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민 박 서방 - (채홍) 이영숙
‘積善之家는 必有餘慶 이요 不善之家는 必有餘殃 이니라’
선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많은 경사가 있고, 악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많은 재앙이 있느니라.’ 는 사자일구四字一句로 된 덕을 중요시 하는 좋은 글귀다.
덕행이란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행하려는 어질고 올바른 마음이나 훌륭한 인격을 말한다.
지금은 안 계신 친정 부모님께서도 일찍부터 덕행을 솔선수범 하셨다.
1950년 6월25일 사변이 일어난 이듬해에 고향의 시골 작은 마을에 아이하나 딸린 피난민부부가 들었다. 경기도 장단에서 넘어온 젊은 부부는 우리 집 사랑방에 봇짐을 풀고 세간을 차렸다.
6.25사변이 일어난 해에 보기 드물 만큼 큰 흉년이 들었었다고 돌아가신 할머니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씀 하셨다. 가제 남루한 살림은 더 옹색해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연명할 정도였다고 당시를 회상하시곤 했다. 사변 일어나기 전해에 태어났으니까 첫돌도 안 된 나를 돌보시느라 어지간히 애 닳으신듯하다. 할머니의 막내아들의 첫딸인 나를 많이 귀여워 하셨으리라. 그래서 주식량이 부족한 탓에 쑥으로 밥을 하고 쑥으로 간식을 만들어 먹었으니 쑥이 반 식량이었다고 ‘쑥 예찬’이 대단하셨다. 그만큼 약이 되었다는 말씀이었다.
그러던 차에 피난민에게 덜어 줄 양식은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저 고작해야 시부모님 몰래 간장 고추장을 퍼주어 가며 도와준 일이 전부였다고 한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두 집안끼리는 정분이 깊었고, 그 때부터 동네사람들은 피난민 ‘박 서방네’라는 호칭을 붙였다. 북쪽에서 넘어왔기에 친척도 형제도 없이 외롭게 살아가야 했다. 유난히 정이 많고 사람을 좋아하는 어머니와 박 서방네는 친 혈육처럼 지내다가 수양收養을 맺기로 했다.
어머니 열 살 무렵에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보름간격으로 모두 여의셨다. 그야말로 멸문을 당한만큼 큰 아픔을 가슴에 안고 살다 가신 어머니다.
어느 날 그런 어머니에게 길을 가던 스님이 둘째 아들을 수양 보내지 않으면 명이 짧겠다고 예언 아닌 예언을 했고, 들었으니 조바심 하지 않을 어머니는 없을 것이다. 그 당장으로 박 서방 내외에게 상의를 하니 옳다구나 하구 제의를 받아드렸다. 그래서 그 때부터 양부모가 생겼고 아버지는 형님이라 부르고 그쪽에선 아우라고 섬기며 살았다. 양아들인 동생은 그 집으로 들어가 살진 않았어도 아들처럼 자주 들락거리니 외아들로 외롭게 자라던 양養오빠도 우리 형제들에게 살 부드럽게 하여 왕래가 잦았다. 부모님의 따뜻한 정을 모르고 어렵게 성장하여 시집 온 어머니는 자식 일이라면 살을 아끼지 않으셨다.
나도 양어머니와 양아버지가 좋아 노상 가서 살다시피 했다. 양아버지는 동네에서 호인으로 이름이 났었다. 늘 하는 말씀이 “애야 밥 많이 먹어라”!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집에서는 거친 잡곡밥이지만 거기는 사발에 이밥을 고봉으로 퍼주었다. 홀앗이 살림이다보니 집안을 소제해놓아도 어지르는 사람 없이 법당같이 맑았다. 우리 집이 보이는 양지바른 테 마루에 앉아 숙제를 하다가 늦게야 집으로 가곤했다. 햇수가 더해감에 따라 형제 많은 우리 집 살림은 오그라드는데 식솔이 적은 양 오빠네 살림은 날로 번성했다. 워낙 양부모님은 지악하게 알뜰살림을 하셨다.
양 오빠를 일찍 장가보내어 듬직한 올케언니가 들어왔다. 다른 환경에서 시집온 올케 까지도 ‘하늘에서 하강한사람’처럼 우리에게 깍듯이 했다. 우리 형제자매들에게 도련님, 애기씨! 하고 불렀다. 언니가 들어오면서 마루는 더 윤이 났다. 그야말로 파리가 앉으려다 낙상을 할 만큼 쓸고 닦았다.
오빠와 언니사이에선 떡두꺼비 같은 첫아들이 나왔다. 손 귀한 집에 큰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조카는 말을 배우면서 내게 고모~고모하며 따랐다. 귀여운 조카를 업어 주는 즐거움이 하나 더 생긴 것이다.
그 조카는 자라서 의젓한 의학박사가 되었고, 나는 출가를 하여 만날 수 없이 살아가다가 조카가 산부인과 종합병원을 개원하면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오빠 닮은 조카는 늘 웃는 인상이라 내원 환자가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린다.
농군의 아들답게 겸손하고 호탕하여 늘 없는 사람, 불쌍한 사람의 입장에 서서 치료비도 적절하게 받는다고 간호사들의 칭송이 대단하다.
나도 갱년기로 기력이 쇠하여지면, 아미노산정맥 주사라든가 태반주사요법을 받으러 그 곳으로 간다. 그러면 번번이 치료비를 마다한다. “괜찮아요.”하면 그만이다. 할아버지와 부모님으로 맺어진 인연을 빌미로 치료비도 제대로 받지 않고, 계산하지 않는 일이 매번 미안하고 염치없다. 벌써 머리 올이 희끗희끗한 조카는 하얀 가운 입은 중년이 되었다. 그래서 그가 자꾸 어려워진다.
지금도 시내 볼일이 있어 나갔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병원구내식당에 올라가 요기를 한다. 그들도 나를 대우 해준다. 원장이 나서서 나를 누구라고 소개 한 적은 없었다. 그냥 여러 얘기하기 싫어서 고향사람이라고만 하며 들락거린다. 그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할아버지 아버지 닮은 원장의 덕행이 얼마나 품이 너른가를... .
병원직원들, 간호사나 식당도우미아줌마들도 하나같이 원장선생의 품격을 닮기 마련인가보다. 병원에서 부리는 사람들을 함부로 하지 않고 늘 가족같이 대하며 사람을 대접해준다는 것이다.
내가 이런저런 질환으로 여러 병원신세를 많이 지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어떤 의사가 어떤 병을 잘 고치는지 보다는, 의사의 품격을 점철하게 된다.
영, 그런 것 같다 그 병원 원장의 성격이 좀 까다로우면 간호사도 잘 바뀌고 불친절한 구석이 있다.
지금도 고향에서 소일거리로 방앗간을 하는 오빠내외와 가끔 긴 전화통화를 한다. 3년 전에 돌아가신 양어머니의 그리움을. 그러면 고향소식을 보따리 채 풀어 준다. 언니는 아직도 내게 애기씨! 하며 정겹게 대한다. 이 모두가 부모님이 잘 살고 가신 끝이며 덕이다. 부모님은 살아계실 제 사람 됨됨이를 으뜸으로 여기셨다.
“말로 죄짓지 마라” “내가 싫어하는 일 남 에게 시키지 마라” “나 먹기 싫은 음식 남에게 주지 마라” “남이 가진 것 빼앗지 마라”등. 하도 많아서 그때는 그냥 지나는 말로 허투로 듣곤 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일이지만 실천하기란 쉽지 않아서 그토록 강조 하셨나보다.
잘되는 집안은 반드시 위 조상께서 많은 덕을 베푸셨음을 알 수 있다.
이제부터라도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을 삼가며 살 일이다.
남을 시기 질투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다독이며 살 일이다.
장마철만 되면 생각난다. 큰 가마솥에 쑥 개떡 찌는 날이면 식기 전에 어서! 양어머니께 같다 드리라고 빗속으로 나를 내몰던 어머니 얼굴이 빗속에 얼비친다.
쟁반 보따리들 들고 금마면 산비탈 외딴집에서 황토 흙을 짓이기며 밭둑을 지나 신작로를 건너 홍북면 양어머니께 가던 내 모습이 보인다. 수직의 빗줄기속에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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