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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이 이끄는 삶 - 9. 하나님을 미소 짓게 하는 것

Joyfule 2006. 12. 8. 01:46

  
목적이 이끄는 삶 - 9. 하나님을 미소 짓게 하는 것  
“하나님이 너희를 향해 미소짓기를 원하노라”(민6:25,NLT). 
“당신의 종인 나에게 미소를 지어주십시오. 
바르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주십시오”(시 119:135, Msg) 
하나님을 미소짓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표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이 우리 인생의 첫번째 목적이기 때문에 , 우리가 수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 또한 그 목적을 당성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5:10). 다행히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예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의 이름은 노아다. 
노아의 때에 온 세상은 도덕적으로 파탄 상태였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기쁨이 아닌 자신의 기쁨을 추구했다. 하나님은 당신을 기쁘게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진 사람을 단 산 사람도 찾을 수 없었고,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시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인류를 창조한 것을 후회하시게까지 했다. 하나님은 안간에게 너무나 실망하셔서 모두 멸망시키겠다고 생각하셨다. 
그때 하나님은 자신을 미소짓게 만드는 한 사람을 발견하셨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노아는 주님께 기쁨이었다”(창6:8,LB).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이 친구가 나에게 기쁨을 주는군. 나를 이렇게 미소짓게 한단 마이야. 그의 가족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 노아가 하나님께 기쁨을 드렸기 때문에 지금 당신과 내가 살아 있는 것이다. 노아의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미소짓게 할 수 있는 다섯 가지 예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가장 사랑할 때 미소지으신다 
노아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했다. 더 나아가서 노아는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때도 구분을 사랑했다. 성경은 노아가 살아 있는 동안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6:9)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가장 보고 싶어하시는 모습이 바로 관계다.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진실은 우리의 창조주가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서 만드셨고, 우리가 그 사랑을 그분에게 되돌려주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너의 제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너의 사랑을 원한다. 나는 너의 재물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나를 더 알기를 원한다”(호6:6,LB).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작고 계시는 열정을 느낄 수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깊이 사랑하시고 우리가 또한 하나님을 사알하기를 원하신다. 그러기에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원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우리 삶의 가장 큰 목적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 어떤 것도 이보다 중요할 수 없다. 예수님은 그것을 가장 중요하고 큰 계명이라 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마22:37~38)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온전히 신뢰할 때 미소지으신다 
노아가 하나님을 가쁘시게 한 두번째 이유는 그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했다는 것이다. 이해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을 신뢰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를 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순종해서 그의 가족을 구원할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세상이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하나님과 의의 관계를 맺은 사람이 되었습니다”(히11:7,쉬운성경). 
이 장면을 한번 상상해보라. 어느 날 하나님이 노아에게 오셔서 말씀하신다. “나는 인간들에게 실망했단다. 이 세상에 나를 생각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구나, 하지만 노아야, 내가 너를 바라볼 때 나는 미소를 짓는다. 너의 삶을 기뻐하기 때문에 나는 세상에 홍수를 내릴 것이지만, 너의 가족을 중심으로 새롭게 시작하려고 한다. 나는 너와 동물들을 구할 수 있는 커다란 배를 네가 만들기 원한다.” 노아가 의심할 수도 있었을 세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노아는 비를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홍수가 오기 전에 이 땅의 모든 물은 하나님이 지면에 샘을 터트려서 주셨기 때문이다(창25:6). 그래서 그들은 무지개를 본 적도 없었다. 
둘째로 노아는 가장 가까운 바다에서부터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 그가 배를 만드는 법을 배운다 하더라도 그 배를 어떻게 물가로 옮길 수 있겠는가? 세번째는 모든 동물을 모으고 돌봐야 했다. 하지만 노아는 불평하거나 핑계를 대지 않았다. 대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는데,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삶에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는 믿음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시고, 문제에 부딪혔을 때 도와주시며, 불가능한 일을 해결해주시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보냈을 것이다. 해가 거듭되어도 비가 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을 한다고 믿는 미친 사람’ 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나는 노아의 자녀들도 앞마당에서 모양을 갖추어가고 있는 커다란 배 때문에 창피해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노아는 계속 하나님을 신뢰했다. 
우리 삶의 영역 가운데 어떤 부분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때 부모가 기뻐하듯, 하나님도 우리의 믿음에 기뻐하신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히11:6)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을 다해 순종할 때 미소지으신다 
전세계를 뒤덮은 홍수에서 동물들을 구해내는 것은 운송 방법과 그 외의 구체적인 사안들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이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처방해주시는 대로 이루어져야 했다. 하나님은 “노아야, 네가 원하는 대로 아무 배나 지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방주에 실을 동물 각각의 수뿐 아니라 방주의 크기, 모양 그리고 재료까지 세세하게 지시하셨다. 성경에 나타난 노아의 반응은 이러하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창6:22,참고-히11:7). 
노아가 모든 것에 순종했고(단 하나의 지시 사항도 간과하지 않았다)그리고 정확하게 순종한 것을(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과 시간에 맞춰)보라. 이것이 온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노아를 보시며 기뻐하신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큰 배를 지으라고 명하셨다면, 울는 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반대를 하며 조건을 달지 않았겠는가? 노아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했다. 진심어린 순종이란 하나님이 명하신 것에 조건을 달지 않고 지체 없이 무엇이든 행하는 것이다. 미루지 않아야 한다. “기도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망설임 없이 바로 행한다. 나중에 하겠다는 말이 사실은 하지 않겠다는 뜻임을 모든 부모는 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설명을 하시거나 명하신 것에 대한 이유를 말해줄 필요가 없으시다. 이해는 나중에 하더라도 우선 순종해야 한다. 즉각적인 순종은 평생 성경에 대해 토론하고 공부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르쳐줄 것이다. 사실, 먼저 순종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명령도 있다. 순종은 이해의 열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 부분적인 순종을 하려고 한다. 우리는 순종하기 좋은 명령들을 취사 선택하고 싶어진다. 좋아하는 명령만으로 목록을 만들어 그것들만 순종하고, 부당하고, 어려우며, 비용이 많이 들고, 혹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 수 없는 명령들은 간과한다. 교회에는 가겠지만 십일조는 내지 않겠다. 성경은 읽긴 하겠지만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용서하지 않겠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적인 순종은 불순종이다. 
진심으로 하는 순종은 기쁜 마음으로 열심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라”(시100:2,LB).이것이 다윗의 자세였다. “주님, 제게 무엇을 해야 할지 말씀해주십시오. 그대로 하겠습니다. 제가 사는 동안 진심으로 당신께 순종하겠습니다”(시119:33,:B). 
야고보는 이미 크리스천이 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믿는 것뿐 아니라 하는 행동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갹2:24,CEV).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명확하게 말씀하신다. 우리의 노력이 아닌 은혜로만 가능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순종을 통해 기쁨을 드릴 수 있다. 모든 순종의 모습은 또한 예배의 모습이다. 왜 순종이 그토록 하나님을 기쁘시게 만들까? 왜냐하면 이를 통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 
하나님은 우리가 계속해서 당신을 찬양하고 감사 드릴 때 미소 지으신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을 받고 감사의 인사를 받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은 없다. 하나님도 이를 좋아하신다. 우리가 경의와 감사를 표할 때 그분은 미소지으신다. 
노아는 찬양과 감사의 마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 세상의 그 누구도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을 때 노아는 하나님께 예배드렸고, 홍수에서 살아남은 이후 그가 가장 먼저 한 행동 또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감사드린 것이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노아가 여화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창8:20)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는 더 이상 노아처럼 동물로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 
대신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히13:15)와 ‘감사의 제사’(시116:17)를 드리라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다. 이것이 예배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찬양하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에 대해 감사한다. 다윗은 찬양했다.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시69:30~31).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릴 때 놀라운 일들이 벌어진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면 우리의 마음도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된다. 
어머니는 나를 위해 요리해주는 것을 좋아하셨다. 내가 케이(Kay)와 결혼했을 때에도 우리가 부모님 댁에 방문하면 어머니는 아주 기가 막힌 요리를 손수 만들어주시곤 하셨다. 어머니의 커다란 기쁨 가운데 하나가 자녀들이 어머니가 준비한 음식을 먹고 즐거워하는 것을 보시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만든 음식을 먹는 것을 즐거워하면 할수록 어머니는 더 기뻐하셨다. 
그뿐 아니라 우리도 음식을 먹으며 즐거움을 표현하여 어머니를 기쁘게 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모두가 기뻐할 수 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극찬을 하고 어머니에게 찬사를 보냈다. 나는 음식을 즐길 뿐 아니라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했다. 모두에게 기쁨이었다. 
예배도 역시 이와 같은 상호 작용을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해주신 것들에 기뻐하고 우리가 그 즐거움을 하나님께 표현할 때 하나님 또한 기뻐하신다. 그리고 이는 우리에게 더 큰 기쁨을 준다. 시편은 이렇게 말한다.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하나님은 우리가 능력을 사용할 때 미소지으신다 
홍수 이후에 하나님은 노아에게 다음과 같은 간단한 지시를 내리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창9:1~3).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이제 네가 평상시와 같이 살 때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부터 내가 인간에게 부여한 일들을 수행하여라. 배우자와 사랑을 나누어라. 아이를 낳아라. 가정을 꾸려라. 곡식을 심고 그것을 먹어라. 인간의 방식으로 살아라. 나는 너희들을 이렇게 만들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교회에 가며, 기도하고,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영적인” 활동을 할 때에만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며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삶의 다른 부분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일을 하든, 놀든, 쉬든,혹은 먹든 우리 삶의 모든 구체적인 부분을 바라보며 기뻐하신다. 우리의 움직임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으신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서 사람의 갈 길을 정하시고 삶의 모든 부분에 대해 기뻐하신다”(시37:23,NLT). 
죄를 제외하고서, 사람이 하는 모든 활동이 찬양의 자세를 가지고 행해질 때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접시를 닦고, 기계를 수리하며, 물건을 팔고, 컴퓨터 프로그램을 작성하며, 곡식을 키우고, 또한 가정을 꾸릴 수 있다. 자식을 자랑스러워하는 부모처럼 하나님도 당신이 주신 재능과 능력을 발휘하는 우리의 모습에 특히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일부러 우리 각자에게 다른 능력을 주셨다. 어떤 사람은 운동을 잘하도록, 또 어떤 사람은 분석적이게 만드셨다. 우리는 기계, 수학, 음악 또는 그 외의 수천 가지 기술에 대한 능력을 받았을 수 있다. 이 모든 능력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각 사람을 다르게 만드셨고 우리가 지금 하는 모든 일을 보고 계신다”(시33:15, Msg). 우리의 능력을 숨기거나 다른 사람처럼 되기 위해 노력할 때는 하나님께 영광이나 기쁨을 드릴 수 없다. 
우리의 모습으로 있을 때만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다. 우리 모습의 어떤 부분을 거부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는 것이다. “너는 너의 창조주와 논쟁할 권리가 없다. 너는 토기장이가 빚어놓은 옹기에 지나지 않는다. 진흙은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나요’라고 질문하지 않는다”(사45:9,CEV). 
영화 <불의 전차(Chariots of Fire)>에서 올림픽 육상 선수 에릭 리들(Eric Liddell)은 말했다.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분은 또한 나를 빠르게 달리는 사람으로 만드셨고, 나는 달릴 때 하나님의 기쁨을 느낀다.” 후에 그는 “뛰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세속적인 능력은 없다. 단지 능력을 오용할 뿐이다.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능력을 발휘해보라. 
하나님은 또한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들을 즐기는 것을 보며 기뻐하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시각, 소리 와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청각, 모든 즐거움의 행위는 하나님께 감사드릴 때 예배의 모습이 된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우리의 즐거움을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주신다”(딤전6:17,TEV). 
하나님은 우리가 잠자는 것을 보면서도 기뻐하신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나는 아이들이 자는 것을 보며 기뻐했다. 가끔은 아이들이 문제만 일으키고 말도 잘 듣지 않던 날들도 있었지만, 일단 잠이 들면 아이들은 만족스러워 보였고, 안전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그리고 나는 내가 얼마나 우리 아이들을 사랑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나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 무엇을 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아이들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숨쉬는 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아이들은 작은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나는 미소를 지었고, 때로는 기쁨으로 눈물이 고이기도 했다. 우리가 자고 있을 대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리를 바라보신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마치 우리가 이세상의 유일한 사람인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신다. 
부모는 자녀들로 인해 기쁨을 누리려고 그들이 완벽하거나 성숙하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부모는 자녀들이 자라가는 성숙의 순간순간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성숙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해가는 모든 단계를 사랑하시고 모든 단계를 기뻐하신다. 
절대로 만족시킬 수 없었던 선생님이나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여기지 말라. 그분은 우리가 완벽하거나 죄 없는 사람이 될 수 없음을 아신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103:14).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우리 마음의 태도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욕구인가? 이것이 바울의 삶의 목표였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5:9). 
우리가 영생의 빛 가운데 살기 시작할 때 과거에 “어떻게 하면 좀더 나 자신을 위해 재미있게 살 수 있을까?”라고 질문하던 것이 이제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더 많은 기쁨을 드릴 수 있을 것인가?”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21세기에 노아와 같이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살 의지가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 예배하는 삶만이 현명하고 양식 있는 삶의 방식이다. 다른 모든 삶의 방식은 어리석은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주님은 누가 현명하고 누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길 원하는지 보시기 위해 항상 하늘에서 모든 인류를 내려다보고 계신다”(시142,LB).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을 것인가? 이 목표에 온전히 열중해 있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이 해주시지 않는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