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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글 / 최윤정

Joyfule 2015. 10. 21. 22:29

 

 

베이글 / 최윤정

 

      베이글 빵

 

 빵을 굽는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게 되는 가을에는 가슴 한편에 동그란 구멍이 생긴 듯 바람이 드나들어 자꾸만 마음이 허전해진다. 그리운 사람이 없다면 그럴만한 사람을 일부러라도 찾게 되는 이런 계절에는 담백한 맛의 베이글이 제격이다.

 

 베이글은 약 2,000년 전부터 유대인들이 만들어온 빵이라고 한다. 말을 탈 때 발을 디디는 등자를 본뜬 모양으로 도넛처럼 동그란 링 모양을 하고 있다. 오래전 비를 피하려 들어간 카페에서 사이드 메뉴로 나온 이 빵을 처음 맛보았었다. 입맛을 사로잡는 단맛이나 현란한 치장도 없었다. 심심한 맛과 질긴 식감이 처음엔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그 뒤로 가끔 그 빵이 먹고 싶어지는 날이 있곤 했다.

 

 밑이 둥근 볼에 빵을 만들 재료들을 넣고 섞는 동안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밀가루와 이스트, 약간의 설탕과 소금이 전부인 베이글의 간단한 재료들처럼 그 의중을 파악하려 고심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부모님의 농사일을 돕느라 어쩔 수 없이 그은 피부는 건강하고 소박해 보였고, 어쩌다 마주친 그의 눈동자에는 흔들리는 내 얼굴이 담겨있는 것 같아 오래 바라볼 수 없었다. 그를 마주할 때면 내 가슴속에선 늘 바람이 일렁였다.

 

 반죽을 치대면서 그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내 손에서 둥글어졌다 뭉개지는 반죽처럼, 그의 얼굴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제대로 무언갈 해 본 적도 없는 사이니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스무 살, 성숙한 사랑을 하기엔 너무 어렸던 나이, 우리는 서로의 마음 언저리만 맴돌다 제풀에 지쳐버렸다.

 

 한 시간 동안 치댄 반죽은 이제 한 덩이가 되어 볼과 내 손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발효할 때가 된 것이다. 말랑말랑한 반죽을 여섯 등분으로 나눠 팬에 놓는다. 이때 나중에 부풀 것을 예상해 미리 적당한 거리를 두고 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부푼 반죽끼리 들러붙어 망치게 된다. 반죽을 놓은 팬을 담요로 덮어 온도를 맞춰놓고 기다린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도 그러한 것일까? 마음속에서 무언가 부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처음부터 너무 가까이 마주하게 되는 사이가 있다.

 

 1차 발효가 끝난 반죽을 밀대로 민다. 납작해진 반죽을 둥글려 기다란 기둥처럼 만든 다음 양 끝을 서로 이어붙여 준다. 고리 모양이 된 반죽은 다시 팬에 올려 2차 발효를 해야 한다. 밀대로 밀어 성형을 하는 동안 뭉개진 글루텐 때문에 2차 발효를 하지 않으면 빵이 딱딱해져 버리기 때문이다. 다시 담요를 덮은 반죽 여섯 개는 한 번 더 속살을 올리기 위해 어두운 침묵의 시간을 보낸다. 사람 사이에서도 서로 누르고 몰아가는 경우가 있다. 내가 다치지 않으려 남을 상처 입히기도 한다. 그 사람과 나는 서로에게 시간을 주지 못했다. 단단하게 굳은 마음을 서로 부딪쳐 봤자 감정만 조각나 바스러질 뿐 나아지지 않았다. 담요를 살짝 들춰 보니 반죽이 다시 조금씩 부풀어 오르고 있다. 괜히 반죽을 손가락으로 꾹 눌러본다.

 

 냄비에 물을 올린다. 설탕도 한 스푼 넣는다. 물이 끓어오르면 발효를 마친 반죽을 데쳐내야 한다. 설탕물에 한 번 데친 반죽을 구우면 윤기나는 갈색을 띠게 된다. 데쳐낸 반죽이 오븐에 들어간다. 빵이 구워지는 동안 오븐의 온기와 빵이 익어가는 구수한 냄새가 집 안 구석구석으로 번져나갈 것이다. 그도 한때 내 하루를 온전히 채웠던 사람이었다. 내 안에 가득했던 그 사람의 온기와 냄새는 내 일생도 그 사람으로 채워질 거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오븐을 열어 윗면이 노랗게 익어가는 베이글을 한 번 뒤집어 놓는다. 그래야 두 면이 모두 보기 좋은 색깔로 익는데 이때를 놓치면 태우기 십상이다. 볼품없어지는 것이다. 사람도 빵도, 세상의 모든 것에는 적당한 때가 있다. 나는 너무 한 사람만으로 가득했고 아무도 나를 뒤집어주지 않아 그만 새까맣게 타 버렸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적당한 거리와 온도, 시간을 생각하며 오븐의 문을 다시 닫는다.

 

 오래전, 내가 처음 만들었던 빵을 잊지 못한다. 제빵을 제대로 배우지도 않은 채 어느 요리책에서 오려놓은 요리법대로 만든 빵이었다. 반죽하는 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도, 발효하는 데 적당한 온도가 있는지도 모르고 자신만만하게 주물러 구웠던 그 빵은 돌덩이처럼 딱딱해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그 뒤로 빵을 구울 때마다 맨 처음의 그 빵을 떠올린다. 반죽하는 손목의 아픔도, 더디게 흐르는 발효의 시간도 아이의 속살처럼 말랑하고 따뜻할 빵을 상상하면 충분히 견딜수 있다. 처음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던 그에게 나는 얼마나 자신만만했던가. 이제는 사람을 만날 때 무모하게 다가가기보다는 서로 생각하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그런 향기를 낼 수 있는 관계를 나는 꿈 꾼다.

 

 20분으로 맞춰놓은 오븐의 타이머가 울릴 때까지 커피 한 잔을 마시기로 한다. 커피잔을 들고 베란다로 나가보니 창밖에는 가을비가 내리고 있다. 오븐에서 나오는 온기와 향기가 창밖을 새어나가 비에 젖어든다. 유리창으로 전해지는 밖의 차가운 기운 때문인지 마음이 스산해져 커피를 마신다. 오래전 내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실 때마다 베이글을 뜯어 입으로 가져다주던 마디 굵은 손가락이 떠올랐다. 투박한 손이 떼어주던 빵은 씹을수록 쫄깃하고 고소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주는 대로 넙죽 받아먹었다. 비바람에 날리는 낙엽들이 골목길을 쓸고 지나간다. 내 마음에도 바람이 불어 기억의 조각들이 가슴을 쓸어내린다.

 

 빈 커피잔이 식어갈 때쯤 타이머가 요란하게 울린다. 창밖에서 비를 맞으며 낙엽을 밟고 있던 내 마음이 황급히 돌아와 나를 추스른다. 심호흡을 하고 오븐을 열자 맛깔스러운 구릿빛 베이글 여섯 개가 나를 바라본다. 조금 있으면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다. 아이는 집에 오자마자 갓 구워낸 베이글처럼 동글동글한 얼굴로 내게 달려들 것이다. 아이가 집 안 가득한 냄새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아가야, 이것은 그리움을 구운 냄새란다.’ 라고 속으로만 조용히 말할 것이다. 예전의 누군가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아이의 입에 빵을 뜯어 넣어준다. 아이는 오물오물 받아먹으며 내게 웃어줄 것이다. 추억의 맛과 향기는 베이글처럼 이리도 담담하게 다가오는 것인가. 나는 오늘 그리움 한 조각을 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