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茶)와 술 - 한상렬
나는 차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즐겨하는 편이라는 게 낫겠다. 흔히 마시는 차로 칡차나 두향차, 쑥차도 좋다. 중국에 다녀오는 사람들이 사다 준 여러 종류의 차가 있지만, 입맛에 길들여지지 않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그래 대개의 경우 설록차나 커피를 즐겨 마신다. 설록차는 정신을 맑게 하고 담배를 즐겨 피우는 나 같은 사람에겐 목구멍을 부드럽게 하여주어 좋다. 그러나 차라면 뭐니 뭐니 해도 커피가 아닌가. 은은한 커피 향에 묻어나는 그 진한 낭만을 나는 버릴 수가 없다. 함박눈이 소담하게 내리는 겨울 창가에서 아내와 함께 음미하는 한 잔의 커피야말로 무엇하고 바꿀 수 없는 기쁨이다. 깊은 밤 아내가 끓여주는 한 잔의 커피에는 따뜻한 사랑과 정겨움이 있어 더할 나위 없다.
나는 차를 좋아하지만, 술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동서고금을 털어 가장 밀접한 기호식품이 술이건만 어찌된 셈인지 술과 나와의 인연은 먼 친척이다. 인간의 희로애락과 함께 한 최상의 것이 술임에도 나는 그 경지를 모른다. 그러니 불행한 사람 축에 속하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술이 있는 곳에 낭만이 있고, 영웅호걸의 기개氣槪가 있다. 천하를 제패한 기쁨과 승리의 잔이 있으며, 천길 나락으로 떨어지는 슬픔과 패배의 잔도 있으며, 도원桃園의 결의 같은 우정의 술도 있다. 그때마다 아마 잔에는 술이 넘쳤을 게다. 그 넉넉한 부딪힘. 이런 술은 사람의 마음을 몽롱하게 한다. 가까운 벗과의 청담淸談과 어우러지는 한 잔의 술은 우리 마음을 넉넉하게 한다. 그러나 이 또한 넘치면 곤란하다. 그래서 나는 차는 좋아하지만 술은 멀리 한다.
차와 술은 물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차와 술에 의해서 물은 그 양성兩性의 세계를 보여준다. 차는 깨어 있는 물이요, 술은 잠들어 있는 물이다. 내가 술 보다 차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도 이런 데 있는 지도 모른다. 잠들어 있는 물이 아닌 깨어 있는 물에 대한 선호. 애초 술에 익지 못한 이유도 있겠지만, 나는 차를 좋아한다.
전설에 의하면, 차의 나무는 달마의 눈꺼풀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너무 졸음이 와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깜빡 졸았다고 한다. 정신을 치린 달마는 이를 크게 뉘우치고 다시는 수면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제 눈꺼풀을 도려내었다. 그리고는 뜰에 던져버렸다. 놀랍게도 그 자리에서 싹이 돋은 나무 한 그루가 자라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곧 차의 나무라는 이야기다.
그래 선가. 차는 잠을 몰아내는 각성의 물이라 할 만하다. 한밤중에 마시는 차 한 잔은 밤을 꼬박 지새워도 좋을 만치 달마의 눈처럼 깨어나게 한다. 깨어 있는 물. 사람들은 그 깨어있는 물인 차를 마시며 수면의 유혹을 물리친다. 피로한 몸에 활력을 주고 생기 없는 나무에 한 모금의 생명수처럼 생활에 지친 우리를 깨우는 각성覺性의 물이다.
술은 어떠한가. 술은 차와 정반대로 인간의 정신을 몽롱하게 한다. 막막하고 깊은 수면의 우물을 만든다. 술은 도려낸 눈꺼풀이 아니라, 무겁게 닻처럼 내려앉는 두꺼운 눈꺼풀이다. 술은 세계의 빛을 닫아버리고 심해의 해조처럼 흐느적거리는 눈꺼풀이다.
나는 차를 마시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술을 마시는 일은 좋아하지 아니한다. 차는 정신을 맑게 해 주지만 술은 정신을 병들게 하고 타락을 방조한다. 술이 술을 마시고 술이 사람을 마시는 지경이 되어서랴.
우리의 삶은 늘 깨어 있는 것만은 아니다. 삶이란 때로는 차와 같이 깨어 있는 물이요, 술과 같이 잠들어 있는 물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뜨는 이백의 달과 같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슬픈 사람을 달래는 수심가愁心歌만을 부를 수는 없다. 눈물 앞에 안주 한 접시. 이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산인지 바다인지 모든 것들이 서로 끌어안고 수면의 이부자리를 펴서는 안 되리라.
때로는 눈을 뜨고 일어서기도 하며 때로는 눈을 감고 취해버리기도 하는 삶. 그러나 눈을 떠야할 시간이다. 수면을 거부하고 세계와 나를 가로막는 눈꺼풀을 도려내는 아픔을 깨달아야 할 때다.
차와 술이 갖는 의미. 같은 물이면서도 전혀 다른 두 개의 세계를 보여주는 차와 술은 일직선이며 동시에 평행선이기도 하다. 이 둘은 모두가 소중하다. 그러나 언제나 깨어있는 물. 몽롱한 세계를 거부하기 위해 나는 술 보다 차를 좋아한다. 잠들지 않고 깨어있기 위해서다.
(『문학정신』, 1987-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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