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 새 - 김민식
나는 캘거리의 기나긴 추운 겨울을 좋아한다.
특히 온 세상이 백설로 단장한 이른 아침 고달픈 삶의 현장을 잠시 밀어내고 설경 속의 밴프 도로를 달려보라! Rocky Sulfa Mountain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영하 10도를 밑도는 함박눈 내리는 오솔길을 뽀드득 뽀드득 장단 맞추어 걸으며 백설의 해맑은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라! ㅡ 속세를 떠난 심미적 여백을 발견하며 산바람과 속삭여 보라! 유황 향내가 사방을 진동하는 뜨거운 노천탕에서 함박눈 펑펑 맞으며 지인과 덕담을 나누어 보라! 이것들만으로도 이곳 겨울을 좋아 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 긴긴 겨울을 정신없이 즐길 때 마다 봄이 문득문득 기다려지게 하는 것은 따뜻한 날씨나 신록의 계절이 그리운 때문만은 아니다. 집 마당 뜰 워크 아웃 덱크 처마 밑에 해마다 봄, 여름, 가을, 둥지를 틀고 함께 순수한 자연의 세월을 더불어 낚곤 했던 로빈 새의 추억 때문이다.
IMF 이후 한국 언론들은 때때로 한국의 5060(오공 육공) 인생을 개털인생이라고 부른다. 아날로그 산업시대의 주역으로서 일만하며 살아오던 오십, 육십 대들의 삶이 어느 날 갑자기 인터넷 IT 시대의 직장에서 밀려나 방황하는 것을 빗대는 자조석인 울분이리라.
이곳으로 십여 년 전 이민 온 나는 한발 비껴선 행운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동 시대를 사는 동안 인간 중심이고 메마른 인성에 관습화된 강퍅함은 조금도 다를 바 없어 이곳 생활에 적응하느라 매우 힘겨운 날들이었다. 변화하기 힘든 나에게 ‘생명의 뿌리’를 가르쳐준, ㅡ자연의 존엄성을 일깨워 주고 인간도 때로는 자연의 뭇 생명들에게서, 인위적으로 채색되어진 교훈 보다 더 신선하고 때 묻지 않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낭만을 알게 가르쳐준, - 그래서 자연을, 하나님과 청년 예수를 더욱 뜨겁게 사랑하는 계기가 된, 로빈과 함께 세월의 고락을 누렸던 수많은 아름다운 사연들의 반복됨을......... 새봄에도 은근히
기다려지기 때문이다.
아내를 사랑하면 처갓집 말뚝보고도 절을 한다던가? 글을 쓰고 있는 컴퓨터 책상 앞에 걸려있는 신년 새 달력 그림 자리에 호랑가시나무(Holly tree) 빨간 열매위에 앉아 있는 로빈 새 사진을 붙여놓았다. 새에 관한 책들을 사들이고, 로빈 새에 관한 수많은 자료들을 다운로드 받았다. 그리고 robin song study chart check list를 벌써부터 준비하는 호들갑을 떠는 것은 해를 넘기면 넘길수록 더욱 사랑하는 마음이 생김은 물론이요, 영물로 생각하기 때문일까?
타운 하우스에서 삼년 월세 살다가 이곳으로 이사 온 지도 벌써 칠년 째이다. 매일 오후 4시부터 가게 문을 열기 때문에 첫해 겨울을 지나자 이듬해부터 지금까지 공한지 밭을 일구고 피폐한 정원 가꾸느라 봄, 여름, 가을의 허구 많은 날들을 집 마당에서 지나곤 한다. 집 주위 구조가 반원형 언덕인 court 지역에다가 뒤뜰은 워크아웃 구조들이다. deck 들이 상당히 높고 집 양옆 뒤 3방향이 모두 담으로 둘리어져 고양이 같은 로빈 천적이 쉽게 침입하지 못해 둥지를 틀기에는 이 주변 지역이 안성맞춤이다. 자연히 이곳 인근은 로빈 철새들의 낙원이 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의 집 deck 는 짙은 회색 페인트칠이라 여름에 나무 널빤지가 태양열을 받으면 보통 뜨거운 것이 아니고 ㅡ한 여름 맨발로 바닥이 뜨거워 맨발로 걸을 수 없을 정도다. ㅡ 덱크 처마 끝을 받치는 각목사이가 좁아 보통 둥지 보다 언제나 적게 집을 지을 수밖에 없다. 그 뜨거운 열 더위, 더구나 바람도 차단된 좁은 공간 속에서 약 보름동안 알을 낳고, 품고, 부화하는 암놈의 불가사의한 모성애나, 부화 후 열 이틀 이상을 둥지에서 지나는 어린 로빈 새의 강인한 생명력이나, 하루에 백 번 이상 지렁이를 어린 로빈에게 공급해야하는 어미들의 부지런함이나, 그 틈틈이 둥지주위를 침범하는 까마귀 까치 등, 자기 몸집보다 큰 불청객들을 목숨 걸고(?) 싸워 퇴치시키는 그 용맹성을 어떻게 소인배인 나의 둔필로서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있을까?
아마 현대 인간이면 더위를 먹어 쓰러졌을 것이다. 아무리 회귀성 조류라고 하지만 다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다시 찾아오는 것은 이웃집 고양이가 침범하면 새총, 돌팔매질로 혼을 내곤 하고, 또 한두 해는 가까이가면 나를 경계하고 도망 다녔으나 그 다음해부터는 부화기 중에 잔디를 깎으려고 하면 나를 가까이 접근 못하도록 내 발밑까지 쫒아와 나를 밀어내는 극성스러움에 한 달 내내 잔디 깎기를 포기하고 기다리는 등, 모든 투정을 받아주는 너그러운 친밀감을 알기 때문일까?
내가 로빈 새를 유독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부지런함과 자식 사랑함이다.
재작년 여름 몹시 가뭄이 들었을 때 이다. 집 옆 다섯 평 깻잎 밭에 연거푸 두해가 가뭄이 들어 매일 아침 밭에 호수로 물주는 일이 한여름 아침 일과였다. 시간에 쫓길 때는 굵은 호수 줄기를 강하게 틀어 흙이 패일정도로 물주기를 빨리한다. 어느 날 아침 센 물줄기로 물을 주는데 갑자기 암놈 로빈이 물줄기 한가운데에서 지푸라기를 버무리며 흙을 빗는 것이 아닌가? 강한 물줄기 속에서 완전히 젖어 이리 저리 밀리며 때로는 뒤집어 쓴 물을 온 몸으로 진저리나듯 털어내기도하고……, 둥지를 짓는데 까지는 4~5meter 거리인데 계속 반복하는 것 아닌가? 뒤뚱거리며 물줄기 속으로 계속 파고드는 것이 하도 우스워 물주기를 계속하니 주위가 온통 물바다가 되었다. 집을 지을 때는 주로 암놈이 일하고 수놈은 옆집 지붕 꼭대기에서 사주 경계를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수놈이 가세했다. 그 동작들이 매우 날렵하다. 가뭄에 물을 찾지 못해 고생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런데 어느덧 내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하더니 하염없이 흐른다. 내가 내 자식들을 위해 언제 저만한 고초를 당해 본 적이 있었던가? (후에 자료를 읽으니 가끔 상황이 급하면 수놈에게 집짓는 일을 시키기도 하는데 반드시 암놈의 지시를 받는다고 한다.) 상황이 좋으면 일년에 두세 차례 알을 낳는다. 어린 로빈이 성장하는 동안 바로 옆에다 새둥지를 트고 한번에 3~5알을 또 낳는다. 캘거리의 짧은 여름시간 때문에 로빈은 도무지 쉬는 시간이 없다. 꼭 지렁이만 먹인다. 어느 문헌을 읽어도 하루에 백번 이상 먹이를 날라다 준다고 하니……. 밤에는 불청객이 침입 할까봐 교대로 감시한다. 여름한낮에 골프장 잔디밭에서 오수나 즐기며 꽥꽥 소리를 질러대는 캐나다 기러기와 다르다.
내가 자식들을 위해서 여태껏 로빈만큼 헌신적으로 아버지 노릇하고 도와주었는지? 자연과 친해지면서부터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늦가을 남쪽으로 월동하러 이동할 때 캐나다 기러기처럼 V자형으로 날지는 않지만 같은 방법의 무리 떼를 지어서 이동한다. 독수리 등 천적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하는 방어형 이동방법이다. 캐나다 기러기는 V자로 마치 군대 같은 딱딱한 느낌을 주나, 로빈은 자유로움 속에 분망하게 떼지어나는 것이 더욱 친근감이 든다. 그러나 이동 중에 이십오 퍼센트만이 생존해 회귀한다고 한다. 로빈의 평균 수명이 십년이 넘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열심히 사는데도 참으로 험한 세상을 이겨내질 못하는구나! 그러나 우리 집 식구 로빈은 매년 살아 돌아왔다는 확신이 든다. 왜냐하면 로빈을 비롯해 모든 새들은 사람을 보면 도망가는데 우리 집 로빈은 나를 보아도 도망가질 않고 발치 거리에서 잔디속의 지렁이 사냥을 계속 하기 때문이다.
새해 아침 나는 인근 민둥산 Valley View Presbyterian Church 언덕에 홀로서서 양의해 계미년의 이글거리며 불게 타오르는 일출을 바라보았다. 장엄한 로키 산맥으로부터 불어오는 차가운 정기 바람으로 심호흡하며 내 속의 혼탁한 것들과 부끄러운 것들을 청소 하였다.
아! 나의 사랑하는 로빈이 새 봄날 새벽에 다시 찾아와 그 아름답고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하며 인사하면 한 겨울 동안 너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한 많은 자료들을 기억하며 자연의 순수한 마음과 기쁨의 눈물로 두 팔 벌려 반갑게 맞으리라. 그리고 너의 수많은 아름다운, 감동어린이야기들을 순수한 자연에 인위적 색칠로 얼룩진 세상을 향해 글로 계속 토해내며 항변하리라. (끝)
※ 출처 : 캘거리문협 게시판에서.. 글 : 김민식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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