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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융(Carl G. Jung, 1875∼1961) - 분석적 심리치료

Joyfule 2015. 9. 8. 09:07

 

 

 

칼 융(Carl G. Jung, 1875∼1961) - 분석적 심리치료

 

 

칼 융(Carl G. Jung, 1875∼1961)이 38세이던 1913년, 그는 자신이 점점 미쳐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 3년 동안 그는 끊임없는 내적 압박감 속에서 외로이, "완전히 허공 중에 방향을 잃고 떠 있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남에게 자칫 오해받을까 두려워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그대로 짊어지고 있었다.

그 당시 융은 큰 개인병원을 개업하여 아내와 가족을 거느리고 쮜리히대학의 강사직까지 맡아 안정되고 존경받는 정신과 의사로서 겉보기에는 개인적으로나 직업적인 면에서나 충분히 보장받는 생활을 했다. 바로 몇 개월 전에 프로이드와의 정서적ㅗ직업적 유대관계가 깨어졌는데(그것은 두 사람에게 모두 어려운 사건이었다), 그 불화가 융의 문제들을 유발하게 한 유일한 원인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어떤 이유에선가 그는 자신의 삶에 의미와 열정이 결여되어 있다고 느꼈다. 지적(知的) 활동이 멈추어 아무 것도 쓸 수 없었고 과학서적도 읽을 수 없었다. 자신의 지적ㅗ정서적 상황이 극심히 혼란되고 불안한 상태에선 도저히 가르칠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는 강사직을 사퇴함으로써 대학교수직을 포기했다.

융은 현실세계와의 접촉을 잃을 위험성을 느꼈으나 다행히도 그의 환자와 가족의 요구 덕분에 정상생활과 충분히 접촉하며 생활은 해나갈 수 있었으나 물론 아주 힘든 노릇이었다.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가를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인식시켰다. "나는 스위스의 한 대학에서 의학 학위를 취득했고, 내게 치료받으러 오는 환자들을 돌보아야 하며, 내게는 아내와 다섯 아이들이 있고, 나는 쿠스나흐트(Kusnacht)의 제스트라세(Seestrasse) 228번가에 사는데-이러한 것들이 내게 요구되는 활동이며 내가 실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거듭 증명하는 것이니, 나는 영혼의 바람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빈 장(blank page)은 아니다."

이 혼란기에 융은 자신의 혼란의 원인이었을지도 모를 어떤 사건을 인지해내려는 희망 속에서 자신의 삶, 특히 어린시절을 차근차근 검토해 보기 시작했다. 두 번이나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았으나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문제를 지적(知的)인 수준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자신에게 떠오르는 것은 무엇이든 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신을 무의식의 충동에 맡겨버렸는데 그 과정은 후에 무의식과의 대결(confrontation with the unconscious)로서 형성화되었다.

그의 무의식이 유도한 첫 번째 일은 작은 돌로 모형마을을 짓기, 즉 유년시절 벽돌 쌓기를 즐겨 하던 시기를 재현해 보는 것이었다. "이런 것들 속엔 아직도 삶이 있구나." 돌을 구하러 다니면서 그는 생각했다. "그 어린 소년시절의 자신이 아직도 주위에 서성이고 있다." 융은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이 놀이에 열중하면서 이 새로운 활동에 사로잡혀 있었다. 처음엔 치욕적인 것 같아 저항감이 들었다. 도대체 어린시절에 하던 이 놀이 외에는 그에게 할 일이 없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후에 "이 순간이 자신의 운명에 하나의 전환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돌로 장난감 마을을 짓는다는 것은 융의 무의식과의 대결에 있어 시초에 불과했다. 이 활동에 의해 환상(fantasy)과 꿈(dream)들이 풀려났고, 융은 그 후 수년간 적극적으로 열심히 그 환상과 꿈들을 추적해 갔다.

과연 그 대결은 효과가 있었다. 이런 지속적인 무의식으로의 노정(路程)으로부터 융은 자기 생(生)의 새로운 의미와 구심점을 형성하게 되고 인간의 성격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하게 되었다. 그의 저술들을 볼 때 이 경험이 매우 중요했다는 데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밖으로 드러난 그의 무의식은 마치 "용암의 유출과 같아 그 화열(火熱)은 내 삶을 새로이 만들었다. 내 자신의 내면적 영상(inner image)들을 추구하고 있던 그 몇 해는 내 일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 영상들 속에 모든 본질적인 것이 결정되어 있었다." 당연히 융의 심리적 건강(psychological health)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강렬한 개인적 경험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융은 오랜 동안 꿈과 환상이라는 내면적 세계를 중요시해왔고 세 살 때 경험했던 꿈을 나이 든 사람으로서 놀랍도록 명확하고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신경증적 기질을 가진 부모를 둔 외롭고 소외된 아이였었고, 여러 해 동안 친구라곤 유일하게, 자기 자신의 모습을 조각한 나무 인형 뿐이었다. 부모들의 문제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몇 시간을 다락방에서 그 나무인형과 터놓고 얘기하면서 놀았다. 외부로부터 자신을 차단시키고 신화, 꿈, 상상, 환상 등 자신의 세계에 몰두하였다.

융은 젊은 시절 중요한 고비 때마다 꿈과 환상 속에 무의식이 표출됨으로써 문제의 해결책이나 적절한 대안(代案)이 결정되어 나타나 있음을 느꼈다. 한 예로 대학공부를 시작할 무렵 전공을 정하지 못하여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 때 한 번은 꿈 속에서, 고분(古墳)에서 선사시대 동물들의 뼈를 발굴하는 꿈을 꾸었다. 이래서 그 문제는 해결됐다. 자기 꿈의 해석에 따라 자연과학을 연구하기로 했다. 지표면 아래 발굴 작업을 하던 그 꿈은, 자신이 거대한 동굴 속에 있었던 세 살 때의 꿈과 함께 인간의 성격 연구-표면 아래 파묻힌 부분을 연구하려는 방향을 예시한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 성격구조의 표면 하부에는 무엇이 있을까? 무의식이다. 우리는 개인적 경험들이 어떻게 성격에 대한 이해를 형성했는지를 다른 이론가들에게서 이미 알아본 바 있다. 개인적 경험과 전문적 연구방법 사이의 이러한 관계가, 융에 있어서는 더욱 강력했던 것 같다. 심리적 건강에 대한 그의 정의와 처방은 자신이 정서적 위기와 그것을 해결한 방법을 반영한 것이다. 그는 각자가 무의식의 경험에 주의깊게 대면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초점을 맞추면서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정교한 성격이론을 확립하였다.

심리학과 신비주의, 불가사의론이 뒤엉킨 융의 이론은 열광적인 청중, 특히 젊은 층의 청중을 많이 모았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동양의 종교, 실존주의, 초현실주의 등-융의 업적과 같은 계통의 이런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됨에 따라 이 청중들도 계속 늘어났다. 그의 저서들은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타계한 1961년 당시보다 오늘날 더 널리 보급되어 있는 둣하다.

융이 가진 건강한 성격에 대한 이론의 형태와 초점은 다른 이론가들과는 공통성이 거의 없다. 그의 연구는 융 자신의 삶처럼 고독하게 외따로 서 있는 것이다.

융의 성격 연구 방법

다른 어느 이론가보다도 융은 무의식을 강조했다. 지그문트 프로이드는 성격 형성에 있어서 무의식의 영향력을 중요시해야 함을 처음으로 일깨워 준 사람이지만 융은 우리 모두가 가진 그 감추어진 내면적 삶을 보다 깊은 차원으로 이끈 사람이다. 융은 무의식의 부분으로서, 개인이 살아가며 쌓아가는 경험 뿐 아니라 인류라는 종족과 더 나아가서는 그들의 원시 조상들이 쌓은 경험까지를 포함시켰다. 사실상 우리 각자는 전시대(全時代)를 통해 인류의 경험으로 구성된 기존 유산을 가지고 있다.

융은 자기 환자들을 관찰하고, 고대문명의 신화와 전설(그것들의 상징과 의식, 종교)들을 탐독하여, 연금술이나 점성술, 투시법 같은 다양한 주제들을 탐구함으로써 전능하고 광범위한 무의식의 본질을 도표로 그려냈다. 자신의 중년기의 위기경험(그리고 그의 많은 환자들의 경험)이 그로 하여금 무의식 속에 내포되어 있는 인류 역사의 상징과 의식, 신화들을 다시 접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했다.

인간의 많은 비극과 절망, 하찮고 목표도 없고 의미도 없다는 느낌들은 성격의 무의식적 토대와의 접촉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융은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접촉의 상실은 과학과 이성(理性)을 삶의 지표로서 믿어버리는 경향이 늘어가는 탓이라고 믿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는 생각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어서, 무의식이란 것을 희생시켜버리고 의식적 합리적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다고 하였다.

우리는 미신적인 신앙으로부터 해방되었으나(혹은 그렇게 확신하려 애쓰지만) 그 과정에서 영혼의 가치와 자연과의 일체감(一體感)을 잃어버렸다. 다시 말해 우리는 비인간화(非人間化)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의미도 없고 아무런 연관성도 없는 것처럼 느끼며, 헛되이 공허감을 극복해 보려 한다. 이러한 "우리 시대의 일반적인 신경증"은 과거와의 영적(靈的) 결합을 잃은 직접적인 결과이다. 이것은 의식의 분열과 해체가 낳은 병리(病理)로서 그 치료책은 한가지 뿐, 즉 성격의 무의식 세력과의 접촉을 회복하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성(humanity)을 위한 융의 처방은 정확히 그 자신에게 행했던 것-무의식과의 대결이다.

융은 성격이 무의식에 의해 지배받고 통제받아야 한다고는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정반대이다. 그의 심리적 건강의 이상형(理想型)은 무의식의 힘에 대한 의식의 감독과 지도이다. 이 의식의 세계와 무의식의 세계가 융화되어 양편이 모두 자유로이 발달되도록 허용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격의 융화가 일어나는 과정이 개별화(個別化, individuation) 혹은 자아인식(自我認識, self-realization)이다. "자신답게 되는 과정(coming to selfhood)"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실제로 그것은 대단히 강한 경향성이어서 융은 하나의 본능이라고까지 여겼다. 그러나 그 개별화를 꾀하는 데는 많은 장애가 있으며, 융도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될 능력이 있다고 낙관하지는 않았다. 개별화된 사람은 자기화(自己化, selfhood)와 이해성, 심리적 성숙과 건강, 완전성(完全性), 완전한 인간성이라는 궁극점에 도달할 수 있다. 인간 존재의 이런 목표가 열망되기는 하나, 융도 그의 개인적 위기와 해결을 경험하던 시기였던 중년기까지는 거의 도달하지 못했다. 융의 개별화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격구조에 대한 그의 견해가 어떠하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