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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고난과 기독교 여성 - 4) 근우회 - 일반 여성들과의 연합활동 2.

Joyfule 2007. 3. 9. 01:20

4) 근우회 - 일반 여성들과의 연합활동

 

1929년 제2차 대회 이후,해체될 때가지 근우회는 그 당시의 서울에서 있었던 여학생 시위 사건을 지도하였고 이 사건에 의해 정종명,박호진,정칠성,한신광,허정숙,백덕수,박차정,류덕회 등이 검거되고 허정숙과 박차정이 기소되었다. 이에 근우회는 일제로부터 보다 심한 탄압을 받게되었고 당초 4월로 예정되었던 대회를 개최하지 못한 채 12월에 확대집행위원회를 열게 되었다.

 

이 확대집행위원회에서는 근우회의 과거의 운동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는 "종래의 근우운동은 계급투쟁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보여졌기 때문에 준열한 탄압을 받았고 보는바와 같은 사건의 자취를 남겼는데, 이제부터는 민족단일의 여성운동으로서 운동의 방향을 규정하고 또한 운동의 수준을 낮춰 계몽활동에 매진해야 한다" 고 논하는 주장이 강하게 대두되었다.148)

 

확대집행위원회에서 실제로 결의한 것은 문맹퇴치와 미신,인습의 타파를 목적으로 하는 농촌부인 강좌와 야학을 적극적으로 진척시키고 노동부를 삭제하는 것,과거의 근우회 운동은 식자계급의 독점운동과 같은 면이 있었으므로 이제는 일반 농촌부인과 가정부인을 중심으로 한 운동을 전개하자는 것 등이다.149)

 

1930년의 확대집행위원회에서는 기독여자 청년회계가 주도권을 잡게 되어 신임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평양지회의 조신성이,중앙집행위원회에는 황애덕 등이 선출되었다. 조신성이란 인물은 그 당시 여성으로서 독립운동에 있어서나 단체운동에 있어서 열렬히 활동을 한 자이다.

 

그녀는 서기 1867년 10월 3일 평북 의주에서 출생하여 독훈장을 모시고 한문을 공부하다가 출가하였으나 19세에 과부가 됨으로 기독교 신자가 되어 미국 선교사들과 전도사업에 힘쓰다가 그들의 주선으로 일본 시모노세끼에 있는 매광 고등여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이화학당 교사로 취임하여 교편을 잡았고 기숙사 임시 사감을 겸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조신성은 평양 진명여학교를 맡아 경영하게 되었다. 그녀는 학교 경영을 위해서 솜을 두면 겨울 옷이 되고 솜을 빼면 춘추복이 되는 회색 산동주 단벌치마 저고기를 부지런히 빨아 입으며 날마다 저녁식사를 끝나면 뾰족구두를 신은 채 바구니를 들고 나가서 돌을 주워담아 머리로 여다가 모아가지고 학교담을 둘러 쌓았다고 한다. 진명여학교는 경영난으로 결국 문을 닫게 되었고 계몽운동에 전념하였다.

1921년 그녀는 신민회의 여성지도자로 활약하다가 치안유지법 등 다섯 가지 죄목에 걸려 평양감옥에서 6개월 복역을 하는 동안 다른 사건이 탄로되어 만기 출옥이 되던 날 감옥문 밖에 한번 나서 보지도 못하고 다시 1년 2개월의 형기를 치르게 되었다.

 

그녀는 그후 단체활동도 열심히 하여서 근우회 평양지부 결성에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솔선하여 발기인 모집에 나섰고 총회 당일에는 개회사를 통하여 "'노세 노세 젋어 노세 늙어지면 못노느니라'가 글쎄 무업니까? 우리나라를 요꼬라지로 만들어 놓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일하세 일하세 젊어서 일하세 늙기 전에 빨리 일하세'라는 정신과 노력으로 우리 민족이 합심해서 나가야 소원이 성취됩니다. "150) 라고 열변을 토하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그녀는 민족주의적 계몽가의 성향을 갖고 일한 운동가였다. 그녀가 중앙집행 위원장으로 선출된 때부터 근우회의 종래의 운동방향,즉 여성해방운동을 계급해방 및 민족해방과 병행해서 하려던 시도는 일제의 탄압을 견딜 수 없게 되었고, 이렇게 되자 체제 하려던 시도는 일제의 탄압을 견딜 수 없게 되었고,이렇게 되자 체제 내에서 여권 운동을 하자고 주장하는 파가 근우회의 주류를 점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회주의계 여성들은 "현 근우회는 그 조직체와 기본방침으로는 특수한 투쟁을 전개할 수 없고" "노동부인 문제의 전적인 해결을 가져올 수 없다"하여 차차 지회단위에서 해체를 결의하게 되었다.151)

1920년대 말의 시대적 상황에 의하여 모든 운동이 "분산에서 통합으로""자연생장적에서 목적의식적으로!"라는 표어하에서 152) 일어나던 때 창립된 근우회는 1930년대의 시대적 상황과 그에 따라 달라진 운동론에 의하여 해체되었다. 그러나 근우회의 해체가 정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근우회의 해체를 신간회의 해체에 따른 비주체적 해체라고, 더 나아가서 근우회의 존재 자체를 비자립적이라고 규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1차 대회의 토의사항에서 볼 수 있듯이 근우회는 신간회와의 관계를 상당히 주체적으로 규정짓고 있다. 즉 "신간회는 조선민족운동의 현 단계에 대응하는 각급 계층의 협동전선당이기 때문에 근우회는 신간회와 직접 관계를 급속히 맺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 근우회는 조선여성의 최고기관으로서 신간회에 다네적으로 가입하지 않으면 안된다.그런데 근우회가 단체적으로 가입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1) 근우회의 독립성을 상실하지 않을 것.(2) 비판의 자유를 가질 것이다.153)

 

이와 같은 것을 볼 때, 신간회, 근우회에 해체는 더 이상 합법단체로서의 운동이 도저히 불가능하게 되어버린 상황에서의 결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근우회와 마찬가지로 신간회도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해체되었다.

즉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간회는 온건화되어 갔다. 예를 들면 그 대표자인 김병로는 "종래 신간회의 운동이 쓸데없이 관헌과 항쟁 대립하여 그 억압을 받게되어 하등 조선 민족을 위하여 공헌하는 것이 없음을 거울삼아 스스로 반성하는 것 같고 그 후에 발생한 [전북일보]의 조선인 모욕사건, 함남 단천에서의 경찰관 발포 사건등 상당히 사회에 반향을 일으킨 중요 사건에 대해서는 스스로 그 지방으로 출장을 가서 비교적 냉정한 태도로 사실을 조사 발표하고 사건의 해결에 지장을 초래할 만한 언동을 피하고 본부 및 각지 지회에 대해서도 경거망동을 경계하는 듯한 방침으로 이에 임한다"154) 고 하였다는 것이다.

 

20년대 후반에 이르러 비타협주의가 동요됨을 인지한 사회주의자들은 신간회를 단념하고 적극적으로 해체하기로 결정한다. 신간회의 경우 이들이 지방지회의 대부분의 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5월 15-16일 전국 대회에서는 해체파가 선수를 써서 해체의 결정을 내리게 되고 그 결정에 따라 해채 분산되어버렸다.155)

그러나 근우회는 해체 당시 해체파가 선수를 쓰지 못했기 때문에 지회 단위에서부터 해체가 시작된 것이다. 연합전선이 해체된 이후 사회주의 계열은 노동자와 농민에게 완전히 주도권을 넘겨줌으로 대중적 폭력투쟁,적색노동조합운동 앙양의 시기로 옮겨갔고, 기독교계 민족주의 계열은 농촌에 눈을 돌려 농촌 여성의 계몽을 통하여 여성의 주체적 역량을 축적하고 여성운동의 명맥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근우회를 함께 하면서 사회주의 여성진영과 기독교 여성진영간의 뿌리깊은 적대감은 더욱 심화되었다. 기독교 여성들이 주종을 이룬 민족주의 진영은 좌익 여성들로 "괜히 트집잡아 싸움만 해대는"사람들로 인식하였고 반대로 좌익파 여성은 기독교 여성들을 문제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뿐만 아니라 체제유지를 돕는사람들로 생각하게 되었다.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