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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성균 수필 연재 - 가을바람 부는 대로(하)

Joyfule 2012. 3. 20. 05:38

 

    

 

 

목성균 수필 연재 - 가을바람 부는 대로(하)

 

 

7. 권금성
다행이 막힘없이 설악산 공원에 들어갔다. 설악산 어귀 넓은 광장에서 돌아보는 설악산의 풍경만으로도 나는 늘 기쁘고 만족한다. 그 광장에는 팔도에서 모인 남녀노소들이 만들어 놓는 팔도문물시장 같은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좋다. 나는 설악산에 몇 번 와 보았지만 아직 그 어느 계곡 안에도 들어가 보지 않았고, 그 어느 산봉우리도 올라보지 않았다. 우수 공무원 포상 여행을 부부동반으로 시켜줘서 왔을 때, 케이블카로 권금성에 올라가 본 것과 신흥사에 들려본 게 전부다. 대개 이 넓은 공원 광장에서 거닐며 봄이면 봄, 가을이면 가을의 설악산 정취에 젖어보는 것만으로 설악산 여행의 실익(實益)을 충분히 취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권금성에 오르기로 했다. 선애 엄마가 설악산이 처음이라며 ‘설악산 설악산 말만 들었는데 와보니 참 좋네요’ 애들처럼 기뻐해서 ‘내려다보면 더 좋지요’ 선험자(先驗子)의 자부심으로 그리 결정했다. 문제는 케이블카를 기다리는 인내심 낭비 때문인데 다행히 케이블카를 보수하고 시간제로 운행하며 표를 시간에 맞춰 팔아서 줄은 안 서도 되었다.
나는 줄을 서서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 공간을 확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치열한 경쟁이 따르는 이득 있는 줄에 아등바등 비집고 서는 과단성도 없다. 사회생활에 더 없이 불리한 마음이지만 태생적인 걸 어쩌겠는가. 줄을 서서 얻는 이익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불리한 내 페이스로, 대신 자유롭게나 살자는 주의인데 기실 그 또한 자유롭지도 못하다.

선애 엄마를 위해서 두 시간을 할애 한 셈이다. 줄을 안 서다 뿐이지 기다리는 건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공연히 선애 아빠가 올려다보나 내려다보나 그게 그거니까 그냥 가자고 조바심을 한다.
“이 사람아, 설악산 왔다가 권금성에 안 올라보고 가면 나중에 염라대왕 면접에 불합격해서 지옥으로 떨어진데. 떨어지려면 자네나 떨어지지 왜 이승에서 데리고 직사하게 고생 시켜 놓고 선애 엄마까지 끌고 떨어지려고 해---.”
어린애처럼 보채서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윽박질러버렸다.
“그려-. 그럼 안 되지-.”

신흥사를 돌고 와도 시간이 남는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서 모처럼 더없이 좋은 가을 햇살을 담뿍 받고 산악미(山岳美)에 취했다. 만족한 삶의 한 때를 조용히 받아들였다. 우리 시간이 되어 개찰을 하고 케이블카를 탔다. 권금성에서 보는 설악산은 외설악의 동쪽에 불과하지만 설악산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지역임에 틀림이 없다. 아래서는 보이지 않던 교목아래 서있는 관목류의 단풍나무들이 울긋불긋 물들어서 단풍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권금성은 신라 때 권씨와 김씨가 가솔을 데리고 와서 난을 피했다는 전설이 있는 만큼 요새를 이루고 있다. 케이블카가 아니면 올라올 수 없어 보인다.

넓은 너럭바위에 앉아서 바라보는 동해의 파란 물결과 바위 난간을 의지하고 건너다보는 바위 산봉우리, 그 절벽에 서있는 소나무의 독야청청한 위용이며, 바위에 매달려있는 단풍들의 꽃 같은 자태가 가을 햇살에 말할 수 없이 빛난다. 이 빛나는 자연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져보는 것을 인간들은 스트레스 해소의 일환으로 즐기는 것 아닐까. 빛나는 자연의 영원성에 대한 인간의 외경(畏敬)은 자신을 솔직히 돌아보고 깨닫는 는 기회다. 그 기회는 일종의 종교심 같은 것으로 속리산 문장대를 세 번 올라보아야 극락에 가느니, 살아서 금강산을 못 가본 사람은 극락에 못 가느니 하는 말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선애 아빠도 권금성에서 내려다보는 설악산에 취한 듯 말이 없다. 권금성에서 내려오는 케이블카 타는 시간은 한 시간 후로 정해져있으나 형식적인 시간이다. 올라간 사람은 내려오고 싶을 때 내려오면 그만이다.
설악산에서 나오면서 보니까 들어가는 차들이 꼬리를 물고 늘어 서있다. 끝에 서있는 차는 오늘 중에 설악산을 보고 나오기는 그른 것 같아 보였다. 양양으로 내려와서 한계령을 넘기로 했다. 한계령의 단풍은 설악산 단풍의 결정판이라고 보아도 틀림이 없다. 암석봉우리의 절벽에 매달려 봉우리를 불꽃처럼 태우는 단풍, 단풍, 단풍들---.

한계령 휴게소 주차장이 만차라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러나 그냥 갈 수는 없다. 한계령에서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고 가지 않으면 뭐를 잊어버리고 가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차를 남에 차 앞에 대고 세 사람이나 구경하고 오라고 했다. 나는 빈자리가 나는 대로 차를 대고 간다고 했으나 주차할 곳은 나지 않았다. 잠시 후 세 사람이 플라스틱 용기에 볶은 감자를 담아 가지고 왔다. 점심때가 지났다. 감자로 우선 허기나 면하고 백담사 입구인 용대리에 가서 북어찜 백반을 먹기로 하고 한계령을 떠났다.


8. 북어포무침
한계삼거리 검문소에서부터 도로는 왕복 4차선이었다. 금방 인제에 도착했다. 이상했다. 용대리는 어디지-? 길이 좋아져서 그런가. 용대리를 지나서 경관이 빼어난 꼬불꼬불한 강 벼루를 한참 더 가야 인제였는데, 금방 인제에 당도한 것이다.
알고 보니 잘못은 내 착각이었다. 한계령을 넘고 미시령을 넘은 걸로 착각 한 것이다. 미시령으로 넘어와야 백담사 들어가는 골짜기 어귀인 용대리를 지나서 한계삼거리로 나오는 것이다. 한계령으로 넘어와서는 한계삼거리에서 다시 미시령 쪽으로 우회전해서 한참을 가야 용대리다.
용대리는 명태 덕장업이 성한 곳이다. 그래서 이 지역의 특색 있는 먹거리는 북어로 만드는 음식이다. 그중 내 입맛에 맞는 것은 단연 북어찜 또는 북어더덕구이 백반이다. 그걸 먹어보려고 한 것이 무산되었다.

내 어려서 우리 집에는 손님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늘 북어 한 쾌와 소주고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성균아 손님 오셨다.”
사랑에서 안에다 대고 아버지가 소리를 지르시면 어머니는 북어를 다듬이 돌 위에 얹어 놓고 방망이로 자근자근 두드린다. 내 기억에 의하면 그 북어는 황태가 아니고 그냥 마른 북어다. 어머니의 손길에 그 북어는 더덕처럼 부드러워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영에 순응하는 법이 별로 없으신 데 손님 술상 보는 일만은 절대로 거역하는 법이 없으셨다. 아무래도 북어 두드리는 일과 그 북어 살을 잘게 찢어서 양념 고추장에 버무리는 일이 어머니의 기쁨일리는 만무하다. 한풀이의 일환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 맛은 여자의 한이 아니고는 만들어질 수 없는 맛이라는 생각이 든다.

술상의 안주는 딱 한 가지 그 북어포 무침뿐이다. 어머니의 북어포 무침 맛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 맛은 인근의 술꾼들에 의해서 정평이 나있을 뿐 아니라 돌아가신 내 장인도 증명해 주신 바 있다.
그 어른은 내 사주를 받아 가지고 가셔서 장모님께 말하시길
“아무래도 호순이 그 집에 시집가면 시집살이 좀 하겠어-. 시어머니 될 분이 북어포 무치는 솜씨가 예사 아녀. 자고로 침선(針線)이고, 음식 솜씨고 손맛 매운 시어머니 치고 며느리 시집살이 안 시킨 시어머니 없는 법이야-. 호순이가 그 집에 가면 시집살이 좀 해야 할 거야. 내가 술 좀 먹어 보았지만 그리 맛있는 안주는 처음 먹어 보았어-"
그러시며 우리의 혼사에 우려를 금치 못하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손님 술상에 놓는 북어포 무침에서 조금 덜어서 내게 밥을 주셨다. 북어 두드리는 소리만 나면 내가 턱을 괴고 기다렸기 때문인데 나중에는 관례가 되어 내가 없으면 일부러 불러다 먹여주셨다. 그 때 어머니는 씨암탉 같다는 소리를 들으셨다. 지금 구십 객인 노인네를 보면 입에 슬픔이 북어포 무침 맛처럼 고이다. 내가 용대리의 북어찜이나 북어 더덕구이를 먹고싶어하는 것은 어머니의 북어포무침 맛에 대한 향수일 것이다.


9. 내린천
인제에서 점심을 먹을까 하다가 그냥 내린 천으로 접어들었다. 이미 점심때는 훨씬 지났다.
나는 인제 보다도 더 부실한 음식을 파는 고장도 없다고 생각한다. 인제를 깊숙이 모르는 사람의 선입견일지 모지만, 나는 군 주둔지의 음식점들은 대체적으로 부실하다고 본다. 인제에서 서너 번 잤다. 막내가 내린천 변에 있는 현리라는 곳에서 군 생활을 했다. 그 애 면회 와서 데리고 나와 잤다. 한 번은 애가 탕수육이 먹고 싶다고 해서 중화요리 집에 들어갔는데 탕 수육에서 수퇘지 불알 냄새가 나서 못 먹었다. 그래서 인제에서는 잠만 자고 절대로 음식은 안 사먹기로 맘먹은 바 있다.

내린천은 협곡을 흐르는 깊고 물살이 급한 이른바 감입곡류(嵌入曲流)의 하천이다. 강안(江岸)의 경관이 빼어나서 곳곳에 유원지가 많다. 내린천에서는 젊은이들이 팀웍을 이루어 고무보트로 급물살을 타는 래프팅 광경도 볼 수 있고, 여름날에는 저녁 산그늘 내린 물 가운데 서서 ‘흐르는 강물처럼’ 이라는 영화의 주인공처럼 다감한 포즈로 루어낚시를 하는 사람도 볼 수 있다.
현리 앞 방태천에서 소양강 상류 합강까지 백여 리의 31번 국도는 내린천을 오른쪽에 끼고 산기슭의 벼랑길을 이루고 있다. 이 길은 비교적 한적해서 주마간산(走馬看山)을 하면서 서행을 해도 뒤따라오며 경적을 울린다든지 전조등을 깜박거리는 자동차 때문에 불쾌하지는 않다. 그렇다고 전방주시를 태만히 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전구간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길 오른쪽은 낭떠러지고 그 아래는 내린천이 흐른다. 운전 조심해야한다. 그 험한 길가의 경치가 특히 뛰어나기 때문에 자칫 여우에 홀리듯 불상사가 발생할 소지가 있다. 두리번거리고 한눈팔 일이 아니라 아예 주차를 하고 경관을 찬찬히 즐기고 가는 것이 좋다.

막내를 세 번 면회 왔었다. 봄여름가을이다. 올적마다 내린천에서 하루를 보내고 갔다. 그리고 보면 꼭 애 면회 온 것이라기보다 내린천의 사계를 보러 왔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아비의 말일지 모른다. 둘 다라고 보는 게 무방할 것이다. ‘뽕도 따고 님도 보고, 도랑 치고 가재잡고’ 그런 셈이다.
내린천의 봄은 강 건너편 물가 바위틈새에 군락을 이루는 철쭉이 좋고, 여름에는 우거진 녹음을 울리는 물소리가 좋고, 가을에는 강기슭의 단풍이 곱다. 우린 대표적으로 그 계절의 경이를 보여주는 천변에서 애하고 하루를 즐겼다. 애는 너럭바위나, 모래밭이나, 그늘에서 스포츠 신문을 보다가 신문으로 얼굴을 덮고 잤다. 그 애의 하루는 경치하고 상관없이 심신의 긴장을 이완하는 일이고, 나는 경치에 취하는 일이고, 아내는 음식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 각기 다른 일은 아내가 준비한 음식을 놓고 강변에 모여 앉음으로서 행복이라는 것으로 하나가 되었다. 그 곳마다 차를 세우고 선애네 한 테 관광가이드처럼 좀 자랑스러운 말투로 그 때를 설명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어요. 배고파 쓰러질 지경이구먼, 경치가 눈에 들어 와요.”
아내가 핀잔을 주었다. 해가 척 기울었다. 선애네 한 테 미안했다. 우리는 경치 플러스알파를 즐기는 것이지만 선애네는 경치만 즐기는 것인데 이건 선애네를 고려하지 않은 자기도취다. 그리고 보니 배가 고팠다. 이제 현리에 가서 범국민적 음식인 자장면을 먹는 수밖에 없다.

현리 초입 머리에 아담하게 새로 지은 막국수 집이 있었다. 시골의 막국수 집이라면 낡고 오래된 집이라야 한다. 그래야 막국수 맛에 믿음이 간다. 가든 같은 음식점의 막국수 맛은 아무래도 서툰 상업적 맛이지 싶은 의구심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나저나 배가 고픈데 이렇다 저렇다 말씀할 게재가 아니라 마당에 차를 대고 들어갔다.
막국수 집 아주머니가 젊다. 그런데 시대를 도외시 한 모습이다. 점봉산(1424m) 아래 전형적인 강원도 시골뜨기 아낙이다. 전형적인 막국수 맛에 기대가 가는 모습이다.

배가 고파서일까. 동치미 국물에 말아주는 막국수 맛은 옛날에 진부 개나리 집에서 먹던 막국수 맛과 다를 바 없었다. 백옥 같은 무에 산발한 무청이 달린 동치미 국을 큰 대접에 가득 떠다 놓았다. 마치 발가벗은 젊은 여인이 삼단 같은 머리채를 풀고 산간 옥수에 몸을 담그고 있는 신윤복의 풍속화 같은 정경이 연상되는 동치미국이다. 그리고 작은 싸리나무 쟁반에 따로 사리를 하나 더 갖다 놓았다. 소박하고 정갈한 인심이 느껴지는 상차림이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했듯이 막국수 그릇을 비우고 여분으로 낸 사리까지 다 먹고 더 달래서 먹었다. 진부 막국수를 현리서 먹은 셈이다.
이 집은 이 길로 지나가는 사람에게 소개해도 손색없는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감스럽게도 옥호를 알아 가지고 오지 않았다. 아무튼 인제에서 오다가 현리 들머리의 간판을 막국수에는 자신이 있다는 듯 크게 단 집이다.


10. 운두령 너머
운두령은 해발 1089m의 적잖은 높이의 고개다. 고개 동쪽 능선을 따라가면 남한에서 세 번째로 높은 계방산(1577m)이고 조금 더 나가면 오대산이다. 고개 마루에서 홍천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백두대간의 서북쪽이 조망된다. 아득한 시정(視程)에 가득하게 모여 있는 높고 낮은 영웅호걸 같은 산봉우리들의 조망(眺望感)은 인간 존재의 유한함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 나는 삼십대 갓 들어선 봄날 대일 청구권으로 일본에서 들여온 가와사끼라는 오토바이로 이 고개에 올라와서 고개 너머 홍천 쪽을 조망했다. 봄빛 속에 펼쳐진 시야 가득한 산세의 장엄함에 목이 메었었다. 영동고속도로에 들어서면 다녀가려고 별러지는 곳이다.

고개 위에는 간이 휴게소가 두 채 있다. 몇 해 전 지날 때는 한 채더니 한 채가 더 늘었다. 공터에 차가 하나 가득하다. 장사가 되니까 휴게소가 늘은 듯하다. 외진 고갯마루에도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적용 되고 있다. 원래부터 있던 휴게소에서 감자와 메밀 부침개를 먹었다. 비닐하우스 안에 사람이 가득하다. 아무래도 맛이 그 전만 못한 것으로 보아 원조(元朝)의 덕을 믿고 깍쟁이 짓을 하는 것 같다. ‘얄미워서 다음에는 안 먹을 것이다’ 속으로 그리 생각했다.
고개를 내려와서 좌측 골짜기로 들어갔다. 외지 사람들이 지은 별장 같은 집들이 여기저기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 길이 닫는 곳까지 들어가 보았지만 반공소년 이승복의 생가가 있던 곳은 어딘지 짐작도 안 되었다.

이승복 소년의 일가가 무참히 살해된 다음해 나는 영림서 직원이 되어 공무 수행 차 이 골짜기에 왔었다. 이승복의 생가를 보았다. 뜰에 얼룩진 흔적이 남아있었는데, 이장 말에 의하면 핏자국이라고 했다. 그 작고 컴컴한 토굴 같은 오두막집이 이장이 말하는 단란했던 삶이 머물렀던 곳이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끔찍한 분단국가의 비극이 연출되었다. 차라리 승냥이가 덤벼들었다면 믿어질지언정 인간이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잠시 차를 세우고 까마득한 계방산을 올려다보았다. 저무는 산 높이가 분단의 높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골짜기 아래 이승복 기념관이 지어져있다. 어린 영혼에 대한 위로가 될까, 분단의 비극을 설명하기 위한 시설일 뿐이다. 선애네는 이승복 기념관을 안 보았다고 한다. 날도 저물고 기념관이란 보나 안보나 작위적인 뻔한 모습이니 관람을 생략하자고 일방적으로 합의를 도출하고 그냥 지나쳤다.
속사 삼거리에서 영동고속도로에 올랐다.
그리하여 1박2일의 여행을 ‘가을바람처럼-’ 대체적으로 마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