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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달라 마리아 영화 - 예수보다 ‘온전한’ 마리아? 주객이 전도된 영화

Joyfule 2018. 4. 11. 11:20



막달라 마리아 영화 -

예수보다 ‘온전한’ 마리아? 주객이 전도된 영화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10506

"은혜보다 행위?’… 불편했던 영화 <막달라 마리아>

김신의 기자 입력 : 2018.03.19 18:38


[리뷰] 외경(外經) ‘마리아 복음서’ 참고한 영화(上)

※본 리뷰에는 영화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편집자 주

유대 사회에서 여성은 증인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성경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했다는 것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전승한다.



사실 기자는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해 그리스도의 십자가 자리에 함께 있던 많은 여성들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영화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감독 가스 데이비스)은 이때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는다. 거기에 제13회 서울국제사랑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됐던 영화 ‘미라클 프롬 헤븐’의 제작진이 참여했다는 소식이 있었기에, 영화에 대한 적잖은 기대가 있었다. 그리고 또 그만큼 실망이 컸다.


막달라 마리아
▲영화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 스틸 이미지. 막달라 마리아(루니 마라)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


    

3월 28일 개봉 예정인 영화 ‘막달라 마리아’는 “수 세기 동안 ‘죄의 여인’으로 불렸던 그녀의 진짜 이야기”, “예수의 부활을 가장 처음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가 전하는 진정한 구원의 의미”라는 문구로 홍보하고 있다.

감독 가스 데이비스는 “16세기 그레고리우스 교황이 처음으로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다는 이야기를 했다”며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이자 죄의 여인이라고 불린 점에 대해 그 배후를 설명했고, 프로듀서 에밀 셔만은 “막달라 마리아라는 인물을 다시금 올라서게 해주고 싶었다”고 영화의 의도를 말했다.

먼저 이것이 큰 ‘옥의 티’인 것이 신약성경은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로 언급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가스 데이비스 감독의 말대로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오해한 것일 뿐 신약성경은 막달라 마리아를 ‘일곱 귀신을 쫓아낸 여성’(눅8:2, 막16:9),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물질로 섬겼던 여성'(눅8:1-3)으로 그린다.

이러한 사실에도, 제작진은 영화를 제작할 때 정경(正經)이 아닌 외경(外經), ‘마리아 복음서(Gospel of Mary)’라는 영지주의(Gnosticism) 문헌을 자료로 삼았다.

마리아 복음서
▲Gospel of Mary, P. Oxyrhynchus L 3525.

이 ‘마리아 복음서’를 옹호하는 입장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여자였기 때문에 성경에서 지우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미 성경은 십자가의 자리를 끝까지 지킨 것이 막달라 마리아를 포함해 대부분이 여성들이었다고 가감 없이 증거하고 있다. 성경에서 제외된 것은 정경의 조건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특히 ‘마리아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에 “환상을 통해(ἐν ὁράματι) 만난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들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οὓς ἡμεῖς οὐκ ἠκούσαμεν) 특별한 가르침을 은밀히(λάθρα) 받았다”는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순되며, 마리아가 교만했거나 영적으로 무지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영화는 이 부분을 인용해 베드로의 대사로 사용한다.

어찌됐든 영화는 ‘마리아 복음서’를 바탕으로 하면서 “진짜 이야기”라는 주장을 내세웠기 때문에 이 점을 주의해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는 ‘죄’와 ‘구원’ 등의 해석에 있어서 위험한 요소를 갖는다.

영화가 부활절을 앞둔 고난주간에 개봉하는 만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2:21)”라고 말했던 바울을, 의도적으로라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죄’ 보다 ‘행위’

영화는 막달라 마리아(루니 마라)가 정혼을 거부하는 것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정혼을 거부한 마리아는 가족들에게서 수치로 여겨졌다. 이에 더해 영화는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받으며 자유롭게 기도할 수 없던 당시 여성의 상황을 상세히 반영하기 위해 노력한다.

결국 가족들은 마리아에게 ‘네 속에 불길한 것이 들어있다’며 물에 빠뜨리면서, 일종의 귀신 쫓는 의식을 치르기까지 한다. 마리아는 발버둥치지만 수 차례 물에 빠지다 기절했고, 그렇게 마리아는 가족들에게 마음 문을 닫고 대화조차 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 예수(호아킨 파닉스)가 마리아를 찾았다. 예수는 마리아에게 “듣자니 악령에 시달린다면서? (그러나) 넌 악령에 씌인 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영화 막달라 마리아
▲영화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 스틸 이미지. 예수(호아킨 파닉스).

이때 “넌 악령에 씌인 게 아니”라는 대사는 ‘네가 오해를 받았구나’, ‘네 죄가 사해졌다’라는 뉘앙스보다는 ‘넌 원래 죄가 없다’에 더 가깝다. 즉 영화가 말하는 ‘죄’는 성경이 말하는 ‘죄’보다 사회적 상황에 의한 ‘죄’에 가깝다.

동시에 영화는 선행과 용서 등 ‘행위’에 초점을 둔다. 이 점은 영화 후반부 사마리아에서의 장면을 예시로 들겠다. 이 부분은 마리아를 내내 못마땅히 여기던 베드로(치웨텔 에지오포)가 거의 유일하게 마리아를 증거한 장면이기도 하다.

막달라 마리아는 로마군의 횡포에 의해 죽어가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물을 먹이며 공궤를 한다. 이런 상황에 한 여인이 임종을 앞두고 있었고, 막달라 마리아는 그 여인에게 걱정하지 말라며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안다”고 ‘당신이 베푼 사랑’과 ‘선행’을 말한다. 교묘하게 ‘구원’에 ‘행위’라는 조건을 추가해버렸다. 이 장면을 보며 누가복음 18장의 선행과 율법을 지킨 바리새인과 죄를 고백하며 통회한 세리의 기도가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갈 것이 영화와 달리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말하는 가장 중요한 초점은 당시의 시대상황이나 남녀차별, 행위(선행)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열두사도의 대열에 들어가지 못했던 바울 역시 이 점에 있어서 철저하다. 그는 죄의 결과는 사형(롬1:32)인 것과, 의인은 하나도 없는(롬3:10) 죄악의 현실을 고발한다. 그리고 바울은 수많은 구절에서 믿음과 은혜를 말하며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한다.

계속해서 영화 ‘막달라 마리아’는 남성들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던 여성들이 세례를 받고 예수를 따르는 등의 상황이 펼쳐진다. “남편과 아버지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이 부딪힐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며 옳은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어째서인지 영화에서는 ‘믿음’이란 단어가 쉽사리 나오질 않는다.

막달라 마리아는 서로 다투고 있는 열두 제자에게 “고뇌와 대립이 아니라 사랑과 배려, 용서”를 말하며 “천국”과 “부활”을 얘기하지만 십자가에 대한 이해가 얕은 느낌이다. ‘은혜’에 대해서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계속>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10811


김신의 기자 입력 : 2018.03.28 15:49


[리뷰] 외경(外經) 참고한 ‘막달라 마리아’(下)

※본 리뷰에는 영화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편집자 주

성경은 부활 이후의 예수를 만나기 전, 부족한 제자들의 모습을 숨기지 않고 고발한다. 예수의 말에 동문서답 하거나, 예수를 버리고 도망치거나(마26:56, 막14:50),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하는(마26:69~75, 막14:66~72, 눅22:54~62, 요18:25~27) 등의 모습 말이다. 그런데 영화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감독 가스 데이비스)의 제자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과 어딘가 다르다.



베드로
▲베드로(치웨텔 에지오포). ⓒ영화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 스틸 이미지

폭력과 봉기로 하나님 나라 이루려는 제자들

“랍비여 지금 시작해야 합니다!”

영화 속 제자들은 “예수님이 유월절에 뭘 할 것”이라며 “그러니 사람을 더 모아야 한다”고 말한다. 심지어 예수(호아킨 파닉스)의 부활 이후에도 베드로(치웨텔 에지오포)는 마리아(루니 마라)에게 “다른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지 않은 비밀을 너(마리아)에게만 가르쳐주었냐”며 뭔가 큰 착각에 빠져있다.

    

한 마디로 영화 속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제자이기보다 봉기를 일으켜서 세상을 바꾸려는 세력에 가깝다. 특히 베드로는 “당신(예수)의 기적을 보면 다 봉기할 것”이라는 대사를 명확히 던진다.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들어간 모든 제자들은 “이제 죽은 자가 부활할 거다”, “때가 왔다”고 소리지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시위 분위기를 계속해서 고조시킨다.

반면 마리아는 “이해가 안 되도 예수를 따라야 한다”며 제자들과 대립한다. 그런 마리아에게 제자들은 “가나로 가든가 강제로라도 (예수를) 다른 데로 데리고 가야 된다”고 말한다. 이 같이 마리아와 제자들이 대립하는 구도는 예수가 부활한 이후, 영화가 끝나기까지 지속된다.

물론 성경에도 실제로 반란과 봉기, 정치적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열심당’이었던 제자가 있다. 셀롯이라는 시몬(눅6:15)의 셀롯은 공표된 열심당의 명칭이다. 열심당은 폭력항쟁으로 맞설 것을 주장한 유대의 종교적 민족주의 정치 운동으로 젤롯(zealot)당과 시카리당이라고도 불린다.

막달라 마리아
▲예수(호아킨 파닉스)와 유다(타하르 라힘). ⓒ영화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 스틸 컷

신약학자들에 의해 열심당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가롯 유다다. 영화 속 유다(타하르 라힘)는 성경과는 다른 면모가 부각된다. 그는 여자라는 이유로 막달라 마리아를 차별하는 제자들과는 좀 다르다. 유다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말을 건네며,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은 슬픔을 전하는 등 ‘호감형 캐릭터’로 등장한다.

물론 유다 역시 다른 제자들처럼 잘못된 믿음이 얼마나 강한지 “이제 먼저 죽은 가족과 만날 수 있다”, “미루고 두려워만 하셨지, 오늘은 그가 시작할 거야. 정의가 부활할 거”라며 예수가 더 이상 미루지 않고 빨리 봉기를 일으키도록 예수를 팔아버리기까지 한다.

여기서 요한복음 12장에 “도적”인 유다와 요한복음 13장 최후의 만찬의 자리에서 유다가 조각을 받고 나가 곧 밤이 된 장면은 영화에서 아예 사라져버렸다. 대신 최후의 만찬 자리에 마리아가 예수의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차지한다. 소설 ‘다빈치코드’를 비롯해 영지주의 문헌이 다시 한 번 떠오르는 순간이다.

물론 예수를 판 이후 유다가 생각한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를 본 유다는 마리아에게 “내 가족들에게 간다”며 자살을 하러 간다. 마리아는 유다의 가족이 이미 죽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살하려는 유다를 말리지 않는다. 이 장면도 기자에겐 다소 충격이었다.

나약한 예수와 온전한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영화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 메인 포스터. 포스터에서조차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은 상반된다.

성경에서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참 인간(vere Homo) 참 하나님(vere Deus)이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래도 되기를 원하나이다”라던 겟세마네의 기도를 비롯해 그는 우리와 같이 고통을 느낌에도, 믿음을 잃지 않는 본을 보이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런데 영화 속 예수의 모습은 어딘지 어색하다. 이런 모습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장면 직후 영화 속 예수는 “뚜렷이 보였던 것이 사라져 간다. 생명이 사라져가고 있다”며 무언가 힘들어 하며 흐느낀다. 이런 예수에게 마리아는 “당신도 여기 있고 나도 여기 있다”, “내가 같이 가겠다”며 예수를 위로한다.

겟세마네 기도의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가장 결정적인 십자가 자리를 앞두고 예수가 하나님이 아닌 인간 마리아에게 인간적 위로를 받기 시작한 것. 예수가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는 장면은 없는 대신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발을 씻는 장면이 나온다. 심지어 예수가 마리아의 무릎에 머리를 베는 장면도 펼쳐진다.

덧붙여 마리아가 던진 “그(예수)는 뭔가 두려워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다음에 무얼 요구하실지”라는 대사 또한 감독이 성경과 하나님, 삼위일체에 대한 오해를 가진 것이 아닌지 의심되는 부분이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는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도 등장한다. 내내 심각한 표정을 이어왔던 예수는 이때 잠시 웃는 모습을 보인다. 성모 마리아는 “아들이 어밀 찾는데 이유가 있냐”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보다 어머니인 마리아의 아들 예수에 초점을 둔다.

이에 더해 성모 마리아는 “예수가 어릴 때 친구들이 귀신에 들렸다고 놀렸는데, 예수는 맨날 울었다”며 “나에겐 온전한 아들이었던 적이 없다”고 말한다. 거기다 “너(막달라 마리아)도 나처럼 그를 잃을 준비를 해야 할 것”이라며 이미 예수의 죽음을 알고 예비하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
▲기근으로 어두운 상황에 처한 사마리아에서 어두운 집 사이 빛과 함께 들어오는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은 마치 이 영화의 목적을 말해주는 듯 하다. ⓒ영화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 스틸컷

예수를 이렇게 그린 반면, 예수를 따르기 시작한 막달라 마리아는 어떠한 순간에도 무너지지 않는다. 종합적으로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죄인’이기보다 시대적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아 ‘누명을 쓴 의인’, 그리고 ‘사도 중의 사도’이자 ‘예수가 의지했던 자’다. 이에 더해 부활한 예수는 마리아에게 “넌 이런 순간에도 두려워하지 않는구나”라고 증거한다. 십자가를 앞두고 힘들어 했던 예수와는 참으로 상반된 모습이다. 주객이 전도됐다.

마지막으로 영화는 “서기 591년 그레고리 교황이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다고 주장한 후 그 오해가 지금까지 이어져왔으나 2016년 교황청은 그녀를 사도 중의 사도로, 부활한 예수의 첫 증인으로 공식 인정했다”라는 글로 끝을 맺는다. 영화의 말대로라면 여성 사제를 인정하지 않는 교황청에 여러 의문도 생기나, 사실과 왜곡 여부를 떠나 적어도 영화 속 ‘막달라 마리아’를 높이는 목적만큼은 성공한 듯 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