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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고난과 기독교 여성 - 4) 근우회 - 일반 여성들과의 연합활동 1.

Joyfule 2007. 3. 8. 00:48

4) 근우회 - 일반 여성들과의 연합활동

1920년대에 들어와서의 사회주의,기독교계 여성단체 활동은 각기 나름대로의 운동 경험을 쌓게 하였다. 이념이 현실에 적용될 때의 시행착오,그로 인한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론의 재정립 등에 대한 요구가 생겨났다.

 

사회주의 측에서는 기본적으로는 여성노동자 이외의 넓은 층에서 운동의 주체와 대상을 찾아야 하는 일,기독교측에서는 예리한 이론의 재정립이 등이 요구되었다.

 

첨예화된 이념 때문에 대중여성들에게 확산되는데 장애가 있었던 사회주의와 계몽주의의 활동으로 조직 확산이 보다 용이했던 기독교는 서로에게 모자라는 점을 보충하고 서로에게 발전의 계기를 주기 위해서, 더 나아가서는 식민지 조선에 필요하고 적합한 여성해방 이론과 운동의 정립을 위해서 이 두 파의 통합이 필요 불가결했던 것이다. 근우회와 창립에 즈음하여 [조선일보]가 실은 사설(1927.5.26 [조선사상 통신사]에 재수록)은 근우회 창립의 동기를 설명해 준다.즉

"점진적 개량주의적인 과도기형태를 거쳐 나아가야만 하고 또 그와같이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것도 승인해야만 한다. 오늘날 조선인 여성들이 거듭 부딛쳐 온 모든 정치적, 사회적 조건은 가장 급진적인 투쟁을 요구하면서도 점진적인 상식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을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 분야의 책임있는 선구자라면 그 실생활의 귀중한 체험에 의해 누구라도 수긍할 것이다."137)

 

라고 쓰고 있다. 즉 여성 동우회를 비롯한 사회주의계 여성단체는 어려운 여건에서 사회주의 사상에만 급급하여 조선사회의 실상에 입각한 활동을 전개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여성대중과도 유리된 방향에서 급진적이었기 때문에 계몽활동으로 시종해 온 기독여자청년히에 비해 이론적으로 우월함에도 불구하고 조직적 기반은 훨씬 열세였다. 합법단체로서의 근우회의 전선확대를 위해서는 사회주의계 세력이 전술적으로 기독교 여자청년회와 제휴하는 것은 불가피하였고 또한 기독교계 여성의 측에서 사회주의 이론은 일본 제국주의를 거부하기 위한 전략적 수단이었다.138) 이렇게 하여 근우회는 1927년 5월 27일에 종로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창립대회를 가졌다.

 

근우회 강령으로는 "조선 여자의 공고한 단결을 도모함""조선 여자의 지위향상을 도모함"이 채택되었다. 또한 근우회 집행위원회에서는 행동 강령을

 

1.여성에 대한 사회적 법률적 일체의 차별 철폐
2.일체의 봉건적 인습과 미신타파
3.조혼 폐지 및 결혼의 자유
4.인신매매 및 공장 폐지
5.농촌부인의 경제적 이익 옹호
6.부인 노동의 임금차별 및 산전산후의 임금지불
7.부인 및 소년공의 위험노동 및 야업 폐지를 행동강령으로 내세웠다.139)

 

이러한 행동강령을 통ㄹ하여 얻는 것은 여성 자신의 해방만이 아님을 근우회 선언에서 분명히 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해방을 위하여 분투하는 것은 동시에 조선사회 전체를 위하여 나아가서는 세계 인류전체를 위하여 분투하게 되는 행동이 되지 아니하면 안된다."140)

 

중앙에서 근우회가 창설되자 지방에서도 점차 이에 호응하여 여자 청년회를 근간으로 하는 여성조직이 중심이 되어 근우회의 지회조직이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1928년 4월까지 지회 40개소 회원 2,000여명,즉 제1회 대회(1928.7)까지 40개 지회를 가지게 되었다.141)

 

근우회는 1928년 5월 서울에서 제1차 전국대회를 개최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이 대회는 일경 당국이 사전에 동대회의 토의사항을 제출시키고 내용이 불온한다는 이유로 금지를 시켰다. 이 토의사항에는 반전결의,민족운동에 관한 결의,노동여성대중과 학생문제를 중심으로 한 조직문제에 관한 결의,전여성을 대상으로 한 선전사업에 관한 결의 등이 들어 있었다.142)

 

근우회 본부는 그해 7월 14일에 의한 토의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대회를 열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다. 따라서 대회의 의안은 교양문제, 지방연결 문제 등 사무적인 문제에 제한되었다. 그러자 근우회 동경 지회가 근우회 간부의 타협적 자세를 비난하고 나섰다.

 

제1회 대회가 열리자마자 본부와 동경지회는 심하게 대립되었고 이때 기독교계에 여성들이 이 대회를 계기로 이탈되었다. 그러나 이 대립은 근우회의 운동전술이 분명하게 이론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즉 동경지회는 일제의 간섭을 무시하고 투쟁하는 근우회를 구상했고 본부는 합법단체로서 보다 많은 여성을 근우회 주변으로 결집시키는 것을 당면 과제로 삼았기 때문이었다.143) 제1회 대회 이후에도 계속해서 지회확장운동은 전개되었다. 물론 지회 설치에 대한 거부의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근우회는 함경도, 경상도,전라도를 시초로 하여 각지에 지회 설치를 계속하여 갔다. 그리고 창립 2년 후 근우회는 그 이론적인 성과로서 [근우]지를 내놓을 수가 있었다.144)

 

기관지[근우]에서 취급되고 있는 문제는 다방면에 걸쳐 있고 기고자 또한 다채롭지만 이 단계에서는 김활란과 함께 강령,규약,취지서의 작성에 참가했던 황신덕,이현경의 이름을 보이지 않고 배성룡,이성환,허정숙,박호진 등이 보인다. 이들이 한 이론적 작업은 근우회 내부의 개량주의적 경향을 경계하며 여성문제는 계몽운동이 아니라 사회변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으며 구체적으로 노동여성으로 눈을 돌리면서도 봉건적 가족제도에서 신음하는 가정부인 문제에서 조선 여성의 특수성의 실체를 발견했다.145)

 

이리하여 근우회는 통합된 이론적 성과와 지회 확장에 기초하여 제2회 대회를

1929년 7월에 개최하였고 그 대회에서 강령을 다음과 같이 수정하였다.

一.조선 여성의 역사적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공고한 단결과 의식적 훈련을 기한다.

一.조선 여성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전체적 이익의 옹호를 기한다.

그와 더불어 행동 강령도 수정했는데 수정된 행동강령은 다음과 같다.

一.교육의 성별 차별철폐 및 여자의 보통교육 확장
二.여성에 대한 봉건적 사회적 법률적 일체차별의 철폐
三.일체봉건의 인습과 미신타파
四.조혼폐지 및 결혼 이혼의 자유
五.인신매매 및 공창폐지
六.농민부인의 경제적 이익의 홍호
七.부인노동자의 임금차별철폐 및 산전산후 그 주간의 휴양과 임금지불
八.부인 및 소년노동자의 위험노동 및 야간작업폐지
九.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

 

근우회 제2회 전국대회에서는 중앙집횡위원장에 정칠성을,중앙집행 위원으로는 우봉운,정종명,박호진,허정숙 등을 선출하여, 이들을 핵심으로 하는 강력한 좌파 진영의 회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146)

 

이를 기반으로 하여서 도시부, 특히 지식인 여성에게만 머물렀던 종래의 근우회 활동에 대하여 그 대상을 확대하고 또한 구체적인 문제에 접근하려는 반성이 내부로부터 일어나면서 부산과 광주의 여공의 노동쟁의의 조사(동아일보 1929.8.28),여학생의 동맹휴교의 지원(경성일고보 맹휴의 조사:동아 1927.11.3 중앙고보교 맹휴사건의 조사 ;동아 1927.11.3 ,1928.4 경성여자상업학교 맹휴에 근우회의 관여 등)이 이루어졌고 한편으로는 농촌부에 침투하기 위한 전국적인 야학의 개설 결의(동아일보.1929.9.2)도연합회 또는 사회지회하의 분회반 조직의 준비(동아.1929.9.25),노동부의 설치(동아,1929.8.6) 등이 이루어졌다.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