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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이 이끄는 삶 - 18 삶을 함께 경험하기.

Joyfule 2006. 12. 17. 02:47


목적이 이끄는 삶 - 18 삶을 함께 경험하기.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골3:15)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133:1).
삶은 공유하도록 되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함께 삶을 경험하기를 바라신다. 성경은 이러한 공유된 경험을 교제(fellowship)라고 부른다. 하지만 오늘날 이 단어는 그 성경적인 의미를 거의 상실했다. 교제는 이제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함께 어울리며, 음식을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다. “이 시간 이후에 교제의 시간이 있습니다. 남아 주세요”라는 말은 “다과가 있으니 기다려 주세요”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진정한 교제는 예배에 참석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교제는 함께 삶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것에는 이기적이지 않은 사랑, 진실한 나눔, 실제적인 섬김과 희생적으로 서로에게 베풀고 서로에게 위로를 주는 것을 포함한, 신약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서로’에 대한 명령들이 포함된다.
교제에 있어서 그 크기는 매우 중요하다. 작을수록 좋다. 큰 무리와 함께 예배를 드릴 수는 있지만 교제는 할 수 없다. 그룹의 크기가 커져 열명 이상 되면 사람들이 참여하지 않기 시작하고, 소수의 사람들이 주도하기 시작한다.
예수님은 소수의 제자들을 두고 사역하셨다. 예수님은 더 많은 사람들을 선택하실 수도 있었지만, 모두 참여할 수 있는 소그룹은 열두 명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아셨다.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의 몸처럼 여러 작은 세포들의 집합체다. 우리의 몸과 그리스도의 몸의 생명은 그 세포에 담겨 있기 때문에 모든 크리스천들은 교회 내의 여러 소그룹에 참여해야 한다. 가정에서 모이는 소그룹도 있고, 주일학교 모임도 있으며, 성경공부 모임도 있다. 큰 모임이 아닌 바로 이러한 소르룹에서 진정한 공통체가 형성된다. 교회를 배라고 생각한다면 소그룹은 배에 붙어 있는 구명 보트다.
하나님은 소그릅으로 모이는 크리스천들에게 엄청난 약속을 하셨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하지만 불행하게도 소그룹에 속했다고 해서 꼭 진정한 공동체를 경험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주일학교 모임이나 성경공부 모임들이 외면에 치중하게 있기 때문에 진정한 교제를 경험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 진정한 교제와 그렇지 못한 교제의 차이는 무엇일까?
진정한 교제에서는 사람들이 진실함을 기대한다
진정한 교제는 피상적이고 표면적인 상호 작용이 아니다. 진실하면 대로는 아주 깊은 나눔이다. 그것은 사람들 이자신의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진실하게 이야기할 때만 가능해진다. 그들은 상처를 나누고, 감정을 표현하며, 실패를 고백하고, 의심을 보이며, 두려움을 시인하고, 약점을 깨달으며, 기도를 부탁한다. 
이러한 진실함을 어떤 교회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진실하고 인간적인 분위기 대신 가식적인 모습을 보이고, 본래의 모습을 숨기며, 자기 방어를 하고, 가식적인 친절을 베풀지만 맡은 대화를 나눈다. 사람들은 가면을 쓰고 경계하면서, 그들의 삶이 모두 장미빛인 것처럼 행동한다. 이러한 태도는 진정한 교제를 해치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할 때만이 우리는 진정한 교제를 경험할 수 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저가 ??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1:7~8). 이 세상은 친밀함이 어둠 속에서 생겨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상처, 잘못, 두려움, 실패 그리고 실수들을 숨기기 위해 어둠을 사용한다. 하지만 빛 가운데서 우리는 그 모든 것을 개방하고 우리가 진정 어떤 사람인지 받아들이게 된다. 
물론 진실해지는 것은 위험한 일이고, 용기가 필요하며, 겸손해야 할 수 있다. 노출, 거부 그리도 또 다시 상처 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에 직면하는 것이다. 누가 이런 위험을 감수하겠는가?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약5:16). 우리는 오직 위험을 감수함으로써 성장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어려운 일은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솔직해지는 것이다.
진정한 교제를 통해 사람들은 상호 의존한다
상호 의존은 주고 받는 것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로에게 의지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몸을 디자인하신 방법은 우리가 교회로서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한 모델이 된다. 모든 부분은 다른 부분들에게 의존한다”(고전12:25, Msg). 상호 의존은 교제의 핵심이다. 상호 의존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책임을 나누며, 서로를 돕는 것이다. 바울은 “나는 우리가 믿음으로 서로를 돕기 원한다. 너희의 믿음은 나를 도울 것이고 나의 믿음은 너희를 도울 것이다”(롬1:12, NCV).라고 말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 우리와 함께 걸어가고, 우리를 격려해주면 믿음을 계속 이어갈 수 있다,. 성경은 상호 간의 책임, 격려, 섬김 그리고 존경에 대한 명령을 담고 있다(롬12:10). 신약에는 ‘서로에게’, 또는 ‘서로를 위해’ 살라고 명령하는 표현이 50번 이상 등장한다. 성경은 말한다.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롬14:19).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책임져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에게 노력해야 하는 책임은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통해 그들을 돕기 원하신다.
진정한 교제를 통해 사람들은 공감한다
공감하는 것은 충고를 하거나, 빠르고 표면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다. 공감한다는 것은 고통에 함께 참여하고 그 고통을 나누는 것이다. 공감한다는 것은 고통에 함께 참여하고 그 고통을 나누는 것이다. 공감하는 것은 “나는 네가 겪고 있는 것을 안다. 네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은 이상한 것도 아니고 잘못된 생각도 아니다”라는 것을 말해준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감정 이입이라 부른다. 하지만 성경적인 단어는 공감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골3:12).
공감을 통해서 두 가지 근본적인 필요를 채울 수 있다. 즉 이해받고, 감정의 정당성을 확인받는 것이다. 우리가 상대방의 감정을 확인해주고 이해해줄 때마다 우리는 교제를 쌓아 간다. 문제는 우리가 때때로 너무 급하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공감할 시간을 못 갖는다는 것이다. 또는 스스로의 상처에 너무 묶여 있다. 자기 연민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공감을 메마르게 한다.
교제에는 여러 단계가 있고 각 단계는 각각 다른 시기에 적용된다. 가장 기초적인 단계는 나눔의 교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공부하는 교제다. 더 깊은 단계는 섬김의 교제이고, 이것은 우리가 선교 여행이나 봉사활동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가장 깊고 친밀한 단계는 함께 고통을 나누는 교제인데(빌3:10, 히10:33~34). 이것은 서로의 고통과 슬픔에 참여하고 짐을 함께 짊어지는 것이다. 이 단계를 이해하는 크리스천들이 바로 믿음으로 인해 처형당하고 멸시당하며 순교하는 사람들이다, 성경은 이렇게 명령한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 우리가 서로에게 가장 필요한 때는 바로 심각한 위기, 깊은 슬픔 그리고 의심의 상황을 지날 때다. 상황이 악화되어 우리의 믿음이 무너지려고 하는 바로 그때에 믿음의 친구를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런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 필요하고, 우리를 이끌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멀게 느껴질 때에도 소그룹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이 실제로 존재하고 가시적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욥이 고통받고 있을 때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래서 욥은 “고통당하는 친구를 동정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이야”(욥6:14, 쉬운성경)라고 절규했다.
진정한 교제를 통해 사람들은 자비를 경험한다
교제는 은혜의 장소이고, 이곳에서는 우리의 실수가 드러나지 않고 덮어진다. 교제는 자비가 정의보다 강할 때 일어난다.
우리는 모두 자비가 필요하다. 이는 우리 모두가 흔들리고 넘어지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 위해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고 서로에게서 그것을 받을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고후2:7).
용서 없이는 교제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하신다. “서로에게 악의를 품지 말아라”(골3:13, LB). 이것은 괴로움과 분노가 교제를 핵심부터 파괴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불완전한 죄인들이기 때문에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면 때로는 의식적으로, 그리고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3:13).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보여주신 자비의 모습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동기가 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 이상의 용서는 요구하지 않으신다. 누군가 우리에게 상처를 줄 때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나의 에너지를 복수하는 데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해결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 이 두 가지를 모두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신뢰와 용서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비를 베푸는 것을 주저한다. 용서는 과거를 잊는 것이다. 신뢰는 미래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용서는 상대방이 그것을 구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바로 해야 하는 것이고, 신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누군가가 우리에게 계속적으로 상처를 준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가 바로 용서하기를 바라시지만, 그들을 바로 신뢰할 것을 기대하지는 않으신다. 또한 그들이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상처를 주도록 내버려두는 것도 원하지 않으신다. 그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신뢰를 다시 쌓기에 가장 좋은 곳은 격려와 믿음을 보여주는 소그룹 안에서다. 진정한 교제에 헌신되어 있는 소그룹에 속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유익이 많다. 
그것은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의 일부다. 2 천년 이상 동안 크리스천들은 교제를 위해 정기적으로 소그룹으로 모여왔다. 만일 이런 모임에 속해보지 않았다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잘 모를 것이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다른 믿는 사람들과 이러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을 살펴볼 것이다. 하지만 이번 장을 통해 진정한 교제가 주는 진실함, 상호 의존, 공감 그리고 자비를 갈구하게 되었기를 바란다. 우리는 공동체를 위해 창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