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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성균 수필 연재 - 괘종시계

Joyfule 2012. 3. 24. 07:52

    

 

 

목성균 수필 연재 - 괘종시계



시골집에 괘종시계가 하나 있다. 집을 개축하고 집들이를 할 때 오신 어느 손님이 가져온 시계다.
시골집에는 팔십이 훨씬 넘으신 부모님이 살고 계신다. 두 노인에게는 시계가 필요치 않다. 수시로 현재를 확인해 가면서 사실 일이 없다. 아버지는 중풍 드신 거택보호자이시다. 하루 종일 창가에 앉아서 앞산을 바라보시는 것이 일과다. 그 산봉우리 위로 해가 떠서 그 산봉우리에 그늘 지우며 저무는 해시계를 하루 종일 보신다. 산봉우리에 지우는 그늘의 움직임으로 진시(辰時)인지 오시(午時)인지 신시(申時)인지 아신다. 그럼 충분하다. 아버지가 정정하신 농군시절에도 시계는 필요치 않았다. 해가 뜨면 들에 나가고 해가 지면 집에 들어오셨다. 전혀 시계가 필요 없는 한 평생은 하루와 마찬가진데 지루하지 않으셨을까 싶지만 천만에 말씀, 골똘한 평생은 지루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지나가고만 것이다.

어머니는 한평생을 그러셨듯이 아버지와 같이 시간을 보내고 계신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간은 평행선이다. 그렇다고 괘종시계를 사 오신 분은 불필요한 과분(過分)을 하신 것은 아니다. 적적한 시공을 울리는 종소리가 두 노인에게 졸지에 찾아온 손님처럼 반갑게 했다. 어머니는 내가 집에 가면 시계 밥 좀 주라는 게 유일한 당부다. 어머니가 밥을 주면 시계가 안 간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시계 걸림의 수직 상태를 건드려야 가는 시계추기 때문인데 그 걸 모르시는 어머니는 “내 밥은 눈칫밥인지 처먹고는 심청을 부리고 꼼짝을 안 해-. 네가 주는 밥을 먹어야 가더라.” 하신다.

어느 날 시계가 종을 다섯 번 치는 소리에 잠을 깼다. 반투명 유리창이 여명처럼 환해서 날이 새는 줄 알고 열어 보니까 뇌격(雷擊)같이 달빛이 투명유리창을 치고 쏟아져 들어와서 방안에 가득하다. 머리맡에 끌러 놓은 손목시계를 보니까 네 시였다.
괘종시계는 한 시간이나 틀리게 시간을 알려주었다. 분명히 시계방에서 선물을 포장 할 때 시간을 맞추어 놓았을 것이다. 1년 동안에 시계는 둘 중에 하나든지 아니면 둘 다든지 정확한 시간을 위한 자신과의 싸움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물론 두 노인의 무심한 시간관념에 시계가 정확한 시간을 지키려는 자기의지를 허물어뜨린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시계는 변명의 여지없이 실존가치(實存價値)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 분명하다. 한 시계만 그런 건지, 두 시계 다 그런 건지는 표준시간과 대조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아무튼지 두 시계 중에서 하나든지 둘 다든지 분명히 지금까지 힘없는 두 노인을 농락한 것이다. 아무리 기계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노인들이라고 차라리 안 알려 드리느니만 도 못한 무책임한 시간을 알려 드린 게 나를 화나게 한다. 밝은 날 시간을 맞춰 봐서 현저하게 우리 부모님을 농락한 정이 밝혀지면 가차없이 징계 조치할 것이다. 징계의 양형(量刑)의 결정은 그때의 내 감정에 좌우될 것이지만 시계가 적절한 시간에 밥을 주고 기름을 쳐주지 않은 사용자의 관리부족을 들어가면 공정성을 따진다면 말도 안 된다.

아침이 되었다. 텔레비전이 시간을 알릴 때, 두 시계의 시각을 대조해 보니까 내 생각대로 종소리가 맑은 시계의 시각이 비교적 정확했고 종소리가 양철판 치는 것 같은 시계는 순전히 엉터리였다. 종소리가 맑은 시계는 알려진 메이커 제품이고 종소리가 양철판 치는 소리를 낸 시계는 메이커를 알 수 없는 잡표였다. 나는 엉터리 시계를 밟아 부수고 싶은 선병질적 성미가 빨끈했다.
두 시계에 선물한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아서 누가 사 왔는지 알 수 없었다. 대개 <축.입주: 아무개>라고 시계의 글자판 하단에 쓰는 게 상례인데 두 시계에는 그 게 없었다. 아무튼 나는 두 익명의 선물에 대해서 깊이 고개 숙여 정중한 답례를 했을 것이다. 그러면 시간이 잘 맞은 시계를 가져온 분은 합당한 인사를 받은 것이지만 시간이 엉터리인 시계를 가져온 분은 내 인사에서 부당 이득을 취한 것이 된다.
이런 세속적인 논리의 비약을 할 수 있는 나는 얼마나 비천한 인간인가! 내가 불쾌하고 실망스럽다. 나는 또 자신에게 진 참담한 모습으로 서 있다. 오늘 하루 종일 나는 불쾌할 것이고 밤에는 ‘우울의 아버지인 위’의 불편으로 잘 자지 못하고, <잠과 덕>의 함수관계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밤이 될 것이다.

두 시계의 걸린 장소를 바꿨다.
거실에 걸린, 종소리가 맑은 시계는 노인들이 쓰시는 안방에 걸어 놓았다. 시간이야 맞든 안 맞든 상관없다. 밤에 두 분의 잠이 깨었을 때, 어둠을 진중 하게 울린 맑은 시계종소리가 한참동안 방안에 여운을 남기면 된다. 그러면 노인들은 잠결의 흐린 정신을 일깨워 살아 온 날들을 하나씩 어린애 장난감 만져 보듯 하다가 다시 잠드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안방에 걸려 있던 엉터리 시계는 내가 쓰는 건넌방에 걸어 놓았다. 올바르게 시침과 분침을 돌리는지 감시감독을 철저히 하기 위해서다. 그것이 시계를 가져온 분께 잠시나마 실례를 한 보답도 될 것이다.

“변변치 못한 물건입니다만 제 성의이니---.”
그 시계를 들고 와서 그분은 그렇게 인사했을 것이다. 형편이 여의 치 못해서 자신의 마음에도 차지 않는 시계를 가지고 온 게 진심으로 서운한 그 분은 후행(後行)왔다 돌아가는 상객(上客)이 새 색시한테 이르듯이 마음으로 ‘시간 잘 알려 드려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계가 그 마음을 따를 수 없는 지진아(遲進兒)인걸 어쩌랴. 시계를 가져온 분의 마음에 따라 내가 가르쳐 가며 쓸 것이다 별로 어렵지도 않은 일이다. 자주 틀린 시간을 바로잡아 주고 때맞추어 태엽을 감아주면 된다.

시계를 가져 온 분이 내 친구라면, 어느 날 내 방에 놀러 왔다가 시계의 정확성을 보고 마치 못난 조카딸을 시집에 떼어놓고 갔던 상객처럼 시집살이를 잘하고 있는 조카딸을 보고 기뻐하듯,
“미거(未擧)한 것을 사람 만드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런 얼굴일 때, 나는 실로 쾌활해져서 마음이 떨리도록 크게 웃을 수 있는 실존(實存))의 기쁨에 그 밤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