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아버지의 책장
아버지의 책장에는 고전인 문학책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아버지의 보물들이었다. 아버지는 퇴근을 하면 잠들기 전까지 책들을 읽곤 했다. 더러 원고지에 글을 써서 몰래 숨겨놓기도 했다. 아버지에게는 문학적취향이 잠재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까까머리 검정교복의 중학생때였다. 나는 학원에도 체육관에도 다니고 싶었다. 친구들이랑 어울려 빵도 사 먹고 싶었다. 그렇지만 돈이 없어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시간만 무한대로 있는 것 같았다. 집에 있을 때면 고여있는 시간을 밀어내는 유일한 방법이 아버지의 책들이었다. 아버지의 책 안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나같이 심심한 ‘톰 소여’나 ‘학클베리핀’이 있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의 같은 반에는 괴물 같은 존재가 있었다. 그는 토스토엡스키와 만나 이미 그의 작품에 대한 논문을 써서 학교신문에 기고했다. 그 정신세계를 따라가기 힘든 천재들이 있었다. ‘TV 가이드’란 잡지에 매달 글을 올리는 한 학년 위의 중학생도 있었다. 존경스러웠다. 그는 나중에서울대 불문과 교수가 되고 문단을 이끄는 소설가가 되기도 했다.
아버지가 저세상으로 가기 얼마 전이었다. 병실에서 무심히 천정을 바라보던 아버지에게 내가 말했다.
“아버지가 미뤄뒀던 고전문학을 아직 다 읽지 않았잖아? 오래 살면서 그 숙제를 다 해야 하지 않아?”
아버지는 퇴직을 한 후 노년에 그 책들을 읽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운명은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나보고 읽으라는 암시가 들어있는 미소 같기도 했다. 아버지가 저세상으로 훌쩍 건너가고 아버지가 자식같이 애지중지하던 낡은 책들을 내가 물려받았다. 나는 그 책들을 읽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느꼈다. 새로 인쇄되어 나온 깨끗한 책들도 많았다. 그렇지만 내게는 아버지의 낡은 책들이 귀했다. 그 책들은 납활자로 인쇄한 깨알 같은 글씨들이 페이지마다 상하단으로 들어차 있었다. 낡은 종이는 만지면 바스러져 가고 오래된 먼지가 끼어있어 책장을 펼칠 때마다 재채기가 나고 콧물이 쏟아졌다. 먼지 알러지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독서용 확대기까지 구입해서 누렇게 찌든 아버지가 남긴 고전들을 고시공부하듯 독파해 나갔다. 공책을 옆에 놓고 책 속에 들어있는 사상들을 메모했다.
톨스토이의 작품 안나카레니나에 나오는 레빈이라는 인물에게서 신의 손길이 움직여주는 노동을 알았다. 토스토엡스키의 소설 속 죠시마 장로의 내면에 들어있는 그 분을 보았다. 아버지의 책 속에는 전혀 다른 세계와 다른 인물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변호사를 하면서 살다보면 세상의 속된 무리들과 자주 마주쳤다. 그들은 마치 날아다니는 파리떼와 같이 가는 곳마다 우글거리고 모든것을 더럽혔다. 책도 마찬가지였다. 쓰레기 같은 악서(惡書)가 매일 쏟아져 나와 서점의 매대를 점령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남겨준 책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 안에는 현인들, 민중 속에 탑처럼 우뚝 솟아있는 영웅들, 진리를 깨달은 성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리가 백년 이백년 후에 태어난 나를 만나기 위해 기록으로 살아 있었다. 그들의 슬기로운 생활에서 배어나온 진귀한 사상을 나는 아버지의 책에서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바닷가에 있는 노년의 서재에서 침침한 눈으로 책을 계속 읽고 있다. 인간은 소가 되새김을 하듯 지식을 반추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많은 책을 읽어도 그것으로 된 게 아니다. 좋은 지식을 되풀이해서 삭이고 자기의 것으로 소화시켜 피 속을 돌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나는 그동안 검증된 질 높은 책을 다시 보며 그 영양을 흡수하고 있다. 밭에서 일을 마친 소가 한밤중 알전구 아래서 목에 있는 종소리를 울리며 되새김을 하듯이. 돌이켜 보면 책이 나를 감화시키고 만들어 준 것 같다. 나는 중학교에 다니는 손녀가 하나를 읽어도 깊이있는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좋은 책은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데 시험에 쫓기는 손녀가 어떤지 모르겠다. 나의 경험이 나중이라도 내 아이들이나 손자 손녀 내가 알지 못하는 후손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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