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노을을 그리고 싶다.- 서병태
일출을 기다리고 있다. 하늘과 바다가 희뿌옇게 밝아 오면서 오징어잡이 배들의 집어등 불빛이 차츰 현란한 광채를 잃어 간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일출은 시작되는가 싶으면 순식간에 그 장관이 드러나니까. 바다 속에서 수평선 위로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하는 해는 하늘의 또 다른 해로부터 마중을 받는 듯 끌어 올려 지면서 붕긋 솟아버림을 안다.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 깜깜한 토함산을 기어올라 석굴암 옆에서 바라본 일출이 그랬었다. 그 타원형으로 이글거리던 해와 불타던 바다의 광경을 나는 오늘 볼 것이다.
하늘을 본다. 그러나 샛별만이 외롭다. 한 시간이 지나도록 붉은 기운인 듯 아닌듯한 처음의 빛깔은 더 이상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일출 시간은 이미 한참이나 지났다.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한다. 날씨가 그다지 흐리지 않게 보인 것은 이쪽 지역의 사정이고, 먼 하늘과 먼먼 바다는 해를 완전히 감추고 있다. 1998년 1월1일 새벽, 속초앞 바다에서 맞이하는 해돋이다.
바람이 분다. 포근한 날씨라 차갑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겨울의 바닷바람인데, 내가 이렇게 꼼짝 않고 서 있는 것은 그만큼 일출에의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백사장이 바다 쪽으로 향한 바위 돌출부의 끝에 선 것도 떠오를 해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려는 마음 때문이다. 바위돌기에 서서 기다리는 새해맞이 해돋이!
한 순간, 청산죠우(成山交)의 바위절벽에 새겨진 ‘천진두(天盡頭:하늘 끝머리)’의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바위돌기가 연상 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인천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는 중국 산둥(山東)반도의 맨 끝 청산죠우, 대륙의 맨 동쪽에 위치한 이곳에 천하를 평정한 진시황이 땅 끝까지 가보겠다며 왔단다. 북쪽의 흉노를 쫓아내어 만리장성을 쌓고, 남쪽으로 베트남의 북부지방까지 정복한 그의 나이 50세 때 이야기다. 황제는 해돋이를 보면서 감격하여 “이곳이야말로 ’하늘 끝머리’로다”하였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에 병을 얻어 객사하게 된다. 그 후 세인(世人)들은 천진두의 뜻을 두고 ‘인생에서 끝나는 일 밖에 안 남았다’라고 해석하였다. 하늘의 끝이니 죽을 일밖에 더 있겠는가. 라는….
권력자 후요우방(胡耀邦)의 친필 ‘天盡頭’가 선명하게 붉은 빛깔로 새겨져 있는 바위에 한 손을 얹고 기념사진을 찍을 때 나는 진시황의 과욕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후요우방은 다녀간 지 1년 만에 실각했고, 쟈오즈양(趙紫陽)도 그 기암절경의 해돋이를 구경하고 돌아가서 그 해에 죽었다는 안내자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진시황의 무망한 욕심을 한참이나 떠올렸었다.
다시 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 바람에 맞서다가 몸을 돌려 등을 바람에 기댄다. ‘바로 이거야. 지금은 바람을 거역하면서 대항할 때가 아니지. 바람이 부는 방향에 순응하는 거야. 새해에는 이상한 바람이 일 것 같아.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래 꼭 30년 만에 경험하게 될 마이너스 경제성장률, 바로 ‘임프바람’이라는 거야. 또, 산꼭대기에는 심상찮은 바람이 불고 있어. 수년 동안 대표이사를 맡았던 그곳에 돌개바람이 찾아왔어. 산 위에 웬 돌개바람? 하지만 이제 하산할 때가 온 거야. 어쩌면 지금 하산을 시작해도 해 저물 때까지 산 아래 마을에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몰라. 그리고 하산 길에 보는 풍광이 더 멋있을지도 모르지. 산을 오를 때 보지 못했던 경치들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박의상(朴義祥) 선배의 시를 외우면서 지금부터 천천히, 재미있게 내려가는 거야.’
스무 살 때에는 어렵게 살 것.
높은 목표에 최선의 단련을 바칠 것.
오십이 넘으면 … 쉽게 살 것.
단순하고 명쾌하게. 그리고 , 언제
죽어도 어쩔 수 없다! 고.
하산을 위하여 계획을 세워야 한다. 지금까지와는 정 반대의 생활을 시작하자. 자주 여행을 훌훌 떠나는 것도 그 중 하나가 되겠지. 일출을 보지 못한 새벽에 나는 불타는 노을, 아름다운 노을을 머릿속에 그리며 천천히 바닷가를 걸어 나오고 있다. ‘天盡頭의 과욕’이 내게 메시지를 던진다. ‘너는 지는 해가 아닌가. 네가 오늘 일출을 못 보는 것을 행운으로 알고 지금부터의 네 인생을 자연에 순응하여 생각하는 거야!’
새해의 첫 아침을 원단(元旦)이라고 한다. 으뜸 중의 으뜸을 뜻하는 ‘元’이 새해 첫날이고, 해가 솟는 모습을 나타내는 ‘旦’이 아침이어서 원단이 새해의 첫 아침인데 새해도 벌써 2월에 접어들었다. 원단의 해돋이 여행에서 받은 예감과도 같은 것들은 하나 둘 현실이 되어 나타나고 있다.
하산이 끝나 마을에 도착하는 날이 천명(天命)을 다 하는 날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을이 얼마나 남았을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유유히 하산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다. 속절없는 황혼을 맞이하기 전에 멋진 노을을 그려내고 싶다.
아름다운 노을! 노을은 구름의 색깔과 형태에 따라 작품을 만든다. 구름 없이 맑아서 곱기만 한 노을은 왠지 슬프다. 언제던가, 멀리 수평선에 해가 걸쳐 있었다. 수평선 바로 위에는 구름 끼 없는 하늘이, 그 위로 가까운 하늘에는 검은 구름 띠가, 또 그 위로 더 가까운 하늘에는 크고 횐 뭉게구름이 피어 있었다. 바다로 떨어지는 붉은 해는 구름 없는 하늘을 곱게 물들였으며, 검은 구름 띠에는 아무런 변화를 주지 않았으나, 흰 뭉게구름에는 주홍빛 찬란한 아름다움을 주면서 떠났다.
나는 이제부터 구름을 준비할 생각이다.
검은 구름은 안 된다.
흰 뭉게구름을 멋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노을을 그려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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