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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참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인가?(1)

Joyfule 2014. 9. 25. 08:15

 

 

어떻게 참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인가?(1)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지고지순(至高至純)한 하나님의 복이 되겠지만, 떵떵거리고 호령하며 사는 부자나 누구나 바라고 부러워하는 성공적인 인생으로 살아가지 않더라도 이 땅에서 평안하고 형통하게 살고 싶은 것 또한 우리가 간절히 소망하는 복일게다. 즉,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을 받아 넉넉하고 풍성하게 누리는 것이다. 그렇게만 살아가게 된다면 무엇이 더 바랄 것이 있으랴? 천만다행으로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것을 공급해 주실 것을 성경에서 약속해 주셨다. 다만 우리가 이러한 약속을 얻어 누리기 위한 하나님의 원칙을 깨닫고 삶에 실천하기만 하면 될 뿐이다.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해서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완벽하고 온전하게 행하지 못하더라도, 애쓰고 힘쓰는 모습만 보이더라도 자비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넉넉하고 풍성하게 채워주시고 싶어 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사랑으로 뭉치신 분이라는 것이 한없이 기쁘고 감사하다.

1.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잠 19:2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당하지 아니하느니라

잠언에 자주 보이는 ‘경외’(敬畏)라는 말은 공경하고 두려워함이라는 한자어이지만, 원어는 단순히 ‘두려움’이라는 말이다. 물론 성경에서 말하는 ‘두려움’은 공포의 대상을 보고 겁에 질려 무서움에 벌벌 떠는 두려움이 아니라, 전지전능하고 신묘막측(神妙莫測)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 앞에서 드러난 연약하고 죄 많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나타낸다. 이러한 감정은 크나큰 존경과 예배의 표현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어째든,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복을 얻게 되는 아주 기본적인 자세의 시작이다.

예로부터, 유교시대의 가부장제도의 근간을 이루는 아버지는 엄격하고 근엄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속으로는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며 소중하게 여기더라도, 이러한 감정을 숨기고 바른 길을 엄하게 교육하며 따끔한 훈계를 통해 올바른 성인이 되어 사회에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했다.

자녀에게 사랑의 감정만을 나타내고 용서와 너그러움으로만 일관한다면, 나쁜 성품과 잘못된 버릇이 들어 인생을 망치게 될 수도 있기에 엄한 말과 뼈아픈 회초리를 들기를 서슴지 않고 가르쳤다. 그래서 어릴 적에는 대부분 무섭고 엄한 아버지라는 인상을 가지게 되었으나, 나중에 성인이 되어 아버지의 진면목을 뒤늦게 깨닫거나 자신도 자녀를 기르면서 엄한 아버지의 회초리 뒤에 감춰진 진한 사랑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며 그리워하기도 한다.

부모로서 누구나 사랑스럽고 소중한 자녀였지만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 원치 않았지만 행복한 자녀의 장래를 위해 필요했기에 엄하고 무서운 아버지라는 나쁜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우리네 아버지는 아직 어리고 철이 없어 미련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저지른 자녀이지만 남다른 사랑을 감추고 있었기에, 이를 참고 견디며 눈물어린 회초리를 들어야 했다.

우리는 하나님을 부를 때 습관적으로 아버지라는 호칭을 앞뒤에 덧붙인다. 당신의 자녀를 사랑하시지만 엄격하게 가르쳐서 행복한 삶과 생명의 길을 바르게 인도하여야하기에, 하나님은 이 땅에서의 우리네 아버지와 비슷한 위상과 역할을 갖고 계시다. 그렇지만 어찌된 일인지, 우리나라의 교회에서는 두려워하는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을 가르치기보다 친근한 모습을 지니고 용서와 사랑에 넘치는 하나님만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 같아 참 안타깝다. 하나님이 마치 삼촌이나 동네 아저씨처럼, 만나면 언제나 어리광을 받아주고 장난감이나 과자를 사주는 산타할아버지와 같은 인상으로 비쳐진다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뼈를 깎고 살을 저미는 아픔을 동반하는 깨끗한 성품으로의 변화와 인내와 고통뿐인 십자가의 길을 담담하게 갈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나라의 교인들은 점점 이기적이 되어 이웃에게 매몰차게 대하며, 시련과 고난에 쉽게 넘어지는 연약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고,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기회주의적이고 탐욕적인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 교회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분의 뜻이 무엇인지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제대로 교육시키지 않은 책임은 교회지도자들의 몫으로 남겠지만, 성경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기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지 않는다면 성경에 약속한 하나님의 복은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왜 하나님이 두려운 분인가?
이가 딱딱 마주치는 한기를 느끼며 소름이 오싹 끼치는 두려움과 공포를 느낄 때는 언제일까? 아마 자신의 생명이 아주 위태롭다는 것을 알아채는 순간일 게다. 이제 막 군대에 소집되어 첫 전투에 참여한 신참내기 이등병이 포위망에 빠져 시시각각으로 좁혀 들어오는 적군의 함성소리를 듣는 순간일 테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트럭의 철장 속에서 비릿한 피 냄새를 맡고 왠지 두렵고 낯선 환경을 보며 죽음이 스멀스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짐승이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 보아도 도저히 도망칠 수 없는 상황에서 험악한 죽음을 맞닥뜨려야 하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일생에서 가장 무서운 때이다. 자신을 죽이려드는 대상이 험악한 인상에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고 눈곱만큼의 감정이나 최소한의 배려도 없이 잔인하게 죽인다면, 희생자가 느끼는 공포는 가히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 가해자가 하나님인 경우를 생각해보았는가? 불경스러워 입에 담지도 못할 소리라고 버럭 화를 내겠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잔인하게 죽음을 당한 이는 성경에 적지 않다. 노아시대에 노아의 가족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홍수로 불어 난 물에 빠져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몰사 당했다. 그들을 연일 그치지 않고 내리는 장대비로 온 동네가 불어난 물에, 가축이 둥둥 떠다니는 모습을 물에 잠긴 지붕위에서 풀린 눈으로 무기력하게 쳐다보아야만 했다.

공포에 지친 시간도 그리 오래지않아 얼마 후에 그들도 성난 파도 속에 휩쓸려 버렸다. 세찬 비가 쏟아지면서 물이 불어 빠져죽기 까지 아마 며칠은 걸렸으리라. 그 며칠 동안 그들은 그토록 아끼는 재산과 사랑하는 가족을 하나하나 앗아가는 홍수를 보고 느꼈던 두려움을 생각해 보았는가? 승승장구하며 여리고 성을 순식간에 무너뜨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이성 전투에서 참패하자, 슬피 울면서 그 이유를 하나님께 물었을 때 파렴치한 범죄가 있음을 알려주셨다.

이에 놀란 이스라엘 전 백성이 모여 제비뽑기를 통해, 유다지파가 뽑히고 자신이 속한 삽디의 가족이 결정되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좁혀 들어오는 압박감 속에서 아간을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순간적인 탐욕을 참지 못한 잘못을 뉘우치기도 하였겠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최후의 순간에 자신의 이름이 거명되고 수많은 사람이 보는 가운데 개처럼 끌려나와 죄가 세세히 밝혀지는 굴욕의 순간도 잠시뿐이었다.

지진이 일어나 땅이 갈라지고 불이 치솟으면서 애꿎은 가축과 아무 죄 없는 가족까지 한마디 비명 속에 깊은 구덩이에 떨어지면서 원한에 서린 아들의 눈동자와 마주쳤을 때, 그의 마음은 때늦은 회한과 지옥에 빠지는 영혼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미 철렁 내려앉았을 것이다. 예수님을 팔아먹은 가룟 유다도, 교회에 바친 재산을 속인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느낀 감정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을 죽인 가해자는 적대국의 잔인한 군사나 난폭한 맹수가 아니라, 우리가 그토록 사랑이 넘치고 자비를 한없이 베푸시는 분이라고만 알고 있는 하나님이셨다.

   마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천수를 누리다 자녀들의 극진한 효도를 받아 안락하게 죽든, 평생을 가난과 고통 속에서 병마와 씨름하다 한 많은 생을 마감하든, 죽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닥치는 진리이다. 문제는, 죽는다는 것이 끝이 아니라는 데 있다. 사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시간을 7,80년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우리가 죽어 저승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은 끝이 없이 영원하다. 그래서 이 땅의 삶이 마치 하루 동안의 가벼운 소풍인 것처럼 노래한 시인도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땅에서의 삶보다 영혼이 영원토록 살아야 하는 거처이다.

 

성경은 이 장소가 지옥이 아니면 천국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크리스천은 죽어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을 소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미래에 거처할 영혼의 장소를 결정하시는 분이 다름 아닌 하나님이시다. 그런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편안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뿐일 것이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며 영혼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있다면, 그분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자가 누가 있겠는가? 감사하게도,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사단과 달리 공포와 두려움을 주어 강제적으로 복종케 하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고 그릇된 길을 가거나, 가장 싫어하시는 죄를 범해도 참고 기다리시며 돌이키고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분이다. 물론 참아주시는 때는 아무리 길어도 이 땅에서 살아가는 기간뿐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생사화복과 저승에서의 영혼을 결정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피조물 된 사람의 당연한 본분에 불과하다. 이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태도
엄청난 힘에 압도되어 두려움에 질린 자가 가해자의 말에 따라하는 행동은 복종이다. 또한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무서움이 아니라, 기가 질리는 영광과 위엄에 압도되어 두려움을 느끼는 자에게 요구되는 행위는 복종이 아니라 자발적인 순종이다.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존재 앞에서, 피조물인 우리가 요구되는 행동은 바로 이 자발적인 순종일 것이다. 하나님은 다른 생물과 달리, 인간인 우리를 특별하게 여기고 종이 아니라 자녀로 친근하게 부르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종은 주인의 체벌과 권위에 못 이겨 복종하지만, 자녀는 부모의 희생과 사랑에 감사해서 순종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와 희생적인 사랑에 기쁘고 감격하여 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의 뜻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기꺼이 순종하는 맘으로 실행하는 데 있다. 
   시 111:10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 되리로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는 것은 예배나 기도, 십일조 등의 신앙행위에 만족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에 숨은 의도, 동기, 목적 등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해야하며 사랑이 넘치는 성품과 깨끗하고 정직한 생활태도를 요구하고 있다. 이 하나님의 뜻은 성경을 통해 제시해 주셨다. 그렇지만 성경지식에 해박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다 아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며 그 말씀 뒤에 숨은 은밀하고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또한 기도로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요청하여 가르쳐주시고 깨우쳐 주시는 능력에 의지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세속적인 세상 사람들과 잘 관계를 맺어 삶에 적용하는 능력도 필요하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온전하게 삶에 적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가르침을 얻으려면 그분의 음성에 수시로 귀를 기울이고 깊은 관계를 맺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아무리 어려운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구하며 열정적으로 찾는다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알려주시고 공급해 주신다고 약속해 주셨으므로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올곧은 마음만 갖추면 될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인지를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고난에 대한 태도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고난이 와도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지 않고 이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특히 자신의 잘못에 의한 고난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좇다가 부득이하게 발생하는 고난일지라도 기꺼이 감수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고난이 오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도망치거나 이전의 불신앙으로 돌아가 버린다. 고난이 주는 고통이나 불편함이 하나님의 존재나 권위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믿음이 선조들은 고난이 닥칠수록 하나님을 더욱 극진하게 섬겼다. 그들은 재산을 잃고 가족과 헤어지는 것은 물론 생명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그들이 맞닥뜨린 고난을 애써 피하려 하지 않고 달게 받으려 했다. 그들의 빛나는 시련은 후에 선교의 씨앗이 되어 무수한 열매를 맺거나 수많은 교인들이 걸어야 할 길을 안내하는 등불이 되었다. 예수님이 팔복의 가르침에서, 가난하고 비천하며 슬퍼하는 자들과 의를 위하여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신 이유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자신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는 자들은 외면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 고난보다 더 큰 복을 주시어 그 행위를 칭찬하시며 위로해주신다. 그래서 고난을 당할 때는 견디기 힘들지만 후에는 달콤한 유익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시 112:1~3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

하나님의 참 복을 받는 가장 기본적인 요건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이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행위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자신이 평생 섬기고 찬양할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자는, 하나님의 맘에 들어 기뻐하시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사랑하는 자녀로 여겨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주시며 어떤 험난한 삶의 여정에서도 보호해 주신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으랴? 그렇지만,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업신여기며 우습게보고 죄와 악을 밥 먹듯이 저지르는 자는 미래가 없다.

이 땅에서 다행스럽게 하나님의 벌을 피해 요령껏 살았을지라도, 천국 문 앞에서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차라리 이 땅에서 두려운 하나님을 체험했더라면 자신의 행동을 돌이키고 하나님께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억장이 무너지고 뼈에 사무치는 불행의 주인공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자는 행복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그 두려움이 자신을 악에서 지켜주며 영원한 불구덩이의 형벌에서 구해주기 때문이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고, 죽어 가게 될 곳을 아는 자는 행복하다.

 

출   처 : 다음 카페 [크리스천 영성학교]

글쓴이 : 신상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