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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그래 그럴 수 있어

Joyfule 2024. 3. 8. 00:46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그래 그럴 수 있어


나의 법률사무소를 찾아와 호소하는 사람마다 “세상이 왜 이래요?”하고 말하곤 했다. 정의가 강물같이 흘러야 하는데 왜 그렇지않느냐고 내게 따졌다. 내가 매일 법정에서 보는 세상은 더러운 흙탕물로 가득 찬 늪 같은 세상이었다. 나는 내게 따지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본래 그런거야 그럴 수 있어’라고 대답해 주고 싶었다. 나는 혼자서만 고통을 받는 것처럼 생각하고 아이같이 투정 부리는 사람들이 싫다. 그 누군들 아프지 않아본 사람이 있을까.​

가수 양희은 씨가 ‘그럴 수 있어’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는 기사를 봤다. 삶에서 일어난 불행에 대해 토달지 않으려는 그녀의 입버릇 같은 말이다. ​

내가 고등학교 이학년 시절 어둠침침한 독서실에서 양철도시락의 찬밥을 점심으로 먹고 몸이 나른해질 때였다. 가수 양희은의 ‘아침이슬’이라는 노래가 깨진 유리창 틈으로 흘러들어와 마음속에서 출렁거렸다. 집에서는 항상 라디오를 틀어놓고 공부를 했다. 라디오 속에서 진행자 양희은이 항상 누군가를 보듬고 누군가를 위로하는 말을 하곤 했다. 그녀는 세상을 향해 아름다운 노래를 쏟아내고 또 라디오 방송 진행자로 마음이 얼어붙은 나 같은 사람에게 따뜻한 위로를 전해주었다. ​

대학에 입학하자 친구들과 함께 명동에 있는 ‘오비 캐빈’이라는 생맥주집을 갔었다. 작은 무대에서 양희은씨가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입고 있는 청바지와 하얀운동화에서 알 수 없는 청순함이 느껴졌다. 머리로 살짝 가린 앞이마와 약간 크기가 달라 보이는 눈에서 독특한 매력을 느꼈다고 할까. 알고 보니 그녀는 내 또래였다. 나보다 한 살 위였다. 같이 간 친구가 그녀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달라고 짓궂게 떼를 쓰기도 했다. 마음이 들뜬 대학생이었던 우리의 눈에 그녀는 신나고 행복한 시대의 아이콘 같아 보였다. 세월이 한 참 흐른 후 우연히 한 방송에서 그녀가 인터뷰하는 걸 들었다. ​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양장점을 하는 엄마와 살았죠.​

내가 재수를 할 때 엄마 가게가 불타 버린 거예요. 우리는 갑자기 거지가 됐죠. 그때 동생 희경이가 하는 말이 그냥 집에 걸어올 때는 몰랐는데 버스 토큰이 없어서 걸으니까 너무 힘들다고 하더라구요.”​

그녀는 거리낌 없이 과거를 토해내고 있었다. ​

“돈을 벌기로 했어요. 송창식형에게 부탁했죠. 그랬더니 무대의 자기 노래시간을 조금 남겨 내가 노래 부르게 해주더라구요. 그게 내가 평가받는 오디션이었죠. 경영자인 이종환 선생이 다음날부터 노래 부르라고 하더라구요. 내가 당장 집에 쌀을 구해가야 할 형편이었어요. 그래서 염치없이 한달 출연료를 미리 주실 수 없느냐고 했어요. 그랬더니 이종환선생이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보시더라구요. 그때 내 뒤에 있던 송창식 형이 눈을 꿈쩍 꿈쩍 한 것 같아요. 이종환선생이 돈을 주더라구요.”​

그녀는 꾸역꾸역 과거를 잘 토해냈다. 그래야 속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의 노래에는 잘 익은 엷은 슬픔이 배어 있었다. 삶의 깊은 강물을 건너야 노래도 깊어지나 보다. ​


나는 가수 전인권을 변호한 적이 있었다. 그의 노래에도 깊은 우수와 어떤 애잔함이 담겨 있다.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열아홉살때 친척 형이 기타를 치는 걸 봤는데 멋있더라구요. 중고기타를 구해서 하루 종일 기타만 치고 살았어요. 잠자는 시간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음악이었어요. 가난했을 때 저는 기타와 전축을 가지는 게 소원이었어요. 큰 욕심은 없었어요. 그저 같이 음악을 즐기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 하고 있을 때가 정말 행복했어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업소에 나갔는데 천대와 푸대접이죠. 음악은 괜찮은데 안경을 쓰고 못생겼다고 쫓겨나기도 했어요. 그러던 어느 비오는 밤이었죠. 어두웠던 과거만 사랑할 수 있다면 내일을 향해 행진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날 밤 작사를 하고 곡을 붙였어요. 그게 출세작 ‘행진’이죠. 저는 음악이 좋았어요. 그 외에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내가 그를 변호할 때 가수 양희은씨가 내게 탄원서를 보냈었다. 전인권을 용서해 달라는 내용이 담긴 탄원서를 담당 재판장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가수 양희은씨는 어느 날 문득 기적이 툭툭 그에게로 다가왔다고 한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을 노래로 갚으며 하늘에 삿대질을 하던 이십대의 어느 날 클럽에 노래 들으러 온 선교사가 빚을 갚아주더라고. 순간의 도움들은 그렇게 불현듯 바깥에서 찾아왔다고.​

삶의 결을 같이하는 가수들끼리는 진한 우정과 동지애가 있는 것 같았다. 가수 전인권씨도 법의 늪에서 빠져나와 다시 노래를 불렀다. 양희은씨 책의 제목같이 ‘그럴 수 있어’하고 살면 답이 없는 인생문제에 부딪쳐도 침착해 질 수 있지 않을까. 인생은 해결해야 할 문제 덩어리가 아니라 맛보고 음미해야 할 아름다운 미스터리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