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 Legion & the Battle on Germania-The Afghan War & the USA
A.D 180년경(180 A.D),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벌목된 삼림지대를 사이에 두고 두 무리의 군대가 마주보고 서 있다. 한 쪽은 털가죽 옷을 입고 금속제 고달이가 달린 나무 창, 도끼(battle axe), 원형 방패, 칼(劍)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한 쪽은 철제 갑옷을 입고 활과 화살, 창, 네모나게 각진 방패, 짧은 검(글라디우스, gladius) 등을 들고 서 있다. 갑옷을 입은 측에서 한 남자가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자 곧 투석탄과 불화살이 적 진영으로 쏟아진다. 그리고 와아∼하는 함성 소리. 뒤이어 일대 접전이 벌어진다. 한참 혼전이 벌어질 무렵, 철제 갑옷으로 무장한 한 무리의 기마 떼가 털가죽 옷을 입은 무리 뒤에서 달려나온다. 15분 후, 전투는 끝났고, 전장은 폐허로 변했다. 다만, 산 자와 죽은 자의 구별이 있을 뿐이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GLADIATOR)' 中에서》
영화 '글래디에이터(gladiator: 고대 로마의 검투사)'에서 로마 제국의 장군 퀸투스 막시무스(Quintus Maximus)가 쓴 전술은, 군사학적 견지에서 보면 좀 떨어지는 작전이라고 평가된다. 그 이유로는, 숲에서 기병을 운용하는 것은 (그것도 철제 갑옷으로 중무장한…) 마치 아마존이나 베트남의 정글에서 탱크를 움직이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의 배경이 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121 A.D∼180 A.D)치세 때에는 게르만 족과의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였고 결국 로마 제국의 영토는 라인江을 기점으로 멈추게 되는 것이다.('글래디에이터'에서 늙은 황제가 집필하던 책이 명상록(瞑想錄)이다.)
http://www.dreamworksfansite.com/에서 따옴.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한 장면

로마의 야심적인 정치가·군인이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저서인 『갈리아 戰記(COMMENTARII DE BELLO GALLICO)』나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GERMANIA)』에 보면 숲에서도 기병대를 운용한 기록이 보이고 있으며 카이사르의 경우 그의 수하 부대인 제 10군단에서 보병을 기병으로 차출해 쓸 정도였다.
결국 '글래디에이터'는 로마인들의 기록을 활용해 시나리오를 작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번 칼럼에서 칼럼지기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 시기와 그 이전 시기를 중심으로 로마군이 영토를 확장하게 된 경위와 확장이 멈추게 된 과정을 고고학적 증거와 함께 알아보려고 한다.
고대 로마 초대 황제로 평가받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엄한 者'라는 뜻)는 B.C 63년∼A.D 14년까지의 시기에 활동하였고 악티움 해전을 계기로 로마의 실질적인 제 1인자가 되었다.
악티움 해전은 옥타비아누스(젊은 시절의 아우구스투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이끄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해군과 맞서 싸워 이긴, 카이사르 사후 로마 내전을 종결시킨 전투였다.
http://college.hmco.com/에서 따옴.
고대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입상.

공화정 시기의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여타 다른 정치체들처럼 소규모 도시 국가였다. 그리고 오늘날처럼 육상 교통로가 확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찍부터 교역(交易)과 상권(商權)에 눈을 뜰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라는 말이 있듯이 (그렇다고 하루 저녁에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 후대에 건설될 광대한 로마제국은 주변의 다른 공동체들을 정복하면서 지중해 주변 지역을 운영할 능력을 차근차근 습득해 나갔던 것이었다.
남부 지중해 일대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아주 살기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이탈리아 로마의 경우만 하더라도 돌투성이 들판과 돌산 등이 대부분이었고 농사를 짓기에 풍요로운 지역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공화정이었던 로마는 더욱 세력 범위를 넓히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때였다.
제 1, 2차 포에니 전쟁을 겪으면서 로마는 지중해 곡창 지대이며 교두보인 시칠리아를 장악하기 시작했으며 제3차 포에니 전쟁 후에는 명실상부한 지중해圈의 패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한편 게르만족은 오늘날 유럽 사회의 근간을 이룬 종족으로서 그 자체가 하나의 민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주로 스칸디나비아 반도나 발트해 연안 지역에 분포하였고 그리스나 로마인 같은 인도-유럽 어족에 속하였다. 게르만족이 남하한 시기는 대략 B.C 2C 경으로 그 이전에도 이동은 있었지만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못하다. 이들은 기원 전후를 기점으로 라인강과 도나우강 연안까지 진출하였다.
대다수 수렵-목축 민족이 그렇듯이 이들도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다. 중국 만리장성 이북의 흉노가 그렇듯이 이들도 농경민족이던 로마에 의해 기록으로 남게되고 전해지게 되었다.
기록이란 것이 대개 기록자의 사관(史觀)으로 좌우되는 것처럼 게르만족의 습성이나 생활 풍속 등도 로마인들의 관점에 따라 기술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와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이다. 대체적으로 두 저서들은 게르만족을 '문명화되지 않은 야만인(uncivilized barbarian)'이라는 관점에 충실하게 기록되었다.
http://www.deutsche-schutzgebiete.de/에서 따옴.
게르마니아 여신.

기원 전후의 게르만 사회는 농경과 목축, 사냥과 어로 활동을 하였고 그들의 종교는 자연 숭배의 다신교로 북유럽 신화를 떠올리면 될 듯하다. 이들은 숲을 숭배하였고 오늘날 크리스마스 트리의 기원도 이들의 축제에서 장식을 걸어놓았던 신목(神木)에서 찾고 있다. 게르만족은 흰 피부에 회청색 눈과 황적색(흔히 금발이라고 칭하는)의 두발을 갖고 있었으며 키가 크고 강인했으며 활동적이고 용감하였다. 그리고 원시 공동체 사회가 그렇듯이 신의(信義)를 중시하였다.
게르만족 사회에 철기가 도입되면서 이들도 계급분화를 겪게 되는데 상대적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고 정치적 영향력이 있는 가문에서 왕이나 지휘관 등이 지배층으로 나오게 되었다. 사회 계급은 수장, 귀족, 자유민, 노예 등으로 구분되었고 자유민이 다수였으며 자유민 중에 귀족층이 형성되었다.
로마 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그 자체로 본다면 카이사르(G. Julius Caesar)와 같은 '천재적 지략'을 가진 인물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로마 제국 1,000년(동로마제국 포함)의 토대를 다진 준재(俊才)라고 평가할 만한 인물이라고 할 수는 있다.
http://antwrp.gsfc.nasa.gov/에서 따옴.
율리우스 카이사르 은화.

일찌기 카이사르가 경계선을 그은 라인강(남에서 북으로 흘러 북해로 빠짐)과 도나우강(Donau=Danube; 다뉴브강)을 조금이라도 더 확장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결국은 '카이사르 라인(Caesar's Line)'을 벗어나지는 못하였던 아우구스투스였다. 아우구스투스가 게르만족과의 경계를 라인강에서 엘베강으로 동쪽으로 옮기려던 시기는 A.D 4년이었다
A.D 4년의 전쟁으로, 로마는 엘베강을 제외한 게르마니아 지역의 중요 하천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티베리우스의 활약으로 엘베 강에 도착하여 게르마니아 정복을 완수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 후 뜻하지 않은 반란과 가정 문제가 겹쳤고 이로 인해 對게르마니아 전쟁은 소강 상태로 이어졌다. A.D 9년 반란 진압 후 로마는 평화를 되찾은 듯 했지만 며칠 후 아우구스투스는 비보를 접하게 된다.
그 소식은 오스나브뤼크 북쪽에 있는 토이토부르거 숲에서 게르마니아 사령관 바루스가 게르마니아 인 아르미니우스(Arminius, 독일어로 헤르만Hermann=戰士라는 뜻)가 이끄는 게르만 게릴라들에게 로마 3개 군단 2만 명, 보조부대 6개 대대, 기병 3개 중대 등 3만 5천 명이 몰살당했다는 것이었다.
이 A.D 9년경의 사건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영토 확장 정책은 사실상 종결되었고 로마 제국은 라인강과 도나우 강을 기점으로 국경을 긋게 된다. 어쩌면 게르마니아 인들에게는 문명의 혜택을 져버리게 되는 것이었고 한편으로는 고유의 생활 방식을 고수하게 되는 것이기도 했다.
http://www.hermannsdenkmal.de/에서 따옴.
아르미니우스의 조각상

시오노 나나미에 따르면 게르만 연합군을 이끈 아르미니우스는 영리하기는 했지만 '종합적 사고' 를 행하지는 못한 리더십이 결여된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 점이 로마 제국에 있어서는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사건의 발단은 다음과 같다. 게르마니아 총사령관 바루스는 문명화된 지역을 다스리는 데는 능했지만 비문명 지역을 맡기에는 역량이 부족했다고나 할까? 우선 그 지역을 잘 아는 아르미니우스를 등용하여 부사령관으로 앉힌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를 너무 신임하였다. 그래서 아르미니우스를 신중히 대해야 한다는 참모들의 의견도 배재하였던 것이다.
아르미니우스(B.C 16년∼A.D 19년)는 게르만의 한 부족인 케루스키 족장 아들로 청년 시절 로마 보조군에 복무하였고 로마 시민권과 기사(騎士; equitus) 계급을 얻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속주 유력자에게 기사 계급을 주고 승격시키는데 보수적이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기사 계급을 얻었다는 것은 그가 상당히 탁월한 기량을 선보였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http://www.acs.ucalgary.ca/에서 따옴.
고대 로마 제국의 전성기 때의 경계선.

A.D 9년 눈이 내릴 무렵 게르마니아 중부 지방을 정찰하고 돌아가던 바루스와 그의 군대는 라인강 연안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티족이 반란의 움직임을 보인다는 아르미니우스의 말을 그대로 믿은 바루스는 울창한 삼림(森林) 지대로 향했다.
2천년 전 게르마니아 지역은 빽빽한 숲 지대였다. 낮에도 어두컴컴한 숲길이 이어졌고 지리를 잘 아는 이가 아니고서는 허둥대기 일쑤였다. 아르미니우스는 게르만족 연합 게릴라 군을 데리고 로마 군을 추격했고 로마 군은 "보이지 않는 적(invisible enemy)"에게 공포감을 느꼈을 것이다. 결국 바루스와 그의 군대는 매복해 있던 적들에게 머리와 사지가 짤리고 달아나는 죽음을 맛보아야 했다. 이것이 후세에 가서는 로마의 미개척지로 평가받은 게르마니아의 시초였다.
아르미니우스의 사건 후 6년 만에 로마 군은 그 자취를 찾았고 제단을 세우고 동지들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오늘날까지도 토이토부르거 숲이 위치해 있던 장소가 어디인지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아르미니우스는 그 후 엘베 강가에서 동족의 내분으로 살해되었다.)
http://www.donga.com/에서 따옴.
부시 취임 후 첫 눈물.

21C를 구가하고 있는 오늘 날 현대의 초강대국이자 '로마 제국'으로 평가받고 있는 미국. 그 美國을 연작『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이렇게 평가했다.
"[앞 생략] 대담하게 비교하면, 로마 제국은 역사상 다른 어느 제국보다도 오늘날의 미국과 비슷했다.[뒤 생략]"
《시오노 나나미 지음·김석희 옮김, 『로마인 이야기 6-팍스 로마나』, p.279, 한길사, 1997》
이런 미국이 지금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과 알 카에다를 상대로 미군 특수부대를 보내어 전쟁을 치르고 있다. 힘의 과시를 서슴지 않는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악의 축(the Axis of Evil) 발언을 서슴없이 하며 對테러전을 촉구하고 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을 칼럼지기는 다시 한번 시오노 나나미의 표현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문장은 사용하는 낱말의 선택으로 결정된다고 말한 것은 카이사르지만, 전혀 문장가가 아니었던 아우구스투스도 '사용하는 낱말의 선택'은 알고 있었다. [중략] 실언은 정치가에게는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 어리석은 짓이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책, p.318》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사람, 나쁜 쪽으로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미국의 국익을 위해 좋은 쪽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우방국과의 협력을 굳건히 하고 미국에 비우호적인 나라들과도 공조하는 체제를 구축하려고 하였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조지 W 부시의 父)은 나쁜 쪽으로 생각하여 미국에 비우호적인 국가들을 힘으로 다스리는 것에 힘을 쏟았다. 클린턴은 고대 로마 제국으로 치면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해당하고 조지 부시는 아우구스투스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든 나쁜 쪽으로 생각하든 至高至善은 至高至惡과 통하기 때문에 결국은 같은 결과를 얻게 된다.
http://images.libri.de/에서 따옴.
독일 슈피겔지(Die Bush Krieger,2002/8)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참모들.

그렇다면 조지 W 부시 현 미국 대통령은 어떠할까? 작금의 상황을 놓고 볼 때 아시아는 그렇다 치더라도 유럽까지 철강 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는 '생각이 없는'사람이다. 칼럼지기, 아는 선배인 G라는 사람에게 로마 제국 황제 중 조지 W 부시의 모델이 누구에 해당하냐고 자문을 구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G는 한 2분 정도 생각하더니 "아! 도저히 그런 사람은 찾을 수 없다."며 난색을 표명하였다. 그래서 칼럼지기는 그 모델을 영화 '못 말리는 람보'(원제; Hot Shot2)에서 찾을 수 있었다. 칼럼지기는 그를 '못 말리는 대통령'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미국이 9·11 사태의 주범으로 몰아간 오사마 빈 라덴을 미군 당국은 잡을 생각을 안 하고 있다. 칼럼지기의 견해로는 라덴이나 탈레반의 오마르는 아마도 이미 파미르나 인도를 거쳐 빠져나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리고 사이푸르 라흐만 만수르라는 젊은 장군이 차량 폭탄 테러로 숨진 아버지 나스룰라 만수르의 뒤를 이어 게릴라 전을 펼치고 있다.《동아일보, 2002. 3. 11. (月)》 칼럼지기는 그를 '이슬람의 한니발' 이라 명명하고자 한다.
미국이 2001년 9월 11일 이후 옳다구나 하고 아프가니스탄을 친 진짜 이유는 바로 원유 수송로 확보를 위한 것일 가능성이 매우 짙다. 007 언리미티드(원제; The World is not Enough) 라는 영화를 보면 아프가니스탄은 흑해를 지나는 원유 수송로(러시아)와 인도로 가는 석유 회사들의 원유 송유관 루트의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즉, 아프가니스탄은 그 자체로는 별 매력이 없지만 넓은 시각에서 본다면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http://www.donga.com/에서 따옴.
미국 국방부 장관 럼스펠드.

아까 얘기한 세 유형의 사람 중 제일 위험한 유형은 생각이 없는데 막강한 권한을 가진 경우이다. 영화 '글래디에이터'는 그 자체로는 허구이지만 그것은 오히려 현재 미국에 대한 경고라고 볼 수도 있다. 점점 강해져 가는 대통령의 권한(權限), 그 대통령을 견제 못하는 의회의 기능 등을 로마 제국으로 빗대어 풍자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로마 제국은 결국 라인강과 도나우강을 경계로 게르마니아를 점령하지 못하였다. 아프간을 포함한 서남 아시아(중동)도 또한 '아시아의 게르마니아' 로 남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21C의 술탄 살라딘이 등장하는 날, 미국과 아프가니스탄은 아마도 또 한번의 변혁을 겪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이란·이라크 등 불량 국가들(rogue states)이 대량 파괴 무기를 개발하고 테러를 비호하면서 이들의 우방인 테러국가들과 함께 세계평화를 위협하며 '악의 축(axis of evil)’을 이루고 있다. 미국은 이들의 위협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 중 일부 정권은 9·11 테러 이후 조용히 있지만 우리는 그들의 본질을 알고 있다. 특히 북한은 주민들이 굶주리는 데도 미사일과 대량 파괴 무기로 무장하고 있는 정권이다. 테러와의 전쟁은 이제 시작일 뿐,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정권이 가장 파괴적인 무기로 우리를 위협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국가안보를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다할 것이다. 우리는 신중을 기하겠지만 시간이 없다. 나는 위험이 증폭될 때까지 기다리거나 위기가 가까이 오는 것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조지 W 부시, 미국 第 43代 대통령. 2002년 1월 29일 미국 의회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발표한 연두교서》
【참고문헌】
1. 시오노 나나미 지음·김석희 옮김,『로마인 이야기』3·6, 한길사, 1996·1997. 2. 카이사르/朴光淳 譯, 『 갈리아 戰記-초역본』, 범우사, 1991. 3. 이광숙 편역.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9. 4. 『NATIONAL GEOGRAPHIC』-「CENTRAL ASIA UNVEILED」,February,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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