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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성균 수필 연재 - 故鄕雪 

Joyfule 2012. 3. 15. 09:23

 

    

 

 

목성균 수필 연재 - 故鄕雪



오랜만에 눈 같은 눈이 내린다. 눈 같은 눈이란 故鄕雪이다. 안타까운 세월 저쪽에서부터 뽀얗게 눈발이 서서 내 마음을 가득 채우며 내리는 눈을 말하는 것이다. 발코니 너머로 아파트단지에 내리는 故鄕雪을 본다.

횃불에 ‘치-직, 치-직---’ 소릴 내며 떨어져 녹던 눈송이. 동네를 돌면서 새로 해 이은 지붕 추녀의 이엉 마름 밑을 뒤져서 참새를 움켜 내던 기쁨, 손에 잡힌 따뜻한 생명의 체온과 부드러운 새털의 감촉, 손아귀를 벗어나려는 조그만 생명의 꿈틀거림, 어느 해는 그 따뜻하고 보드라운 겨울 새털의 감촉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볼에 대보고 놓아주었다. 어두운 밤하늘 눈발 속으로 포르르 날아가던 참새.
그 때 죽마고우들은 잠들지 못하고 밤 깊도록 고샅을 돌았다. 고샅을 돌면 들을 수 있던 그 시절의 소리들과 보지 않아도 본 거나 진배없던 모습들-. 현상액 속에서 살아나는 포지티브처럼 점점 선명해져서 아쉽고 그리운 소리의 모습을 드러낸다.

누구네 집 안방에서는 심청전 읽는 젊은 새댁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 방안에는 동네 시조모님들이 다 모여 앉아 있고 방 가운데는 갓 시집 온 목청 좋은 새댁들이 불려 와서 교대로 이야기책을 읽는 것이다. 새댁들은 그 밤 잘못하면 새워야 한다. 집에서 새신랑이 잠 못 이루고 기다릴 생각에 새댁들은 안달이 나지만 그 점을 고려할 시조모님들이 아니다. 바야흐로 심청이는 인당수에 몸을 던지고 동네 시조모님들은 한숨과 눈물이 낭자하다. 새댁들의 안타까운 밤은 그렇게 속절없이 깊어가고 눈은 폭폭 쌓여갔다.
어느 고샅에서는 배고파 칭얼대는 어린 것 보채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부스럭거리면서 돌아눕는 풍만한 어미의 무거운 몸짓소리, 박통 같이 불은 젖을 물고 옹아리치는 간난쟁이 소리가 눈송이처럼 새록새록 떨어진다.
어느 고샅에서는 바깥사랑의 자지러지는 해소 기침 소리가 들렸다. 응달진 저문 산기슭의 사초를 한 번 했으면 싶은 조촐한 봉분 한 기가 문득 떠오르는 해소기침 소리가---.
그리운 소리 눈오는 밤 고향의 고샅을 백 번 돌아도 들을 수 없는 소리 목이 메어 온다.

지금은 그 사랑도 안 쓰지만, 내가 고향에서 솔가를 하기직전 까지는 동네에서 사랑방을 쓰는 집은 영진네 밖에 없다.
친구들은 가끔 이 방에 모여 구판장에서 막소주를 사다 마셔 가며 ‘점 백 고 스톱’이란 화투 놀이를 했었다. 사랑을 쓰는 영진이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점 백 고 스톱’도 끗발이 나지 않으면 하루 저녁에 일이 만원 돈을 잃기도 하지만 하루 저녁을 재미있게 논 값으로는 과히 비싼 건 아니다. 죽마고우가 어릴 때처럼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아옹다옹하는 재미는 충분히 일이 만원 어치는 된다.
“이놈아, 너 독 썼어 네가 풍 띠를 내서 영진 이가 청단을 했잖아.”
“그럼 어떡해? 매조 열을 주면 기억 이가 5점 짜리 고도리를 하는데, 3점 짜리 청단을 줘야지-.”
“그래도 건네주어야 하는 거여, 바로 주면 ‘고 스톱’ 법칙에 안 맞잖아!”
“건네주긴 5점하고 3점하고 돈이 200원 차인데 약한걸 줘야지, 무슨 소리야.”
잘못하면 판이 깨질 수도 있다.
“더러워서 나 안 해. 내 손에 든 거 내 맘대로 내는데 네 놈이 왜 곶감 놓아라 대추 놓아라 지랄이여-.”
얼굴이 벌개 가지고 누가 일어나면 판은 깨지는데, 그 모습이 보기 좋은 것은 아직도 훼손되지 않은 순박성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래 알았어, 그만둬. ‘고 스톱’의 이치가 그렇다 이거지. ‘고 스톱’ 법이 어디 국회에서 정하는 거여, 우리가 고치면 될 거 아녀-. 자, 앉아. 앉아.”
“그려 우리가 고치는 법. 아 무렵 국회에 고치는 법만 못할라구 앉아 앉아”
그러면 또 주저앉는다. 나이는 육십대를 넘긴 주제에 애들처럼 씩씩거리고 싸운다.

얼마나 단순한 사람들인가! 이제 좀 간교하고, 의젓하게 팔색조처럼 제 모습을 위장할 줄도 알 때가 되었건만 늘 솔직할 줄밖에 모른다. 그들은 평생 흙만 주무르며 살았다. 수백 억을 정치자금이라고 거둬서 이놈이 꿀꺽 한 입, 저놈이 꿀꺽 한 입하는 세상이 있는 줄은 알지도 못하고, 누가 알려줘도 믿지도 않을 녀석들이었다. 아느니 뉘집 제사는 언제고, 뉘집 어른 생일은 어제라는 걸 소상히 알뿐이다.
특히 사랑의 좌장은 그 걸 잘 알아야 좌장이다. 밤에 부시시 일어나서 불 밝혀진 집 앞에 가서 '첫 닭 울리겠어요' 한 마디 하고 오면 푸짐한 음복술이 따라온다. 이 정도만 알면 고향설 분분한 겨울 사랑간의 좌장 노릇할 자격이 있다. 구린내 나는 국회의원 200명이 이런 사랑간의 좌장 한 사람의 사회적 성의를 당할 수 있을까. 어림도 없다.

한참 ‘고 스톱’ 법칙에 어긋났느니 안 났느니 하고 옥신각신할 때 길가로 난 방문 앞에서 “아버님 -, 아버님 -.” 하는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문을 열고 보니, 20대 젊은 여자가 쟁반에 냄비와 소주병을 놓아서 들고 왔다. 그녀 머리 위로 탐스러운 눈송이가 나려 앉고 있었다.
충주에 나가 사는 남수의 둘째 아들 희택이 댁이었다. 마침 주말이라 집에 다니러 왔다가 시아버지가 놀고 있는 사랑간에 모르는 척 있을 수가 없어서 밤참을 해 온 모양이다.
“아버님, 찌개 좀 끓여 왔어요.”
나는 신세대 새댁의 마음씨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물론 옛날에도 명절 밑이나 뉘 집 제사 때는 두부찌개에 막걸리를 가져오는 일이 있었지만, 어둑하던 옛날 이야기일 뿐 지금은 그런 인심은 고향동네에서도 사라진지 오래다. 찌개 한 냄비 소주 몇 병 따지면 하찮은 거다. 그러나 서로 삶을 옹호(擁護)하면서, 서로를 배려하면서 살던 삶이 재편성되는 지금, 그 것은 마지막 미덕일지 모른다.

경제구조가 바뀌면 사회구조도 변하고 따라서 삶의 가치도 변한다. 다랑논과 비알밭을 부치며 백 이십여 호가 넘게 모여 살던 고향은 이제 육십여 호에 불과하다. 따라서 다랑논과 비알밭은 부치지 않는다. 이제는 서로 삶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 삶을 존중한다. 옹호는 뜨겁고 구린내 나는 입김을 푹푹 내뿜으며 서로를 꼭 끌어안는 것인데 비해서 존중하는 것은 원소(元素)의 유기적인 결합과 같은 무미한 대인(對人)질서일 뿐이다. 당연히 끈끈한 삶의 유대감, 즉 인심이 예전 같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래, 거기 놓고 가거라.”
“네 아버님, 식기 전에 드세요.”
희택이 댁은 조용히 웃고 돌아갔다.
나는 희택이 댁이 다녀간 다음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고향설(故鄕雪)은 한결 같이 내린다. 적설(積雪) 위에 방금 찍고 간 가지런한 발자국이 선연(嬋娟)하다. 희택이 댁 발자국이다. 새댁의 맨발 발자국 같은 사랑스러운 발자국-.

아파트 단지 안 가로등 불빛 밑으로 나리는 눈발을 보면서 고향설을 그려보았다.
고향은 사라져 가도 나리는 눈발 속에 내 고향이 남아 있다는 것이 나의 재산인데 누구에게 물려 줄 수 없는 무형의 재산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