 편입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도록 “어떤 절충과 통합”이 시급히 요구됐다고 지적했다.
‘하나님 경외자들’(God-Fearers)을 보면 헬라파 유대인들이 유대교의 민족적 정체성 강요로 인해 겪는 어려움을 엿볼 수 있다. 유대교는 오랜 세월 동안 이방인 ‘길동무’를 끌어들였는데, 그들은 유대인의 도덕적 가르침과 유일신 사상에서 많은 지적(知的) 만족을 얻으면서도 율법을 준수하는 최종 단계까지는 가지 않으려 했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 경외자’라고 칭했다. 율법에 대해 사회적으로나 지적으로 불만이 있던 헬라파 유대인에게 ‘하나님 경외자들’은 매우 매력적인 모델로 다가왔을 공산이 크다. 이것은 완전히 헬라화 된 유대교였으며, 랍비 홀드하임은 아마도 ‘하나님 경외자들’이 추구한 유대교가 변화된 삶의 상황과 여건에 적합한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경외자들’은 운동은 아니었던 반면 기독교는 운동이었다.
사도들이 공의회에서 개종자에게 율법 준수를 강요하지 않기로 결의했을 때, 그들은 민족 정체성으로부터 분리된 하나의 종교를 창출했다. 전승에 의하면 율법과 분리한 후 거둔 첫 결실은 이방인 선교가 급속도로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리의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이 분리 결정으로부터 누가 가장 큰 최초의 유익을 얻었을까? 실제로 어떤 집단이 앞에서 개괄한 사회학적 명제들을 가장 잘 충족시키는 이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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