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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성균 수필 연재 - 봄비와 햇살 속으로 4 

Joyfule 2012. 3. 13. 08:58

 

    

 

 

목성균 수필 연재 - 봄비와 햇살 속으로 4



동면에서 깨어나는 불영계곡은 회색빛 톤에 한결 부드러운 소생의 기미가 느껴졌다.
불영계곡은 너무 많이 지나다녀서 내 동네 길처럼 익숙하지만 항상 느낌은 다르다. 바위와 나무와 물이 햇살의 기울기에 따라 다르다. 황경의 기울기에 따라 계절이 바뀐다. 그러나 내 불영계곡에 대한 느낌은 그런 천문학적 이치가 아니다. 깊은 골짜기가 영겁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녹음이 우거지는 봄에 지나면 산 위의 원시림 속에 공룡이 엎드려서 식곤증에 조는 듯한 느낌이고, 여름 장마철에는 벌창하는 냇물소리에 귀가 먹먹해서 쥐라기에 들어선 것처럼 무섭다. 마치 성난 공룡이 나타나서 괴성을 지르며 차 앞을 가로막을 것 같은 불안감이 느껴진다.

불영계곡은 가을이 제일 좋다. 만산홍엽이 동면을 서두르는 처연한 몰락(沒落)의 가을 절정기보다, 모든 걸 다 떨쳐버리고 잠드는 순리의 침묵 가득한 늦가을의 골짜기가 좋다. 그 때의 불영계곡은 모든 것이 다 홀연(忽然)하다. 흐르는 물도, 산등성이의 나목도, 바위도, 모든 것이 신생대의 지각 변동을 치르고 난 골짜기처럼 너무 조용해서 마음이 엄숙해지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수용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약점을 홀연히 인정하는 마음이 그리 편할 수 없다. 편안함의 극치 그래서 좋다. 그런 감정은 깊은 가을에 깊은 골짜기에 들면 어디서나 느끼게 마련이지만 나는 불영계곡에서 더욱 분명하게 느낀다.

불영계곡이 겨울잠을 깨고 있다.
‘둥둥---’ 북소리처럼 황금햇살이 골짜기에 대회전을 치를 대군의 깃발처럼 쏟아진다.
팔각정에 차를 세우고 아주머니의 커피를 사 마셨다.
“차도 별로 안 다니는데 장사 돼요?”
의례적인 인사를 했더니
“햇살이 하도 좋아서 나와 보았어요”
아주머니가 시구처럼 말한다. 얼마나 사람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말인가. 이 아주머니가 시인이다. 글자를 활용하는 재주가 없어서 표현을 못할 뿐이지 마음에는 시가 가득하다. 이 아주머니가 아직 차가운 관광지의 길목에 서 있는 것은 계절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표현한 시적 퍼포먼스(performance)다. 어느 시가 이처럼 정다울까. 어느 시가 사람과 사람을 연결 해주는 절창을 이 아주머니 퍼포먼스 만치 구사할 수 있을까.
이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불영계곡 어디 빈 오두막집을 구해 와서 살고 싶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내 건강이 이웃에 폐가 안 된다면 그러리라고 꿈꾸며 살고 있다. 나는 그런 오두막집을 영양서 백암온천으로 넘어가다가 수비 어디쯤서 버려진 오두막집을 보아 두었다. 봄 햇살을 담뿍 받고 조용히 한 때의 단란했던 삶을 추억하듯 주저앉아 있는 오두막집을 보고 그 단란을 내가 이어가리라 생각을 했다. 그리 말했더니 아내가 일언지하에 그건 착각임을 지적했다.
“주영이 승주 보고 싶어서 어떻게요”
맞다. 일가의 단란이란 일가가 다 모여 살 때 가능하다. 늙은이 둘이 여생을 조용히 사는 것은 단란(團欒)이 아니라 안락(安樂)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인데 늙은이의 안락이 나는 가능할지 모른다. 친구들과 인터넷도 하고 글도 쓰고, 솔바람소리에 귀도 기울이면 만사 잊고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내는 안 될 것 같다.
커피를 마시면서 불영계곡에 봄이 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물소리가 한결 명랑한 것 같다. 눈을 감고 해를 바라본다. 망막에 황금 장막이 눈부시고, 이마는 따뜻하다. 물소리는 더욱 선명하게 이마를 톡톡 튀는 물방울처럼 간지른다. 봄은 봄이다.

노루재를 넘어 오미삼거리에서 35번 국도로 좌회전을 했다. 이 길로 가면 안동이고 직진하면 영주다. 영주로 나가면 단양 충주호반을 거쳐 내 고향 연풍을 거쳐서 집에 가고, 안동으로 나가면 상주 보은을 거쳐서 간다.
나는 백두대간을 넘어 다니기는 많이 했어도 따라가 본 적은 별로 없다. 목적이 동해바다를 보는데 있기 때문이다. 영덕으로 넘어 가는 34번 국도와 울진으로 넘어가는 36번 국도를 많이 지나다녔다. 백두대간을 따라서 남북으로 난 35번 국도는 한 번쯤 밖에는 안 지나가 본 것 같다. 이 길로 가면 산맥을 따라서 오는 봄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에 접어들었다.

이 길로 들어서기를 잘한 것 같다. 황새마을이라는 데서 갈천까지는 펑퍼짐한 산등성이로 길이 나 있어서 남쪽과 북쪽 끝 없이 이어지는 산봉우리가 중중첩첩이다. 백두대간을 이루는 봉우리들이다. 산봉우리들이 봄기운에 묻혀서 방금 처 놓은 묵화 같다. 이 길에서는 그 광경을 보려고 길손들이 차를 자주 멈추는 곳인 듯 길가에 원두막과 가든이 생겨 있다. 모두 아직 깊은 겨울에 잠겨 있다.

조금 가다 차를 세우고 조금 가다 차를 세우곤 했다. 바람이 세차서 차에서 내리지는 않고 차안에 앉아서 조망감(眺望感)을 만끽했다.
아-! 산들-. 우리나라는 산도 많다. 산만큼 골도 많다. 나는 항상 감격하지만 골 골이 말소리 틀리고 먹세 틀리지만 얼굴과 맘은 붕어빵이라는 게 신기하다. 사람과의 배달민족 종이라는 같은 종속(種屬) 때문일 것이다.

산등성이를 지나 내리막길을 내려오자 강이었다. 낙동강이다.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며 먼 여정을 떠나는 강, 어젯밤에 본 서부극의 ‘돌아오지 않는 강’이 생각난다. ‘돌아오지 않는 강’은 영화의 제목이 아니고 강의 이름이다. 인디언들이 지은 이름이다. 이 강을 이 곳 사람들은 무어라고 부를까. 강을 왼쪽에 끼고 국도가 남행 한다. 강을 따라서 떠난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는 듯 국도 연변의 취락들은 쓸쓸하다. 강은 다 돌아오지 않는다.

청량산 도립공원에 들렀다. 청량산은 높이가 870미터로 백두대간에 군림할 정도의 산은 아니다. 켜켜이 쌓아 올린 듯한 바위 층의 단애들이 인상적인 산이다. 입구에서부터 협곡을 따라 들어가면서 산봉우리들이 고개를 추켜들어야 바라보일 정도로 골이 깊다. 마치 내가 손오공이 갇혀 있던 오행산으로 들어가는 삼장법사 아닌가 싶은 착각이 든다. 휴게소가 있는 골 안까지 들어갔으나 관광객은 없고 휴게소도 문을 닫았다.

봄에 들어오면 싱그러운 녹음에 어지러울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입구에 나오다 보니 공원관리소 직원들이 사무실 앞에서 라면을 끓여 먹는다. 머리를 맞대고 동그랗게 둘러앉은 자리에 봄 햇살이 조명처럼 눈부시다. 그래서 그런지 공원관리소 직원들의 근무여건이 아주 단란할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인간이 모여서 단란한 것보다 더 아름다운 사회는 없다. 그런 사회라야 발전이 있다. 문득 국회를 생각했다. 추악한 인간들의 모임, 총선은 다가오고 국회를 위해서 투표권을 행사 할 것이냐 말아야 할 것이냐가 나의 국민적 양심의 당면한 문제다. 내 집 일만 해도 골이 아픈데 국회의원들은 왜 중생의 골 때리는 짓이나 하는지-. 불영계곡 팔각정 앞에서 커피 파는 아주머니가 극성스러운 어느 여성국회의원보다 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도산서원을 지나서, 안동호를 지나서 안동시내로 나왔다. 아내가 안동 헛제사밥이 유명하다며 먹어보자고 한다. 배가 고파서 하는 소린지, 정말로 헛제사밥이 먹고 싶은 것인지 모를 일이다. 우리는 사대봉사를 한다. 제사를 일곱 번 지낸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여덟 번 지내야 한다. 제사 밥은 비교적 실컷 먹는 셈이다. 돈주고까지 제삿밥 사 먹고 싶은 생각은 없다. 외곽도로 빠져서 안동시가지를 벗어났다.
아내의 의사를 배반한 것이다. 낯선 시내서 대기도 힘든 차 주차하고 맛없는 밥 사 먹으면 그보다 신경질 나는 일이 없다. 배부른 국회의원들이 먹다 버린 정치자금이라는 개밥 그릇 핥아먹는 것보다 더 기분 나쁘다.
“그럼 안동 간 고등어 구이 백반을 먹든지-”
(어린애 밴 여자처럼 먹고 싶은 것도 많다)
속으로 그러고서
“알았어-. 하회마을에 가면 헛제사밥이 있든지, 간 고등어구이가 있든지 이 지방 전통 음식을 먹을 수 있을 거야-”
상주로 질러가는 지방도에서 조금 들어가면 하회마을이다. 하회마을 입구에 있는 음식점에 차가 그득하다. 음식은 사람 많이 꾀는 집에서 먹으면 별로 불만스럽지 않다.
하회마을에서 간 고등어 자반 구이 백반을 먹었다.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일로 집을 향해서 ‘이랴-’ 하고 당나귀의 고삐를 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