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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암은 신의 메시지

Joyfule 2023. 11. 2. 13:33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암은 신의 메시지



마음공부를 하는 대학후배로 부터 책을 한 권 선물 받았다.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가’라는 제목이었다. 속표지에는 볼펜으로 직접 그린 토끼그림과 함께 ‘저자 정현채’드림이라고 싸인이 되어 있었다.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로 죽음학의 권위자였다. 유튜브를 통해 그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종교가 아닌 과학자의 시각으로 죽음을 알고 싶어 수많은 논문을 섭렵했다고 한다. 그는 인간은 눈에 보이는 육체이고 영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뇌가 작동을 멈추면 우리의 의식도 사라진다고 생각했었다고 했다. 그러다 자신이 암진단을 받고 죽음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고 했다. 죽음은 사방이 꽉 막혀있는 벽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죽음을 회피하지 말고 직면하기를 권한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익숙한 삶에서 새로운 변혁으로 이끄는 ‘신의 한수’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는 귀중한 의미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나 역시 사십대 중반 암이라는 진단을 받아 본 적이 있다. 그 순간 주위가 온통 회색으로 변하고 앞이 캄캄해졌다. 언젠가 죽음이 오리라는 건 알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왜 하필이면 나지? 하고 저항했다. 그렇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수술을 받으러 가는 날이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봄의 산 위로 연두색이 수채화처럼 번지고 있었다. 투명한 파란 하늘이 팽팽했고 하얀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흑백의 세상에서 갑자기 원색이 튀어나오는 경이를 느꼈다.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운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 아름다운 지구별 자체가 경이고 내가 받은 선물이었다. 정말 귀중한 걸 놓쳤다는 후회가 들었다.

바닥에 눕힌 십자가 같은 수술대 위에서 손발이 묶인 채 발가벗겨졌다. 실험실의 청개구리라는 소설의 제목이 떠올랐다. 그게 내 존재의 본질 같았다.

수술실 안은 락 음악으로 가득 차 스피커옆은 살이 타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곳은 살아있는 의사들의 흥겨운 파티장 같았다. 그들은 흥겨운 이쪽 세계의 사람들이었고 나는 저쪽 세계로 한발 들여놓은 쓸쓸한 상태였다. 수술실의 하얀 천정을 보면서 지난 세월을 떠올렸다. 내가 살아온 세월이 슬라이드 같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또 다른 장면이 나타났다. 후회가 엄습했다. 나는 이기주의자였다. 나만 잘되기 위해서 살아왔다. 이제 그 실체인 몸이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이기주의자에게 그 자신이 없어지면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간다는 걸 알았다. 가족한테 친구들한테 촉촉한 사랑 한줌 남기지 못한 게 아쉬웠다.

기계음이 윙윙 들리고 모니터에서 생명을 표시하는 녹색의 그래프가 톱니를 그리고 있었다. 의사가 링거줄에 마취액을 주입하는 게 보였다. 내 의식의 마지막이란 생각이 들었다. 기도하고 싶었다.

‘하나님 좋은 부모를 만나 잘 교육받고 잘 살다가 갑니다. 감사했습니다.’

갑자기 수술실 천정이 좌우로 쫙 갈라지면서 나는 바닥없는 검은 골짜기 아래로 한없이 떨어졌다. 의식의 소멸이었다. 잠시후였다. 나는 어딘가에 있었다. 그곳이 어딘지 전혀 감지할 수 없었다. 밀도 짙은 어둠으로 꽉 찬 어떤 창고안 같았다. 여기가 어디지? 내가 왜 여기에 있지? 나는 당황하고 의아했다. 저승인가? 나는 창고 속의 작은 쥐처럼 그 구석에 납짝 엎드려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아주 먼 곳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사람이 얘기하는 소리 같았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환한 세상이 펼쳐지면서 나를 내려다보는 의사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동맥과 정맥을 끊고 몸에 개스를 주입하고 쓸개를 떼어내는 여섯시간동안의 수술이 끝이 난 것이다. 다음날 조직검사결과를 본 의사는 암인 걸로 확신했는데 커다란 폴립이었다고 결과를 알려주었다. 서울대병원부터 여러 병원의 의사가 암이라고 확진을 했었다. 하나님이 암을 폴립으로 바꾸신 것일까. 사십대 중반에 있었던 나의 임종 연습이었다. 암은 내 인생항로를 바꾸라는 그 분의 메시지였다. 나는 새로 태어났다. 가족과 함께 밥을 먹는 평범하고 작은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됐다. 그게 위선이라고 할지라도 이웃에게 이슬같은 사랑 한 방울 뿌렸을 때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온기를 느끼게 됐다. 세상에서의 출세나 돈 명예는 그냥 껍데기를 장식하기 위한 옷 같은 것이었다. 옷보다 몸통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고 할까. 나는 그 다음부터 십 오년간 이 지구별을 흘러다녔다.

죽음을 직면하는 임종 연습은 삶의 귀함을 깨닫게 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