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취량(鼠取量 ) 이야기 - 임병식
봉급생활을 해오다 퇴직을 하고 나니 받아든 연금이라는 것이 7,8월 은어 배 곯듯 줄어든 액수여서 도무지 성이 차지 않는다. 하는 일 없이 받고 있는 것치고는 고마운 일이나, 그래도 매월 똑 같은 일정 액수가 늘 아쉽게 느껴진다. 은행에 나가 통장 확인을 할 때마다 예전에 분기마다 나오던 보너스가 그리워진다. 봉급생활을 할 때에는 그 목돈이 얼마나 유용하던가. 넉넉하지는 못하지만 밀린 책값이며 사고 싶은 것들을 살수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나 형편이 빠듯하니 통 여유를 가질 수 가 없어 아쉽다.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지내는 생활이라 무얼 저지른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다.
그래서 아쉬우면서도 그리운 게 보너스이다. 이 보너스의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공돈처럼 느껴지는 넉넉함에 있다. 그래서 보너스를 받으면 좀 무리해서 외식도 하게 되고 가족들의 옷가지도 살 수 있었다. 그 외에도 그냥 여유분을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했다. 그것이 비록 채 백만 원이 넘지 않는 액수지만 부자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지금은 그걸 기대할 수가 없으니 여간 아쉬움이 크지 않는 것이다.
직장인에게 성과급의 성격으로 보너스가 도입된 것은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가 한참 중공업 입국을 부르짖으며 장치산업을 일으키던 때였으니 30년 남짓이다. 하지만 성격은 조금 달라도 보너스의 개념은 이미 오래 전 부터 생활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옛날 시골 오일장에 나가면 물건을 거래하면서 덤으로 반 되 박, 혹은 물건 몇 개씩을 더 올려주는 전통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정말 '이것이 보너스다'라고 생각하고 접한 것은 공직생활 초기다. 그때가 1970년 초로, 신참으로서 방위병업무를 보던 때인데, 지급 받은 물건보다 여유분이 더 얹혀왔던 것이다. 뭐냐하면 방위병에게 지급되는 라면이, 사람의 숫자보다 한 두 박스 더 여유있게 지급이 되었다.
이것을 일러 서취량(鼠取量)이라고 했다. 즉, 쥐가 먹어 없어진 보충 량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의가 그럴 뿐, 사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감소분이 발생할 것을 고려해준 것이었다. 당시에 라면은 귀한 먹거리로서 운반 도중이나 창고보관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유출이 되곤 했는데, 그것까지를 감안한 배려였던 것이다. 매일 밤 해안초소에 나가 근무를 서는 방위병들에게 지급되는 급식이 부족하면 아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 서취량이란 생소한 말을 듣고 의아해 하다가 그 진의를 알고는 감탄해 마지 않았다. 얼마나 사려 깊고 배려가 깃든 것인가. 비록 한문투의 말이긴 하지만 뜻이 좋는가. 이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내가 공직생활을 할 때만 해도 어렵고 생소한 말이 많이 행정용어를 쓰였다. 소가 우리를 뛰쳐나갔다고 해서 '축우일주(畜牛一走)'하는가 하면, '그렇다면'의 말도 쉬운 말을 두고 굳이 한문스럽게 '연(然)이면'으로 고집을 부려 썼다. 그러니 쥐가 먹었다는 뜻을 담았으니 '서취량'이라고 하는 말을 붙인 건 당연한 발상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 말을 잊을 수 없다.
그 말이 생긴데는 짐작이 가는 것이 있다. 어렸을 적에 보면 어른들 사이에서 도둑을 흔히 인쥐라 했는데, 바로 사람을 이르는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때 보면 흔히 '어떤 인쥐가 손을 대었는지 없어지고 말았네' 또는 '어느 인쥐의 소행이겠지'라고 했던 것이다. 한데 이 말 속에는 그야말로 배려의 마음이 담겨서 설령 누구 짓인지 들통이 나더라도 '도둑'으로 몰지 않고 용서해 버리는 늬앙스가 담겼다. 실제로도 범인을 알아내고도 눈감아 버렸던 것이다. 그것을 행정용어로서 차용했음이다.
내가 퇴직한지도 수년이 지났다. 그러므로 지금도 그러한 용어가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 생각 같아서는 그런 인정이 스민 용어는 계속 사용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왜냐하면 국민편익을 위한 행정은 언제 어디서나 인간미가 있어야 하며, 배려가 우선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 인심이 변하여 아무리 정확성을 따지고 밝히는 시대라 하여도 사람 사는 세상에는 사람 사는 맛은 있어야 하겠기 하는 말이다.
일전에 공무 시간의 한계를 두고, 어디까지 한정할 것인가에 대해 내린 이색적인 판결이 있었다. 내용인즉 '일반 주택은 집을 들어서는 순간, 아파트는 현관문을 들어서는 순간' 이라는 칼날 같은 판정이 나온 것이다. 엄격성을 따져야하는 법에서야 의당 분명하게 내려야 할 결정이겠지만, 그러나 행정은 좀 너그러워야 하지 않을까 한다. 예컨대, 의료보험공단에서 장기 입원환자 입원일수의 산정이라든가, 중국에서 씨가 날아와 저절로 자란 양귀비 단속 등은 엄격한 잣대보다는 배려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서취량의 배려처럼 조금은 아량이 적용된다면 한결 고단한 삶에 훈풍이 돌지 않을까. 팍팍한 세상을 살아가자니 그 시절에 '서취량'이란 이름으로 지급한 배려의 여유가 여간 그리워지지 않는다. (2004)
'━━ 감성을 위한 ━━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미들의 행진을 보며 - 임병식 (0) | 2013.02.07 |
---|---|
자연 훼손의 기억 - 임병식 (0) | 2013.02.05 |
깨닫고 산다는 것 - 임병식 (0) | 2013.02.02 |
어떻게 글을 읽을 것인가 (0) | 2013.02.01 |
죄와 벌 - 조화유 (0) | 2013.0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