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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심리학 (Analytical Psychology) - 2. 칼 구스타프 융의 생애와 사상

Joyfule 2015. 9. 5. 01:26

 

 

 

분석심리학 (Analytical Psychology)  

 

2. 칼 구스타프 융의 생애와 사상


“나의 생애는 무의식이 그 자신을 실현한 역사이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사건이 되고 밖의 현상으로 나타나며, 인격 또한 그 무의식적인 여 조건에 근거하여 발전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게 된다.”

칼 구스타프 융(1875-1961)

프로이트는 한때 융을 정신분석학파의 후계자로 지명했으며, 그를 자신의 뒤를 이를“황태자(crown prince)"로까지 지칭하기도 했다. 그러나 1914년 프로이트와 결별하면서 융는 분석심리학(analytical psychology)분야를 개척하였다. 87세까지 살았음, 1914 융은 분석심리학을 개척


융(Jung)의 생애

융은 스위스 북부지역 라인폭포(Rhine Falls)로 유명한 작은 마을(콘스탄스호반의 케스빌)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아동기는 외롭고, 불행했다고 한다(여동생 하나를 둔 장남 외아들/혼자 다락방에서 난쟁이인형과 놀이).혼자놀는 일들을 하였다.

스위스 개혁파 목사였던 그의 부친은 변덕스럽고 짜증을 잘 내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모친은 정서장애와 우울증을 겪고 있었고, 가끔 특이한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평상시에는 행복한 주부의 모습을 보이다가 갑자기 “마녀”가 된 것처럼 조리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리곤 했다(외조부도 목사였고, 주일설교를 준비할 때 자신의 딸(융의 모친)을 자신의 뒤에 앉혀두곤 했는데 그 이유는 설교를 준비할 때 자신의 딸을 통해 사탄의 방해를 막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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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불행했던 부모의 결혼생활을 보고 성장한 융은 점차 외부세계에 대한 흥미를 잃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융은 자신의 관심을 외부세계가 아닌 내부세계에 돌려 자신의 꿈, 비전 및 공상의 세계에 두게 되었다. 이성과 합리성으로 이루어진 의부세계가 아닌 꿈과 무의식으로 이루어진 내용들이 그의 어린 시절 이후 전체 삶을 이끌게 되었다

 

(나무, 돌, 동물 호수 등으로 이루어진 자연에 대한 애착과 죽음에 대한 익숙함 - 주위에 것들을 사랑하고 있었다. 라인강부변에 살았기 때문에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목격하였다. 무의식과 내면 죽음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졌다. 발작으로 수업에 어려움을 당했다. 신경증 심리성이 원인이 일어났다. 발작이 치유하게 되었다. 융이 좋아했던 과목부친 외에도 8명의 숙부 목사/ 죽을 뻔 했던 2번의 경험/ 학교생활과 발작 - 신경증의미에 대한 이해/라틴어,(유럽쪽의 한자, 표의문자) 자연과학, 역사학, 고고학, 비교종교학, 철학 등 다분야에 관심(철학의 쇼펜하우어 - 고통, 혼란, 열정, 악에 대한 관심/종교적 견해에 대한 아버지와의 갈등 - “믿어라 그리고 신앙을 가져라”) -> 24세 크라프트 에빙의 정신의학교과서를 읽고. 심리학과 정신의학을 선택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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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의 중요한 결정과 선택의 시기마다 융은 자신의 꿈을 통해 무의식이 자신에게 전해주는 메시지에 근거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가 대학에 진학할 무렵, 자신이 무슨 전공을 택할 것인가에 대해 결정내려야 할 때도 자신의 꿈을 참고하였다. 당시 꿈의 내용은 그가 선사시대에 묻힌 동물의 뼈를 발굴하는 있는 모습이었다. 당시 그는 이 꿈의 내용을 자신이 아마 자연과학분야를 전공하라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이 꿈뿐만 아니라 3살 무렵 그가 지하동굴 속에 있는 꿈을 꾼 적이 있는데, 이 두 가지 꿈은 그가 장차 인간의 성격 - 특히, 인간의 성격분야 중에서도 표면 아래 있는 무의식적 힘 - 을 연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시하고 있었다. (중요한 결정은 무의식에 맞겨라)

 

1900년 융은 바젤대학교 의과대학(자신의 조부가 의과대학 교수로 재직한 적이 있음)에서 학위를 받았다. 그는 정신의학에 관심을 갖고 첫 직장을 쮜리히의 부르크휘?리 정신병원에 잡았다. 당시 그 병원장은 정신분열증연구로 저명했던 오이겐 블로일러(Eugen Bleuler)였다. 1905년 융은 그 대학 정신과에서 강사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몇 년 뒤 그는 자신의 수련, 연구 및 저술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그만 두었다(컴플렉스와 단어연상검사).

 

융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융은 이 책을 “명저(masterpiece)"- 지혜의 샘으로 표현”을 읽은 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명작, 지혜의 샘이다라고 평했다.꿈으로 프로이트와 만나게 되었다.(cf. 프로이트와 브로이어(Breuer)의 히스테리연구). 1906년 이 두 학자는 서로 연락이 되었고, 이듬해인 1907년 융이 프로이트를 만나기 위해 비엔나로 가면서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첫 만남에서 그 두 사람은 무려 13시간 동안 열정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비록 첫 만남은 극적으로 이루어졌으나, 그들의 만남은 1909년 융과 프로이트가 함께 미국 클라크대학교에서 특강할 때까지만 이어졌다(cf. ‘꿈’- 프로이트와 융의 만남과 헤어짐). 꿈으로 말미암아 헤어지게 되었다. 중세의 말과 통로를 가운데는 깊은 웅덩이가 있었다. 정신분석훈련을 받게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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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프로이트를 처음 만날 무렵 융은 이미 사회적으로 높은 직업적 명성을 갖고 있었다. 그는 정신분석학수립 초기에 정신분석학으로 전향한 학자들 중 가장 저명한 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마 융은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프로이트이론의 초기 추종자들 - 이들 대부분은 학생이거나, 직업경험이 전무한 사람들이었다 - 에 비해 정신분석이론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안나오의 히스테리

그래서 융은 비록 프로이트의 제자가 되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정신분석학이론을 맹신하지 않았다. 물론 만남의 초기에는 프로이트와의 친분을 고려해서 정신분석학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후 융이“무의식의 심리학(The Psychology of the Unconscious)(1912) - "리비도의 변환과 상징”)을 저술하면서 그 저서 속에서 정신분석학과는 다른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것이 혹시 프로이트와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았까 하는 우려를 갖고 있었고, 이런 우려와 혼란으로 인해 두 달 동안 그 책을 집필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저서를 출간했을 때 결국 그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프로이트는 정치적이고 권위주의 였다.

 

1911년 프로이트의 강력한 지지에 의해 비엔나학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융은 국제정신분석학회 초대회장이 되었다. 프로이트는 유태인이 학회장을 맡게 되면 당시 유럽에 확산되어 있언 반유태주의가 자신의 정신분석운동에 방해될 것이라고 믿었다. 유태인들로 주로 이루어진 비엔나학파 회원들은 프로이트의 총애를 받아 학회장이 된 융을 공개적으로 시기하고 질투했다. 그들은 텃세를 부렸고, 융이 반유태주의적 태도를 지니고 있을 것이라고 억측하기도 했다.

 

융이 학회장이 된 후 프로이트와 점차 멀어지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융은 자신의 이론에 있어 성적 본능의 중요성을 감소시켰다. 아울러 1912년에 쓴 그의 저서에서 융은 리비도(libido)를 다른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 해 포드햄대학교에서 강연할 당시 이제 두 사람은 공동연구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1914년 융이 학회장직을 퇴임하면서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단절하고 3년동안 심각한 혼란을 경험,

 

1913년 융이 38세가 되었을 때, 프로이트가 중년기에 경험했던 것처럼, 3년 동안 심각한 정신적 혼란을 경험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미쳐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면서 어떤 연구나 강의활동도 할 수 없었고 심지어 전공분야의 책조차 읽을 수가 없었다(그러나 흥미로운 사실은 이 무렵에도 그는 자신의 환자들을 계속 치료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융은 이런 자신의 정서적 혼란과 동요를 프로이트가 해결했던 방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해결했는데, 그 방법은 바로 자신의 무의식을 직면하는 것이었다. 비록 그가 자신의 꿈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처럼 논리적으로 분석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꿈과 공상이 보여주는 내면의 무의식적 충동에 귀를 기울이고 따라갔다.

프로이트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융의 이런 큰 정서적 위기는 마침내 그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무한한 창조성의 에너지를 자극했고, 이는 결국 성격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접근인 분석심리학을 체계적으로 수립하도록 이끌었다(3년 동안의 혼란기을 지나고 나온 “심리유형론”). 융은 모래놀이와 벽돌쌓기 놀이를 즐겼다.

 

인간의 삶에 있어 신화(myth)가 지닌 가치에 큰 흥미를 느낀 융은 1920년대 아프리카, 남미의 뉴멕시코 등으로 여행을 떠났고, 그곳에서 문맹의 원주민들이 지닌 정신과정과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에 대해 연구하였다(그 밖에 하인이리 치머(Heinrich Zimmer), 리하르트 빌헬름(Richard Wilhelm)과의 만남을 통한 동양의 종교와 신화에 대한 관심 - 禪佛敎의 冥想, 티벳불교 死者의 書/周易(易經)/老子의 道德經 및 도교의 太乙金花宗旨나 慧命經/ 카비르 등 - 신비주의자가 아닌 과학적 심리학자로서 접근 - 심리적 현실(psychological reality)).동양문화에서 모방한 것이 아니라 동양사상의 명상에 관심, 적극적 심상, 선불교에서 가지고 옴, 죽음의 세계,

 

생애 말련 1922년 쮜리히 볼링겐 호숫가의 쿠스나흐트에 집을 짓고 살면서, 1932년 그는 쮜리히에 있는 스위스연방 공과대학 교수가 되었고, 1942년 건강악화로 인해 그 곳을 사임하였다. 1944년 바젤대학교는 그를 의학심리학연구소 소장으로 임명하였지만, 이 또한 건강악화로 인해 1년 이상 지속할 수 없었다. 그 이후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주로 연구와 저술활동에 전념하면서 다양한 저서를 출간하였다. 그는 하버드대학교와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수여받았고, 그의 저작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면서 다양한 사람들의 관심과 존경을 받게 되었다.

“인간 존재의 유일한 목적은 단순한 존재의 암흑 속에서 한 가닥 등불을 밝히는 것이다.”

(융이 석공과 벽돌쌓는 기술을 배워 지은 볼링겐 호숫가의 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