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성균 수필 연재 - 깃발 2
솔직히 말하지만, 나는 관공서 벽면에 걸려있는 태극기에 대해서는 한번도 경의(敬意)를 느껴 본적이 없다. 대통령의 영정(影幀)과 나란히 걸려있는 국권의 상징인 그 태극기를 보고도 아무런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 다만, 관청의 권위를 고양(高揚)하기 위해서 마땅히 거기에 태극기가 걸려 있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또, 실내에서 행하는 행사 때 애국가에 맞추어 단상의 국기를 향해서 가슴에 손을 얹어 보지만 그 감동 역시 미미했다. 이와 같은 내 마음은 분명히 말하지만 국사범(國事犯)의 범법 동기인 국기에 대한 불경(不敬)은 아니다. 의지 잃고 고착되어 있다든지 처져 있는 태극기에 대한 내 감수성의 감응이 민감치 못하다는 말을 하는 것뿐이다.
나는 벽면에 부착된 국기는 환경정리용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국기는 창공을 향해서 솟은 푯대 끝에 올려져서 나부끼는 깃발일 때 비로소 국민의 마음과 혼연일체가 된다. 깃발일 때의 국기라야 국가의 상징이고, 국권의 의지이고, 국민의 생명이다.
나는 해군 수병 시절, 태극 깃발을 우러러 목메어 거수경례를 해본 소중한 경험을 간직하고 있다. 국기에 대한 내 편집(偏執)은 그래서 생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승조한 함정은 연평도 앞 바다의 ‘오월 오사리 조기잡이’ 어로보호 작전 중이었다.
“삐- 이-.”
함내 마이크에서 휘파람 같은 해군용 호각이 길게 여운을 끌며 울리고 상황이 떨어졌다.
“전승조원은 즉시 항천준비 ‘스테이션 빌’에 배치 붙어-.”
항천준비가 끝났을 때 서서히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수평선에서부터 시커먼 구름이 몰려왔다. 그리고 차가운 초여름비가 바람과 함께 흩뿌리고 바다는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가랑잎 같은 어선들은 조기잡이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 함정은 어선을 연평도 포구 안으로 오리 떼 몰아넣듯 하고 있었다.
“알립니다. 태풍주의보가 발효 되였습니다. 모든 어선은 즉시 연평도 포구 안으로 들어가서 선박을 결박(結縛)하고 태풍에 대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함정은 확성기로 어선들의 피항을 유도하며 해상의 휴전선을 초계항해를 하고 있었다. 이런 악천후에서 소형어선들은 침몰할 위험도 있지만 휴전선 너머로 파도에 떠밀려 갈 우려도 있다. 월경(越境)과 해난사고(海難事故)의 예방을 위해서 우리 함정은 태풍 앞에서도 항해를 멈출 수 없었다. 어둡기 전까지 어선을 대피시키고 밤을 맞았다. 보이지 않는 해상휴전선상에서 적함과 대치했다. 그것은 바로 전투였다. 함수에 부딪친 파도가 비산하며 격류처럼 갑판을 휩쓸었다. 함정은 롤링과 피칭을 하며 잠수함처럼 함수가 바다에 잠겼다 떴다 했다. 바라스트 탱크에 물을 가득 채워서 부력(浮力)을 줄이고 복원력(復元力)을 높인 채, 태풍 속을 항해하고 있었다.
“삐 -- 이 --.”
다시 함교로부터 명령이 떨어졌다.
“전승조원은 태풍항해 ‘스테이션 빌’에 배치 붙어-!”
내 위치는 기관부 수병과 함께 함수 1호 구명보트 담당이다. 비상식량과 구급약을 챙기는 것은 내 담당이고 구명보트를 내릴 준비를 하는 것은 기관부 수병이 할 일이다. 나와 기관부 수병은 2인 1조가 되어 함수를 넘는 해수를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계속 토악질을 하면서 구명보트 옆에 있었다.
물론 우비는 단단히 입고 있었지만 배 멀미로 어지러워서 갑판과 바다가 구분이 되지 않는 황량한 파도뿐이었다.
그래도 밤중이 지나자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기관부 수병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목 수병! 졸지 마. 졸면 바다에 빠져 --- , 정신 차려.”
조금 있다보면 이번에는 기관부 수병이 구명 보트 버팀쇠 사이에 쭈그리고 앉는다.
“이봐, 이 수병. 일어나, 죽고 싶어?”
나는 기관부 수병을 흔들어 깨웠다.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면서 밤을 지새웠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먼동이 터 왔다. 파도도 조금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비가 멎었다. 이제 위급한 사항은 지나간 것 같았다.
“삐 --- 이 ---.”
함내 마이크에서 호각소리가 나더니 함장이 직접 명령을 하달했다. 함장의 목소리도 격앙되어 있었다.
“태풍항해 끝. 모든 승조원은 평상항해 위치로 돌아가라.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한다.”
아침이 되였다. 구름이 몰려가며 하늘이 열리고 햇빛을 서광처럼 바다에 뿌렸다. 성이 차지 않은 듯 바다가 햇살을 받고 찬란하게 날뛰었다.
아침 식사를 마쳤을 때 또 호각소리가 울렸다.
“운항 필수요원을 제외한 모든 승조원은 후갑판에 집합하라.”
항해사와 기관부 주기관 요원을 제외한 함장이하 전승조원이 후갑판에 도열했다. 함교 기함(旗函) 옆에 항해사가 서있었다. 정열을 마치자 부장이 전원 집합을 함장에게 보고했다.
함장이 구령을 붙였다.
“전원 차려엇.”
“국기에 대하여 경례.”
고개를 뒤로 제쳐야 쳐다보이는 마스트 꼭대기에 태극기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기폭 가장자리가 나불나불 찢어져 있었다. 비바람에 얼마나 부대꼈으면 멀쩡하던 기폭이 저 지경으로 찢어졌을까. 태풍에 찢긴 그 태극기의 처연함이 마치 밀고 밀리는 격전의 고지를 마침내 탈환하고 세운 군기(軍旗)의 남루처럼 눈물겨웠다.
함장의 구령에 맞춰서 함교 옆에 서있던 항해사가 마스트의 태풍에 찢긴 그 태극기를 내리고 새 태극기를 계양했다. 태풍에 찢긴 태극기의 하강이 전우를 수장하는 것만치나 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감정이 주체할 수 없는 성욕처럼 발기했다. 마스트에 새로 계양된 태극기는 빠르게 달리는 검은 구름 가득한 하늘을 배경으로 새로 교체된 축구장의 공격수처럼 전의에 몸부림을 쳤다.
함교의 항해사가 국기를 바꾸어 다는 일을 끝냈어도 함장은 ‘바로’소리를 잠시 잊고 거수경례를 계속 하고 있었다. 모든 승조원이 ‘바로’소리를 기다리지 않고 더욱 경직된 자세로 태극기를 향해서 경례를 하고 서있었다. 이윽고 함장의 구령이 떨어졌다.
“바로”
나는 거수경례를 그치고도 태극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후부터 나는 시간만 있으면 후갑판의 함미에 서서 마스트 끝에서 해풍에 펄럭이는 태극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향 생각이나 졸병의 애수 같은 인간적 연민을 삭이고 전의를 고양시켰다.
수평선에 노을이 새빨갛게 물들며 어두워질 때 긴 항적을 하얗게 끌고 가는 것은 엔진이 아니고 마스트 끝에 게양 된 찢어질듯 바람에 나부끼는 저 태극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기는 깃대에 올려져야 한다. 그리고 찢어질 듯한 기개로 펄럭이어야 한다. 그래서 국민으로 하여금 순정의 가슴에 손을 얹는 애국적 분발을 고취시켜 주어야한다.
나는 위정자의 등 뒤에 부착되어 위정자의 위상이나 제고하는 관청의 환경 정리용 국기에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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