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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성균 수필 연재 - 가을바람 부는 대로(상)

Joyfule 2012. 3. 17. 10:59

 

    

 

 목성균 수필 연재 - 가을바람 부는 대로(상)



1 진부
진부 톨게이트에서 고속도로를 내렸다.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곳이라 그런지 나는 진부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이곳이 진부라는 곳이에요. 이곳은 여름에 반 팔 셔츠를 입지 않고 넘길 수 있는 곳입니다. 산들 좀 봐요. 저 까맣게 높은 산줄기는 해발 1000미터이상을 이루고 있어요. 삼십 한 이삼 년 전쯤 어느 해 초겨울, 선애 아빠가 흔들리는 마음을 진정하려고 나를 찾아 이곳에 왔었지요.”
“기억나요. 진숙아빠가 선애 아빠 나한테 와있으니 걱정 말라고 처 준 전보 밑에 ‘진부에서’라는 지명을 보고 진부가 어떤 곳일까 참 많이 상상했어요.”
선애 아빠 엄마를 태우고 진부 읍내를 한 바퀴 돌았다. 그러나 내가 그리는 진부의 모습은 세월 속으로 사라지고 흔적도 없었다. 진부 농고 앞에 와서 당시에 진숙, 진용 남매를 데리고 살던 우리의 셋집을 찾아보았으나 흔적도 없었다. 내가 군고구마를 사 가지고 건너가던 논둑길이 여기쯤인지 저기쯤인지 전혀 땅 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논둑길에서 눈 속으로 곤두박질을 하고 ‘에이 넘어진 김에 쉬어가자’고 눈 속에 파묻혀 대성제재소의 발동기 소리와 불빛을 바라보며 앉아 있던 내 생애의 한 순간을 차지한 자리를 15층 아파트가 차지하고 있는 듯 짐작이 갔다.

“내가 선애 엄마아빠가 자는 청량리의 단칸 셋방에 끼어서 잔 빚을 갚아 준 내 단칸 셋방이 이 근처 어디쯤 있었는데…….”
장가들고 한해 농사를 지은 나는 추수를 마치고 흔들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상경을 해서 선애네 청량리 셋방에 찾아갔다가 단칸방에 끼어 잔 적이 있다. 나는 손님이라고 아랫목에 자고 선애 엄마는 냉골인 윗목에서 잤다. 선애 아빠가 진부에 나를 찾아 왔을 때도 그랬다. 손님이라고 선애 아빠는 아랫목에 자고 진숙엄마는 냉골인 윗목에서 잤다. 내 빚 갚아 준 방이란 그 우리의 신혼 초 가나하고 애틋했던 살림방을 말하는 것이었다.


2. 날라리 집 색시
나는 여정을 염두에 두지 않고, 안 가본 길을 따라서 배고프면 아무데서나 아무 거나 먹고, 저물면 풍천노숙을 면한 잠자리에 들며 거칠 것 없이 하는 여행을 좋아한다. 그런데 이 번 여행은 그럴 수가 없다. 미리 잠잘 장소를 예약하고 떠났다. 선애 아빠엄마를 위해서다. 이번 여행 목적은 그들을 위한 여행이었다. 요즈음 선애네는 전셋집을 옮겼다. 셋방살이는 젊어서도 비애를 느끼는데 다 늙어서 전셋집으로 전전하는 그들 내외의 심경이 어떨까 싶어서 가을바람이나 쏘이러가자고 떠나온 여행이다. 선애 아빠는 세상이 다 귀찮다는 듯 시큰둥해 하는 걸 진숙엄마가 선애 엄마를 꾀여서 이루어진 여행이다. 그래서 오대산 월정사, 동해바다, 설악산, 내린천을 1박2일로 돌아오기로 계획한 것이다.

오늘의 여정은 진부, 오대산 월정사, 주문진의 선창, 낙산사를 보고 낙산 해수욕장에 있는 ‘E콘도’에서 자는 것이다. 바다가 보이고 귓전에 파도 소리가 들리는 28평짜리 콘도를 컴퓨터로 예약했다. 내 여행 관행에 의하면 좀 사치스러운 숙박이지만. ‘원님 덕에 나팔 분다’고 선애네 덕에 낭만적인 숙박시설을 이용해보자는 것이다.
점심은 진부서 막국수를 먹기로 계획했는데 진부를 다 돌아보고 나도 겨우 열시가 좀 지났을 뿐 아니라, 내가 근무할 당시 막국수로 유명한 ‘개나리 집’은 없어져버려서 차질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선애 엄마 아빠에게 강원도 전통의 별미를 먹여주고 그 미각을 지켜보려는 내 생각이 무산된 것보다 추억의 ‘개나리 집’이 없어진 것이 더 섭섭했다.

당시 진부 ‘개나리 집’은 진부에서 행세하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색시 두고 술과 밥을 파는 이름 있는 집이었다. 진부사람들은 ‘개나리 집’을 ‘날라리 집’이라고 했다. 밤마다 색시들의 유행가소리가 그치는 날이 없기 때문이었다. ‘강릉영림서진부관리소’ 직원은 진부에서는 행세하는 직업인에 들었다. 진부라는 곳이 임산물 집산지였고, 그래서 번창하는 산읍이다 보니 영림서 직원은 이 작은 산골사회에서는 소홀하게 볼 수 없는 선망의 직업인이었다. 영림서 직원으로 해서 ‘개나리 집’은 번창을 했다. 우리는 이런저런 일로 자주 이 집에 들렀다.

진부장날 이 집에서 먹는 막국수 맛을 나는 지금도 있지 못한다. 면발 뽑는 압착기가 놓여 있는 커다란 무쇠가마솥에서는 설설 물이 끓고 면발을 계속 뽑아서 삶아냈다. 꾸미는 군내 나는 시커먼 열무김치뿐이었다. 진부하면 그 가실가실한 면발을 구수한 육수에 말아서 군내 나는 열무김치를 곁들여 먹던 막국수, 그 토속 음식 맛에 군침이 도는 것이다.
봉평과 진부는 육칠십 리쯤 떨어진 거리다. 봉평에 소금을 뿌려놓은 것처럼 달빛 아래 메밀꽃이 핀다면 진부에도 메밀꽃은 핀다. 나는 진부에서 허생원의 색시 같은 여자를 ‘개나리 집’에서 보았다. 두서너 번 보았을까. 지금껏 기억에 남는 것은 곧 원주 나가서 작은 케이크 집을 차릴 거라고 내게 자랑을 하던 말이다. ‘나에게도 꿈이 있어. 술집 색시라고 우습게보지 마-.’ 그러는 것처럼 내 눈을 들여다보고 술이 취해서 진지하게 말하던 색시를 못 잊어서, 나는 ‘날라리 집’을 못 잊고 막국수 맛을 못 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색시는 아직 때가 덜 묻은 촌닭 같은 신참 영림서 직원을 혹시 좋아한 것 아닐지-? 진부가 생각나면 그 색시가 생각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진부에 들린 것은 선애네를 위한 것이 아니고 나를 위한 것이었다.


3 월정사
앞에서도 말했지만 선애 아빠가 젊은 나이에 살기가 힘들어서 내외가 다투고 나를 찾아서 이 산골에 왔다. 다툼의 원인은 선애 아빠의 울분이었을지 모른다. 그 울분을 삭이려고 나를 찾아와 준 나에 대한 그의 우정에 감격했다. 그 감격을 나는 지금껏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선애 아빠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그 가 지금 까지 불운하게 사는 이유는 우리 민족의 비극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맏형이 6. 25 때 부역을 하고 월북을 한 집의 막내다. 국가보안법상 연좌제의 덫에 걸려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이익을 감수하는 삶을 살아 온 것이다.

선애 아빠는 나와 같이 총무처에서 시행하는 국가공무원 시험에 같이 응모했다. 나는 말단인 9급 임업직이고 선애 아빠는 한 직급 위인 7급 행정직이었다. 같이 합격해서 나는 발령을 받고 선애 아빠는 발령을 받지 못했다. 신원조회에 월북자 가족으로 판정되었기 때문이다.
딸만 넷을 낳아서 대학까지 가르치며 그럭저럭 한 세상 살아서 이제 노경에 들었지만 진부로 나를 찾아올 때 그의 좌절감은 진부의 산들만치나 높았을 것이다.

월정사는 6. 25때 불타서 선애 아빠가 나를 찾아 왔을 때는 달랑 대웅전만 새로 지어 놓았을 뿐, 황량하기 그지없었는데 지금의 월정사 경내는 대대적인 중창 불사를 해서 마치 신흥 사찰 단지처럼 번창하다. 다만 변함없는 것은 아름드리 전나무 숲과 맑은 계곡이다. 대웅전 돌계단 앞에 앞발을 버티고 앉아있는 한 쌍의 사자 상도 옛날 것이 아니다. 하얀 화강암의 질감이 아직 세월의 때를 타지 않았다.
하얀 나일론 잠바를 입은 다섯 살짜리 진숙이가 등허리에 올라타고 있던 돌사자 상은 이보다 작았지만 정교했다. 백수의 왕다운 사자의 근엄한 기상이 엿보이는 명장 석수장이의 솜씨가 엿보였다. 그 사진은 우리 집 앨범 1권에 아직 그 만추인지 초겨울의 월정사를 상기시켜주는 자료로 잘 보관되어 있다. 이 돌사자 상은 크기는 해도 정교한 맛이 없다. 전혀 불필요한 불사를 한 것이다. 돌사자 상을 교체한 것은 절의 운치나 부처의 권위를 제고하기는커녕 저하시키고 있다. 조각가가 아닌 내 눈에도 현재의 사자 상은 솜씨가 설익어 보인다. 다섯 살짜리 진숙이는 초등학교 5학년과 1학년생의 어미가 되었다. 몇 해 전에 왔을 때도 그 사자 상이 그대로 있어서 등허리를 쓰다듬어 보았는데 아쉬운 마음이었다.

선애 엄마만 대웅전 본존 불상에 절을 했다. 불자는 선애 엄마뿐이다. 선애 엄마는 새댁 때 예뻤다. 친구들이 예쁜 색시 얻어온 선애 아빠를 부러워했다. 그 선애 엄마도 두루뭉술한 할머니의 뒷모습이다. 절하고 일어서는 동작이 힘들어 보인다. 인생이란 이런 것인가, 연민스러운 생각이 들어서 선애 아빠를 끌고 돌아섰다.
월정사 앞 냇물은 오대산 자락의 물을 다 모아서 흐른다. 산골 냇물로는 수량이 많다. 가을이 깊어진 듯 물이 고즈넉하게 흐른다. 빨리 흘러갈 생각도 없고, 안 흘러 갈 생각도 없는 듯하다. 순리가 이런 거로구나 싶게 흐른다, 우리는 냇가 너럭바위에 앉았다. 건너편 산기슭에 단풍이 곱다. 북나무와 단풍나무가 냇가 산기슭에 이파리들을 곱게 물들이고 서있다. 새빨간 단풍 빛에 물든 냇물이 황홀한 듯 흐르기를 멈추고 있다. 우리도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각자 무슨 생각을 했을까. 황홀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을까.

그 때 진숙엄마가 엉뚱한 화제를 꺼냈다.
“글쎄, 진부에서 가을을 두 번이나 나고 가면서 월정사 구경을 안 시켜주더라니까.”
“너무하셨네요.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아내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으셨어요?”
“그 때는 나도 저 단풍잎 빛깔을 눈치 채지 못했어요.”
거짓말이 아니다. 내가 진부에서 가을을 보내며 저 단풍을 못 보았을 리 없는데 월정사의 아름다운 단풍이 기억에 없는 것을 보면 그 때 나는 꽤 쫓기듯 살았던 모양이다.

선애 아빠가 부도(浮屠)밭에 가자고 해서 절에서 떨어져 있는 부도 밭에 갔다. 양지바른 산 밑에 부도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선애 아빠가 나를 찾아 진부에 왔을 때 우리는 진숙이를 데리고 월정사에 왔다. 그 때는 사하촌(寺下村)까지 오는 군내버스를 타고 와서 절까지 걸어야 하는데 일주문을 지나서 컴컴한 전나무 터널을 지나서 부도 밭을 지나서 한참을 걸어야했다. 퍽 추웠던 걸로 기억된다. 진숙이가 춥다고 해서 엎고 걸었다. 그런데 전나무숲 터널을 지나니까 양지 바른 평지에 부도가 떼로 모여 있는 부도 밭이 나타났다.

중년여인이 합장을 하고 부도를 돌고 있었다. 그 동작이 하도 엄숙하고 간절해서 우리는 지켜보았다. 그런데 선애 아빠가 돌연히 그 중년여인을 따라서 부도를 도는 것이었다. 아마도 고승의 사리가 안치된 부도를 소원을 빌며 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선애 아빠는 몇 바퀴를 돌더니 중년여인은 계속 돌고 있는데 우리에게로 돌아왔다. 선애 아빠가 부도 밭에 가자고 할 때 문득 그 생각이 났다. 선애 아빠는 부도 밭에 오더니 그 때처럼 합장을 하고 부도를 돌았다. 선애 엄마도 따라 돌았다. 엷은 가을 햇살아래 엄숙한 동작으로 부도를 도는 그들의 모습이 쓸쓸해 보여서 진숙엄마와 나도 같이 돌았다. 무엇을 빌었나 물어보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