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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간호사들의 해방선언

Joyfule 2023. 11. 1. 14:14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간호사들의 해방선언



내가 있는 실버타운에서 의사출신 노인이 일주일에 한두번 정도 무료로 진료를 하고 있었다. 가지고 있는 기능으로 봉사하는 황혼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실버타운의 직원으로 있는 간호사가 그 진료를 옆에서 보조하고 있었다. 어느 날 노인 의사가 갑자기 진료를 중단하고 실버타운을 떠났다. 나와 친했던 그 노 의사는 침묵하다가 떠나는 이유중의 하나를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진료를 하는데 간호사가 명령을 하는 것 같이 들리는 거예요. 어떻게 간호사가 의사한테 그럴 수 있어요?”

그 노 의사는 오랜 세월 의료계에서 존경을 받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 노의사가 마음이 상한 이유를 대충 알 것 같았다. 우리 세대에는 봉건시대같이 거의 계급의식으로 굳어진 직업 같은 것이 있다. 예를 들면 의사와 간호사라든가 판검사와 서기 같은 것들이었다. 검사와 경찰도 그 비슷한 게 아닐까.

나는 노 의사를 화나게 한 간호사의 입장도 한번 생각해 보았다. 그는 실버타운의 직원이고 노 의사는 실버타운의 시설을 이용하는 고객의 입장이었다. 주체가 되는 직원이 노의사의 봉사활동에 대한 스케쥴을 짤 수 있고 요구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의 의식이 전혀 다른 것이다.

며칠 전 몇몇 법조 선배와 점심을 함께 먹는 자리에서였다. 어쩔 수 없이 법이 화제로 떠올랐다. 그 중 한 분이 이런 얘기를 했다.

“지금 민주당이 간호사법을 개정해서 통과시키려고 하는데 의사들과 간호사들의 투쟁이 만만치 않아. 그동안 간호사들은 의사들한테 신분적으로 정신적으로 억눌려 지냈던 면이 많지. 개인 의원의 경우 간호사는 완전히 하루살이 품팔이 인생이었어. 사용자인 의사가 나가라고 해고하면 그 자리에서 나가야 했어. 그런 업무적인 위치 때문에 의사에게 성폭행을 당해도 말 한마디 못하고 지낸 경우도 많고 말이야. 대형 병원에서도 간호사는 의사보다 한 단계 낮은 신분취급을 당했던 거야. 이번에 개정이 추진되는 간호사법은 의사와 간호사의 관계를 명령 복종이 아니라 상호협력의 대등관계로 선언하는 거지. 간호사의 종속적인 신분을 해방시켜주는 면이 있어. 간호사들의 평생 숙원이 이루어지는 거지. 당연히 의사들이 반발하고 있지. 지금 의사들은 간호사법이 통과되면 진료거부투쟁을 벌이겠다고 으름짱을 놓고 있어. 반면에 간호사단체도 아예 대표들을 국회에 상주시키면서 법안통과운동을 하고 있고 말이야.”

파도와 파도가 부딪쳐 물거품을 일으키듯 사회세력들이 서로 부딪치는 장소가 국회였다. 정치는 그들을 조정하는 역할이고 법은 그 결과물이었다. 그 정치는 어떤 원리에 따라 움직일까. 나는 조용히 그 선배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의사가 십만명인데 비해 간호사는 오십만명 그리고 간호조무사가 삼만명 정도 돼. 내년 총선을 앞두고 법안을 발의한 민주당은 오십만이 넘는 표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지. 윤석열 대통령은 그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검토하고 있어. 정치적으로 미숙해서 법조문만 보일수도 있을 거야. 민주당은 그런 무더기표를 얻을 법안을 잘 발굴하고 있어. 그런 면에서 국민의 힘보다 뛰어나지”

그 말을 들으면서 다른 법조 선배가 거들었다.

“의사와 간호사같이 검사와 경찰의 관계도 비슷해요. 몇 천명의 검사에 비해 경찰관의 숫자는 십만명이넘죠. 민주당은 검찰 수사권을 박탈하는 입법을 해서 경찰의 숙원을 풀어줬어요. 그런데 검사 출신 윤석열 대통령은 시행령을 고쳐서 다시 수사권을 검찰로 되돌려놨죠. 경찰의 자리인 국가수사본부장을 검사출신으로 앉히려고 했죠. 행안부에 경찰국을 만들어 경찰인사권을 행사하게 만들었죠. 경찰이 대통령에게서 마음이 떠나게 만든 거죠. 경찰관의 표를 다 잃어버린 겁니다.”

법의 뒤에는 정치가 있고 수많은 아우성과 절규 그리고 원한이 있었다. 어떤 법조문에서는 피 냄새가 나기도 하고 한숨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젊어서 법을 공부할 때는 몰랐던 법의 어두운 이면들이 이제야 보이는 것 같다.

전쟁이나 혁명을 겪지 않아도 법으로 세상이 완전히 뒤집어 질 수 있다. 헌법에서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가 빠지면 이념적 지향이 달라질 수 있다. 세법의 조문을 바꾸면 부자의 재산을 사실상 몰수할 수 있고 보통사람들을 강제노동을 시킬 수도 있다. 받은 임금중 세금만큼은 국가를 위해 노동을 한 셈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법은 하늘이 인간에게 내려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자연법이라는 성스러운 존재도 인정됐었다. 지금의 법은 선동되어 분노한 군중의 숫자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다. 국민 다수의 뜻이 소수의 돈 가진 자에 의해 술상에서 취한 상태에서 만들어 질 수도 있다. 시대의 바람에 휘둘리지 않는 좋은 법들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