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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령님과 함께하는 회개와 거듭남의 비밀 (매우 중요합니다.)

Joyfule 2018. 5. 10. 13:48

사람은 원래 주님과 동행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으나,

마귀의 간계에 넘어가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들의 후손인 우리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로 내몰렸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은 이를 불쌍히 여겨,

최초로 지음을 받음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로부터 후대로 내려오며 끊임없이,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탄생이

믿음의 종들을 통해 예언되어 왔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자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사역을 시작할 때 최초로 외친 말씀이 회개하라 였습니다.

왜 회개하라였을까요?

저는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죄를 범해 회개하라는 것은 알겠는데,

왜 첫마디가 회개라는 단어였을까..

 

결국,

회개는 구원의 첫 단추를 꿰는, 제일 먼저 선제 되어야 할 조건입니다.

회개 없는 신앙생활의 시작은

기초도 파지 않고 모래 위에 빌딩을 세우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하여, 예수님은 그 무엇보다도 회개를 가장 먼저 외치신 이유입니다.

회개 없는 신앙생활 위에

믿음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건축을 전공해서 건축물의 구조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건축하려면 일단 건물 높이와 규모의 조건에 따라

기초를 어떻게 할지 정해지는데

고층빌딩같이 위로 한없이 올라가는 건물은

그와 비례해서 땅속으로 기초 및 지하층이

건축구조법이 안전하다고 하는 허용치의 범위 

즉 최소치 이상 사이에서 설계가 결정하는데

보통 건축주가 최소한의 조건에서 최대치를 뽑기위한 방편으로 

보통 안전을 담보하는 최소치에서 기초 및 지하층의 규모가 결정됩니다.  

최소치 이하를 벗어나면 건물은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그냥 붕괴한다고 보면 정답입니다.

그 정도로 건축물을 지을 때 기초를 동반한 지하구조는 제일 중요하고 

기초와 연결되는 지하층만 공사가 끝나도

이미 건물의 반은 완성된 것이라고 합니다.

제가 건축감리사 자격으로 현장을 나갔을 때,

가장 초 긴장하고 집중해서 감리하는 공정이 바로 기초 및 지하층 공사입니다.

이게 잘못되어 건물이 기초위에 계속 올라가면

이미 빼도 박도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건축감리들이 가장 골치 아프고 스트레스받는 공정이 기초공사입니다.

이렇게 모든 건물의 시작은 기초부터 시작합니다.

 

회개가 바로 믿음의 가장 기본이 되고 가장 중요한 기초공사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 없이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즉,

회개 없는 거듭남,

회개 없는 믿음,

회개 없는 순종,

회개 없는 사랑,

회개 없는 십자가,

이 모든 것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실체도 없이 그림자만 좇는

즉 겉만 번지르르하여 종교의 영에 사로잡힌 자들이 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가장 먼저 전제되어야 하는 기초가 회개입니다.

그러면 회개는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갑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회개는 절대 사람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육체를 반응시키는 일은 얼마든지 내 의지로 가능합니다.

그러나 나의 영을 반응시키는 작업은 나 스스로는 불가능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떠한 기계라도

제일 잘 아는 사람은 그 기계를 만든 사람이 제일 잘 알고

고장이 나도 제일 잘 고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해 제일 잘 압니다.

기계는 처음에 설계된 대로 움직이듯

사람도 태초에 주님이 설계한 범위 내에서만 작용합니다.

여기에 내 자유의지가 플러스 되어

자유 의지로 내 몸과 마음과 생각을 움직여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계된 것 중에 내 자유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게 하나 있습니다.

바로 나의 '영'입니다.

이 영 만큼은 내 의지대로 변하는 게 절대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설계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 만큼은

반드시 주님께서 터치하지 않으면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의 영을 우리 스스로 터치해서 조작할 수 있다면

창조 질서가 무너지는 것이며

영계에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영이 유체이탈해서 다른 사람에게 들어간다든지,

귀신을 직접 만나 뭔 일을 꾸민다든지,

공상 만화에서나 볼 수 있는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의 영 만큼은 주님께서만 만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여,

영적 변화인, 회개하여 거듭나는 과정은

내 자유의지가 아닌 주님의 의지로 터치해야 일어나는 거룩한 작업입니다.

단 내 자유의지로 갈급함을 느껴 주님을 찾은 자에게만 터치되거나,

어느 누구의 간절한 기도로 주님께서 강권적으로 피 기도자의 영을

터치한다는 뜻입니다.

이 과정에서 갈급한 심령을 만나주셔서 그의 영과 접속하는

터치(나무에 가지가 접붙임)되는 순간이고

접붙임 당한 우리의 영은

주님의 권능으로 인해 묵은 찌꺼기인 쓰레기 즉 우리의 죄를

청소하시는데 이게 바로 진정한 회개입니다.

그 과정에서 육적이고 심적인 감각과 느낌으로만 인식하던 나의 죄들이

영의 터치로 인하여 그동안 깨닫지 못하던 나의 썩은 죄악된 실체의 모습을

나 자신의 영으로 보게 하시거나, 느끼게 하셔서 나 자신의 실체를 

깨닫게 하셔서 회개하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영의 슬픔이 육의 눈을 통해 눈물이 터져 나오고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수치심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합니다.

이게 바로 주님의 터치로 인해 엄청난 영의 감각을 통해 일어나는 회개의 순간입니다.

그래서 한번 회개를 하고 나면 죄의 무서움과 더러움을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기에

그 이후, 죄의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고 깨어있는 것입니다.

호랑이의 무서움을 경험한 자는 

이와 비슷한 고양이만 봐도 두려움의 트라우마가 생기듯  

의도하지 못할 때 지은 가벼운 죄조차도 내가 인식하는 순간

바로 나를 쳐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의 민감함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영의 세계 즉 천국을 가거나 지옥을 갔을 때

영으로 느끼는 감각은 육일 때 느끼는 감각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강하다는 사실을요?

그래서, 지옥으로 떨어진 영혼들이 엄청난 영적 민감함으로 인해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 속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반대로 천국에 간 영혼들은 엄청난 영의 민감함으로

가뜩이나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천국에서 느끼는 엄청난 기쁨과 희열을요?

이게 주님의 역사로 민감한 영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저 우리 육적 감각을 앞세워 눈물 흘리면서 하는 반성은 회개가 절대 아닙니다.

회개와 반성은 전혀 다른 과정입니다.

반성의 눈물은 인위적으로 내가 그칠 수 있지만,

회개의 눈물은 내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계속 흐릅니다.

아마 기도 중 이런 경험을 하신 분들 있을 겁니다.

회개는 주님의 터치로 인한 영의 작용이고,

반성은 우리의 자유의지의 감성적인 작용으로 인한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눈물의 반성을 회개로 착각하면 곤란합니다.

주님은 인격적이고 거룩한 분이시기에

우리의 영을 멀리서 성의 없이 리모컨으로 조작하듯 움직이지 않습니다.

반드시 귀히 창조된 우리의 영을 직접 만나서 움직이시는 분입니다.

주님의 터치로 우리의 영은 주님의 성령과 접붙임을 당했으니

성령의 권능으로 진정한 회개가 되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이 내게 전해져서 동일하게 그것을 느끼고

감성적이 아닌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이 느껴지고

주님의 거룩한 성품이 나의 영에 고스란히 물 흐르듯

나무의 수액을 타고 접붙임 당한 내 영으로 전해지기에

성령의 아홉 가지 거룩한 성품(열매)이 인위적이 아닌

광야의 훈련 과정과 주님의 절대주권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이후 주님의 절대주권으로 사람에 따라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는데,

그것을 은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롬 12:6-8)

 

예언하는 사람은 예언의 은사가 나타나고,

섬김의 거룩한 마음이 흘러 섬김의 은사를,

가르치는 능력이 흘러 가르치는 은사를,

위로하는 마음이 흘러 위로의 은사를,

성실하게 구제하는 마음이 흘러 구제의 은사를,

리더쉽의 능력이 흘러 다스리는 은사를,

병 고침의 은사 등등...

이렇게 주님의 권능으로 사람에 따라 거룩한 은사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여,

저런 귀한 은사들은 내 의지가 아닌

주님의 의지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기에

행위적 믿음으로 폄훼시키면 성령훼방이란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불쌍한 이웃을 구제하는 자에게 행위 믿음이라 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이웃을 섬기는 성도에게 행위 믿음이라 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는 성도를 행위 믿음이라 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힘든 이웃을 위로하는 성도를 행위 믿음이라 하고,,,등등

행위 믿음이란 성령의 능력이 아닌

내 자유의지로 열심을 다하여 하는 신앙과 상관없는 것을

행위라고 하는 것입니다.

애초에 행위 믿음이란 말은 없는 말입니다.

성령님과 함께하지 않는 사람을 믿는 성도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행위 믿음이 아니라, 그냥 행위입니다.

 

그 때문에 성령으로 회개하여 거듭난 성도들끼리는

접붙임으로 전해지는 주님의 거룩한 비밀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함부로 행위 믿음이란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행위 믿음이라고 폄훼하는 자들은

성령으로 거듭나본 적이 없으므로 거룩함의 비밀을 모르니 인위적인 지식으로

함부로 사특하게 성령을 훼방하는 말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아니면

성도도 아니고,

믿는 자도 아니고,

그저 지식적으로 이론적으로 관념적으로 스스로 믿는다 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남 없이, 성경 지식만 가득하여

온갖 말을 만들어내고,

스스로 믿는 자라 하고,

스스로 성도라 하고,

스스로 구원받았다 하고,

성경의 거룩한 비밀을 임의로 편집해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적용하고,

성경 말씀을 가지고 자신에게 적용하는 게 아니라,

남을 비판하는 데 악용하고,

남을 판단하는 데 악용하고,

남을 정죄하는 데 악용하고

성령님의 임재함 없이 자기가 습득한 인본적인 성경 지식으로

분쟁하고, 논쟁하고, 자신을 높이고, 남을 떨어뜨리고,,,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런 사악한 데 사용하는 자들이

과연 성도라 할 수 있습니까?

과연 믿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성경 말씀은 공의와 주님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서로 권면해야지

말씀 가지고 논쟁이나 하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요즘 성령으로 회개하여 거듭나는 주제를 가지고

참 많이 글을 씁니다.

왜냐하면, 글을 쓰면 쓸수록

결국 신앙의 기초는 회개하여 성령으로 거듭남의 시작으로부터

출발하기에 그 방향으로 가는듯 합니다.

그리고 자꾸 성령께서 이 방향으로 자극하시고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만나준 내 자녀들은 드문데

스스로들 자신을 거짓으로 속여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자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버드대의 우월함과 최고의 대학이란 것을 인정합니다. 

그 정보를 알고 인정한다고   

마치 자신이 하버드대학에 다니는 것처럼 

거짓 선생이 교인에게 최면을 걸고,

자신에게 역시 최면을 건다는 것입니다.

지식적으로만 하나님을 알고 인식만 하면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최면을 걸고

자기 자신도 속인다는 것입니다.

 

저는 거짓 성도들을 참 많이 확인했습니다.

방언 받았다는 사람들의 입에서 다른 사람을 먼저 심방했다고 하여  

여성 전도사를 향하여 어느 여자 권사님이 육두문자로 공격하고, 

교회에서 양손을 하늘 높이 들고 눈물 흘리며 찬양을 부르던 사람들이

도란도란 모여 남 흉이나 보고,

인터넷 기독게시판에서는 서로 자신의 교리가 진리라고 하며   

거룩한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공격 무기와 방패로 사용하고,

이런 사람들이 스스로 거듭났다고 자신을 속이고,

성령님의 인격(아홉가지 열매)이 단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데 

자신을 성도요 믿는 자라고 속이는 일이 사이버공간에서 

하루 24시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포탈 정치 게시판에 가 보십시오.

한마디로 마귀의 역사가 강렬하게 아귀다툼이 나타나는 마귀의 놀이터입니다.

그런데 기독 게시판에서도 언어만 인위적으로 순화했을 뿐 

그 본질을 보면 포탈 게시판과 다를 바 하나도 없는

마귀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믿는 자라 하고,

자신을 성도라 속이고,,,,

 

죄송합니다만 

성령님과 함께하는 진짜 성도들은 

같은 성령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게시판에 쓴 글만 봐도 서로 인식합니다.

그냥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모른 척할 뿐입니다.

말만 몇 마디 나눠보거나 표정만 봐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이게 기이한 현상이 아니라 성령님과 함께하니 자연스레 나타나는 

지극히 당연한 현상입니다.

주님의 자녀인지 마귀의 자녀인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은 주님의 자녀는 성령께서 인격적이시기에 

함부로 들어내 놓구 말만 안 할 뿐입니다.

그저 좋은 것을 말하고,

격려하고 ,

권면하고 ,

서로 위로하고,

포기하지 않고 상대를 일으켜 세워서 희망을 품게 하고,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누구의 이름을 거론하며 이렇다 저렇다 약점을 말하지 못합니다.

성령님께 잡힌바 되어 성령님의 인격이 흐르기 때문입니다.

꼭 상대를 위해 교훈성 말로 권면하더라도 바로 때리듯 말하지 않고,

긍휼한 마음으로 감싸며 사랑의 메시지를 담아 전달합니다.

 

이와 반대로 마귀의 자녀는

믿는다 하면서도

함부로 말하고,

남의 약점을 찌르고, 

공격적인 말을 하고, 

남의 아픔을 후벼 파고, 

상대를 내 앞에 굴복시키려 하고, 

은연중에 상대를 누르고,

어차피 너는 그런 사람이라 하면서 아예 포기시키려 하고,

이런 사악한 행위는 

마귀가 하는 짓임을 알아야 합니다.

진짜 주님의 자녀에게는 이런 악한 모습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영적 분별도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접붙임 되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성령으로 접붙임 바 되지 않으면

인간의 능력으로 영적 덕이 되는 귀한 모든 것을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영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모든 능력은

반드시 주님의 역사가 있어야 모두 가능한 것들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장 5절)

 

내 자유의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아예 버리십시오.

내 자유의지로 할 수 있는 범위는 모든 것이 아니라,

주님이 창조하실 때 주신 지극히 인간적이고

영성과 상관없이 인간의 본능적인 지극히 단순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아닌,

단순히 인간의 개인 의지로 하는 것은 행위일 뿐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과의 접붙임으로 나타나는 모든 능력을 행위로 폄훼하는 것은

성령님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며,

성령을 훼방하는 대단히 사특한 마귀의 궤휼인 것입니다.

요즘 마귀들은 그들의 자녀를 이용해서

성령의 역사를 물타기 하여 흐지부지 성령의 열매를 가치 없게 만들려고

무조건 행위 믿음이요,

행위 구원으로 몰아세우는 현상이 횡횡하고 있습니다.

 

접붙임당한 주님의 자녀들은 요지부동 모두 분별하여 전혀 문제가 없지만,

이제 주님을 지식적으로나마 서서히 알아가는 즉,

입에 떠먹여 줘야 겨우 받아먹을 수 있는 젖먹이 수준의 분들에게는

이런 마귀의 사특한 궤휼을 반드시 숙지해야 지옥 불로 끌려가지 않습니다.

세상의 끝으로 치닫고 있는 지금 현실에서

마귀들은 최고조로 발악하며 어떻게 하든 한 영혼이라도 더 사냥하여

지옥으로 물고 들어가고 있습니다.

마귀의 자녀들은

그들 스스로 마귀에게 쓰임 받는 사실조차 모르고 이용되고 있습니다.

방법은 둘밖에 없습니다.

성령님을 받아 성령님의 도움으로 인도되거나,

이들이 떠먹여 주는 것에 의해 분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 받은 분들의 사역이 그래서 필요한 것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결국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아 마시듯

영적 목마름의 갈급한 심령으로 애타게 주님을 찾고 찾아

주님께서 그 갈급한 심령을 만나주시는 놀라운 역사가 최고의 방법입니다.

갈급하고 애통한 심령으로 주님을 찾고 계속 찾으십시오.

주님은 그런 심령을 애타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시편 42편1-2)

 

 

랑별파파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사람들)




 

 

출처 :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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