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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를 생각하다 - 정성화

Joyfule 2015. 10. 24. 09:59

 

 팔자타령.~

팔자를 생각하다 - 정성화

 

 

 가져가야 할 짐들을 거실 가득히 늘어놓은 채, 남편은 가방에 짐을 챙겨 넣고 있다. 그가 짐 싸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가 다시 떠난다는 게 실감난다. 가방의 지퍼가 고장 났는지 닫히지 않는다고 남편이 말한다. 그를 붙잡고 싶은 내 마음이 염력念力을 부린 듯하다.

 

 남편은 파도치는 바다로 고생하러 가면서도 아내의 눈치를 본다. 뭘 사다주면 좋겠느냐고 자꾸 묻는다. 대답 대신 고개를 흔드는데 눈물이 또 주책을 부린다.

 

 냉장고 문을 열고 낮에 사온 고등어를 꺼낸다. 마음이 허둥댈 때는 무슨 일이라도 하고 있는 게 낫다. 고등어 배를 갈라 내장을 훑어내고 소금을 치면서, 내 속에도 누가 이렇게 소금을 쳐주었으면 좋겠다 싶다. 속이 상하지 않게 한 움큼 뿌려주었으면.

 

 그가 떠난 지 일주일 쯤 될 무렵이 가장 견디기 힘들다. 그리움에 대한 항체가 생기려고 그러는지. 거실 한쪽에 앉아있던 햇살 몇 줄기도 이 공간의 적요寂寥를 견디기 힘든지 엉덩이를 뒤로 빼며 슬금슬금 빠져나간다. 한 나절이 지나도록 오는 이 하나 없고 걸려오는 전화 한 통 없는 날이면, 주방문을 열었을 때 간장병이라도 하나쯤 넘어져 있기를 바라게 된다.

 

 해질 무렵이 더 쓸쓸하다. 누구나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며 맞이하는 시간이라서 그럴까. 나도 다른 아내들처럼 저녁상을 마주하고 앉아 남편에게 이것 맛있지요 저것도 맛있지요 하며, 생선살을 발라주며, 그렇게 오순도순 살아가고 싶다.

 

 이승에서의 삶이 전생前生의 업을 갚기 위한 것이라면, 나의 전생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마도 나는 전생에 나의 배우자를 무척 기다리게 했던 모양이다. 남자였더라면, 변장을 지키느라고 일 년에 서너 번밖에 고향에 갈 수 없는 병졸이었든지, 아니면 우국충정으로 만주벌판을 헤매고 다닌 독립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팔자(8)는 뒤집어도 같은 모양이며,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처음 출발한 점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사람의 팔자 또한 뒤집어도 뒤집히지 않으며, 벗어나 보려고 애를 써도 벗어날 수 없는 게 아닐까.

 

 팔자(8)는 옆으로 누여보면 ∞ 모양이 되어 편안해 보인다. 그런데 ∞는 수학에서 무한대를 의미하는 기호다. 나의 팔자를 모로 뉘여서 행여 지금의 외로운 팔자가 무한히 이어지게 될까봐 얼른 세워놓는다. 숫자 8을 보고 있으면, 길게 눕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앉아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다. 그렇게 느끼는 것도 아마 나의 쓸쓸한 때문일 것이다.

 

 편안하고 아늑하며 외롭지 않은 자리일 수는 없었을까. 그러나 철저하게 외롭다는 느낌이 들 때 나는 오히려 신神의 눈길을 느낀다. 시험지를 내주고는 뒷짐을 진 채 나의 등 뒤에서 꽤 오래 머물러 있는 신이다. 그래서였을까. 내 삶의 시험지 칸을 적당히 메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았다. 무엇인가 더 채워 넣어야한다는 생각이 봄풀처럼 돋아났다.

 

 내 속을 뚫고 삐죽이 튀어나오는 외로움과 아픔을 벼려줄 그 무엇이 있었으면 싶었다. 내 삶의 모서리를 공글려줄 그 무엇, 수필은 내게 그런 의미로 다가왔다. 수수하면서도 단아해 보이고 온순하면서도 심지心地가 강한 여인, 반듯한 이마를 가진 어느 조선 여인 같은 이미지로, 수필에 귀를 대고 있으면 등을 토닥여 주는 소리가, 마음을 씻어주는 소리가, 그리고 흐트러진 마음을 내려치는 죽비소리가 들려올 것 같았다.

 

 어느 만화가는 자신의 그림이 두고두고 가까이 지내고 싶은 사람들과 닮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의 글도 그랬으면 좋겠다. 떠올리기만 해도 그냥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 볼 때마다 또 다른 나를 보는 듯이 느껴지는 사람, 손 흔들며 헤어질 때는 비질비질 눈물이 날 것 같은 사람과 닮았으면 좋겠다. 내게 있어 글쓰기란 쓸쓸함에서 벗어나는 탈출구가 아니라, 넘어져 있는 간장병을 세워주는 것에서 시작되고 부박한 삶들을 껴안는 게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가슴속에다 그리움으로 빚은 콩나물시루를 하나 안쳐두었다. 그 시루 위로 하루에도 몇 번씩 물을 붓는다. 때로는 조급한 마음이 일어 한꺼번에 몇 바가지씩 퍼붓기도 한다. 어떤 콩 알갱이는 눈을 뜨고 내다보는데 어떤 것은 야속하게 기척도 없다. 또 어떤 것은 순하게 싹을 내는데 어떤 것은 잔발만 무성하다.

 

 나는 기다린다. 내 가슴속 콩나물시루에 소복하게 콩나물이 자라 오르기를. 그래서 어느 날 한 움큼 솎아낸 콩나물이 내 삶의 아름다운 시가 되고 수필이 되기를.

 

 아, 기다림으로 이어가는 나의 팔자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