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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채찍기념교회

Joyfule 2006. 6. 28. 16:30

 

키프러스섬 바울의 채찍교회


키프러스섬 파포스, 바보 바울채찍기념교회, 성 바울의 기둥

 


바울 채찍기념교회

 


파포스 전경

 


파포스 로마 요새

 


왕들의 무덤

 


왕들의 무덤

 


원형경기장

 

 

 

 

싸이프러스 파포스(바보) 바울 채찍기념교회


북키프로스의 서쪽에 있는 바보는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1차 전도여행 중 살라미를 떠나 도착한 항구도시이다. 오늘날 파포스(Paphos)로 불리는 이곳을 바울과 바나바는 터키의 실루기아에서 배를 타고 살라미로 온 것과는 달리 섬 중앙을 통해 육지로 이곳에 왔다(행 13:4∼6). 바보는 한때 구브로섬의 수도였던 성읍으로 이 섬의 남서부 연안 평원에 위치해 있다. 바보는 구바보와 신바보로 구분되는데 바나바와 바울이 선교차 방문한 곳은 신바보이다. 이곳은 주전 55년 로마의 수중에 들어간 이후 이 섬의 수도가 되었고 로마 총독의 주재지였으며 바울은 총독 서기오 바울에게 복음을 전했다(행 13:6∼12). 그런데 이를 방해하려던 바예수는 바울에게 질타를 받아 얼마 동안 소경이 되리라는 선언에 따라 그가 장님이 되자 큰 감명을 받은 서기오 바울은 더욱 바울의 전도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항구에는 주차장 시설이 잘돼 있었고 작은 돛단배들이 항구에 가득 정박해 있었다. 항구의 바로 북쪽에는 중세 때의 성채가 항구를 방어하듯 서 있었다. 2000여년전 사도 바울은 40에 하나 감한 매를 맞는 고통을 겪은 후에도 전도여행을 포기하지 않고 이곳 바보 항구에서 배를 타고 오늘날 터키 남부에 있는 버가로 전도여행을 계속했다. 바울이 채찍이 맞았다는 바울채찍교회는 항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 교회는 영국 성공회에서 바울이 채찍에 맞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교회이다. 교회 앞에는 300년께 세워진 교회터가 발굴되어 있었고 그 교회 유적 옆에는 ‘성 바울의 기둥’이란 푯말이 그리스어와 영어로 새겨져 있는 대리석 기둥이 놓여져 있다. 바로 바울이 40에 하나 감한 매를 맞기 위해 묶였던 기둥이다. 고린도 후서 11장 24절에는 바울이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그 매를 맞은 장소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이곳 바보에 있는 바울이 채찍에 맞은 것을 기념하는 기념교회와 바울이 묶였다는 대리석 기둥은 그 중의 한곳임을 증거하고 있다. 교회 오른쪽으로 얼마 되지 않는 곳에 카타콤이 있다. 비록 작은 규모이기는 하나 초기 기독교의 박해와 순교사에 등장했던 카타콤이다. 해안가에는 왕들의 무덤이 있다. 왕들의 무덤은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께 조성된 것들로 바위를 파서 만든 것이다. 무덤벽에는 20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색이 변하지 않은 벽화가 남아 있다.

 

이란수사(다니엘의 묘)


이란 수산궁 터

 


수산 다니엘의 묘

 

 

수산

 

수산(수사)은 이란 남서쪽에 있는 아와즈에서 북북서쪽으로 117㎞쯤 떨어져 있다. 페르시아(성경에는 바사)의 수도였던 수산은 오늘날 수스(Shush)라고 불리운다. 수산은 선사시대에서 페르시아 제국에 이르기까지 이란 문명의 정치적 경제적 중심이었던 도시이다. 특히 이곳은 사르디스(성경의 사데)와 엑바타나(성경의 악메다), 페르세폴리스로 가는 길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고고학적 연구 결과 수산은 5000여년 이상이나 되는 역사적 도시임이 밝혀졌다. 이 지역에는 기원전 4000년경부터 엘람 민족이 거주하여 신석기 문화를 이룩하였고 아케메니아인들의 지배 기간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리고 기원전 324년에는 알렉산더 대왕의 신하와 병사들 1만명이 이 지역의 처녀들과 집단결혼을 한 역사도 지니고 있다. 이후 수산조 왕조의 사푸르 2세(309∼379년)는 기독교인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수산을 파괴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후에 에란샤르 사푸르라는 이름으로 재건되었으며 아랍에 다시 점령된 이후부터는 점차 쇠퇴하여 오늘날에는 중소도시 규모를 갖고 있다. 수산궁터는 시내 외귱 산 언덕 위에 있었고  19세기말 프랑스 고고학자에 의해 수산궁터가 발굴 되었다. 한쪽으로는 수산 성터가 텔(언덕) 형태로 자리잡고 있고 다른 한쪽으로는 수산궁터가 있다. 수산궁터의 모습은 건축물의 기초 흔적만 남아 있고 북쪽 끝에 돌로 된 쌍사자 석상만이 홀로 궁터를 지키듯 서 있다. 성경에서 수산은 느헤미야 1장 1절과 다니엘 8장 2절에 한번씩 소개되었고 에스더서에는 여러 번 기록돼 있다(1:2,5:2,9:6). 아하수에로왕 시대에 수산궁은 화려와 사치가 극에 달하였다. 다리오(다리우스) 대왕 때의 비문에서 수산궁의 건축에 언급된 부분을 보면 레바논과 간다라에서 많은 재물을 가져왔으며 사르디스와 박트리아에서는 금, 코라스미아에서 터키옥을 가져왔다. 또 은은 이집트, 벽 장식품들은 이오니아, 상아는 에티오피아에서 가져왔고 돌기둥은 엘람에서 가져왔다. 그리고 각국에서 기능공(목수 석수 벽돌공 세공인 등)이 징발되어 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사치와 화려함이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알 수 있다. 에스더 당시 페르시아의 수도인 이곳 수산궁에서 아하수에로는 즉위식을 갖고 3년째에 모든 방백과 신복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에 1:1∼3). 다니엘은 벨사살왕 3년에 엘람의 수도인 수산성에 있었으나 숫양과 숫염소의 이상을 본 것은 을래강변이었다(단 8:1∼2).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즉위 20년 기슬르월에 수산궁에서 예루살렘성이 훼파되고 성문이 불탔다는 소식을 듣고 슬피 울며 금식하며 기도한 후(느 1:1∼40) 왕의 허락를 받아 위험하지만 빠른 길을 선택해 예루살렘으로 들어왔다. 수산궁터에서 아래 마을 사우르 강둑의 동쪽에 다니엘의 묘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 이 묘는 이슬람 시아파 교도들에게 중요한 참배처가 되고 있었다.  천으로 덮여 있는 다니엘의 석관은 일종의 가묘이나 다니엘의 묘는 9∼18세기까지 아랍인 작가들에 의해 자주 언급됐다. 1164∼73년 사이 이란을 여행했던 투델라의 벤야민(Benjamin)에 의하면 셀주크 왕조의 산야르(Sanjar 1117∼1157) 도시에 살던 두 지역 주민들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다니엘의 관을 유리관에 넣어 그 도시 중앙에 있는 강의 다리에 매달아두도록 했다고 전한다. 수산은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와 살던 곳 중의 하나로 다니엘과 느헤미야, 에스더의 사건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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