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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양반 - 이응백

Joyfule 2013. 11. 15. 11:12

 

 

사랑 양반 - 이응백

 

  우리 나라 재래식 한옥(韓屋)에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더라도 대개는 안채와 사랑채가 있다. 그야 방 한칸밖에 없는 집에는 이도 저도 가릴 바 못 되지만, 방이 둘만 돼도 男女의 거처 공간을 따로 설정했었다. 이는 아마도 내외법(內外法)이 엄격했던 시대상의 반영이 아닌가 한다. 바깓손님은 사랑채에서, 안손님은 안채에서 접대해야 할 필요에서, 단칸집이 아닌 바에야 그렇게 구분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거처 공간의 별정(別定)은 자연히 각기 다른 분위기(雰圍氣)를 빚어냈다. 사랑에는 엄격함과 위엄이 가득 차며, 안방에는 따뜻함과 포용성(包容性)이 감돌았다. 그러면서도 절도(節度)면에서는 안팎이 더하고 덜함이 없을 만큼 분명했다.

 

  사랑에서의 큰 기침 소리나 장죽(長竹)으로 놋재떨이에 담뱃재를 꽝꽝 울려 떠는 소리는 삽시간에 안채의 분위기를 긴장시키고, 혹시나 떨어질 엄한 분부를 맞을 채비를 차리게 한다. 그 순간이 별일없이 지나갔을 때의 안도의 한숨은 얼어붙었던 겨울 뒤에 새 봄을 만나는 기분이다.

 

  조선조 숙종(肅宗) 때 한지(韓祉)라는 감사(監司)가 있었다. 인품이 묵직하여 일찍이 말을 빨리 하거나 얼굴에 노기(怒氣)를 띠는 일이 없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에게 곤장(棍杖)을 두세 번 쳤다. 단지 그뿐이었는데 감영(監營) 안팍이 숨소리도 안 들릴 만큼 숙연(肅然)하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발자취 소리만 들려 사람들이 벌벌 떨었다. 감사가 행차하는 곳에 달리 금훤(禁喧)을 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쥐죽은 듯이 행보(行步)를 멈추니, 그 까닭을 몰랐었다.

 

  이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 나오는 예화(例話)로, 백성을 다스리는 목민관(牧民官)은 말이 적고 위엄이 있어야 권위가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가장(家長)도 마찬가지로 말수가 적고 위엄이 있을 때 권위가 선다. 그리하여 기침소리, 재떨이 울리는 소리에도 가족들이 정신을 차리는 풍조는 가도(家道)가 제대로 서 있다는 단적인 증거라 하겠다.

 

  규수(閨秀)란 말이 있다. 안방에서 자란 재색(才色)을 겸비한 처자(處子)를 이르는 말이다. 말씨와 행동 거지(行動擧止), 예의 범절, 음식 솜씨와 바느질, 글씨며 글이 나무랄데 없이 훌륭히 갖춰진 나이찬 처녀라는 뜻이다.

 

  이러한 규수는 할머니나 어머니로부터 모든 것을 배운다. 이는 옛날 할머니나 어머니들이 집안에서 子女를 가르칠 수 있는 소양(素養)과 교양이 쌓이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옛 이름 잇는 이들 가운데 어머니의 훌륭한 가르침을 받아 그리 된 사례가 많다. 맹자(孟子)가 그랬고, 율곡(栗谷)과 한석봉(韓石峯)이 그랬다.

  조선조 성종(成宗) 6년(1475)에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仁粹大妃)는 나라가 잘 다스려지느냐 어지러우냐, 흥하느냐 망하느냐는 남자들이 밝으냐 어두우냐에 달려 있지만, 여자들이 착하냐 착하지 않느냐에도 달려 있으므로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 하고, 내훈(內訓) 3권을 지어 여자들의 교본(敎本)으로 끼쳤다. 1권은 언행(言行), 효친(孝親), 혼례(婚禮), 2권은 부부(夫婦), 3권은 모의(母儀), 돈목(敦睦), 염검(廉儉)이다. 이러한 부녀자들에 대한 교양서는 자연히 집안에서의 가풍(家風)과 자녀 교육의 지침이 되었던 것이다.

 

  중종(中宗) 때 사람 박세무(朴世茂)란 이는 동몽선습(童蒙先習)이란 아동용 교재를 만들었는데, 그 속에 소학(小學)에서 뜻을 당겨서 쓴 이런 구절이 보인다. '남자는 밖에 거처하면서 안 일에 간섭하지 않으며, 부인은 안에 거처하면서 바깥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男子居外, 而不言內, 婦人居內, 而不言外.)' 부부가 각기 거처 공간을 중심으로 역할 분담을 하고, 서로 경계를 침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야말로 부부가 어디까지나 서로 人格을 존중하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집안 살림은 여자 주인들이 했다. 살림의 주도권은 광열쇠로 상징됐다. 시어머니가 살림을 며느리에게 내맡길 때에는 광열쇠를 내준다. 이렇게 예전의 안주인의 권위와 권한은 당당하였다. 그리하여 옛사람들은 부부간에 서로 공대를 하고 인격을 존중했다. 옛사람들의 가도(家道)와 부부의 도리가 눈에 잡히는 것 같다.

 

  지금은 가옥 구조가 달라져 사랑채와 안채의 개념이 없이 부부가 같은 공간에서 거처한다. 그리함으로 부부가 너무 가까워져 존경(尊敬)의 여지가 없게 되어 버렸다. 존경에는 적당한 거리가 유지되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늘 정다운 손님, 보고 싶고 그리워하는 손님을 대하는 듯 신선감(新鮮感), 신비감이 생긴다. 옛사람들이 댓구멍으로도 서로 보지 못한 생판 모르는 처지로 만나서 일생을 별탈없이 꾸준히 살아간 것은 이 적당한 거리감 때문이다. 게다가 대가족주의(大家族主義)로 층층 시하에서 부부가 쉽게 만날 기회조차 없었던 환경이 항상 그리워함을 촉진시켰던 것이다. 요새 부부들은 서로가 너무 샅샅이 알아 신비로운 구석이 없게 되어 버렸다. 같은 공간에서 거처하다 보니 세세한 행동 거지가 다 눈에 보이고, 그것의 총화(總和)가 그의 전부인 양 착각하고 실제 이하로 평가 절하(評價切下)를 하려든다. 연애(戀愛)로 맺어진 부부가 쉽게 헤어지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현명한 아내는 남편의 좋은 점을 子女들 앞에 부각시킴으로써 남편도 자숙하고 가도(家道)도 선다는 것을 잘 안다. 옛날 부인들은 바로 그것을 실천했다.

 

  요새는 부부사이의 호칭은 가령 남편을 '아빠'라고 하는등 강상(綱常)에 어긋나는 잘못을 항다반(恒茶飯)으로 저지른다. 그런가 하면 아주 가깝게 사귀던 시절의 호칭을 그대로 연장시켜 '너'니 '나'라고 하고, 서로 이름을 부르기도 한다. 사이가 너무 가까우면 완충(緩衝)의 여지가 없어 부딪치면 파탄이 오기 쉽다. 그런 점에서 종래의 호칭도 음미 할 바가 있다. 남편을 '그이' '우리 그이' '우리집이[-니]' 또는 '바깥 양반' '사랑 양반'으로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사랑채는 없어도 말에서나마 '사랑 양반'을 존속시킴이 남편의 권위, 따라서 家道를 유지하는 하나의 방도가 아닐는지?       (1991)
 수필가. 경기도 파주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