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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삶을 사랑하는 노인들

Joyfule 2024. 2. 16. 14:49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삶을 사랑하는 노인들


빨간 작은 등대와 항구 그리고 바닷가의 푸른 숲이 어우러진 곳에 나만의 수행처를 구했다. 앞으로는 그곳에서 기도하고 글 쓰고 공부를 할 예정이다. 며칠 동안 그곳에 가서 청소를 했다. 어제는 실버타운에서 알게 된 두 노인이 나의 작업을 돕겠다고 따라나섰다. 그 마음들이 고마웠다. 가는 차 안에서 내가 핸들을 잡은 노인에게 물었다.​

“혼자 사는 노년이 어때요? 즐겁습니까?”​

그는 강릉의 한적한 숲 근처 아파트를 얻어 혼자 몇 년 살다가 얼마 전에 내가 있는 동해의 실버타운으로 옮겼다. 그때그때 밥을 해 먹었는데 남은 걸 처리하기가 귀찮았다는 게 옮긴 이유였다. 그것도 혼자 사는 어려움의 하나인 것 같았다. 밥이나 반찬이 남으면 버릴 수도 없고 그게 없어질 때까지 매일 먹기도 싫은 것이다. 그가 노년의 생활에 대한 감상을 이렇게 표현했다. ​

“요즈음은 선물 받은 하루하루를 고마운 마음으로 지냅니다. 일생에 지금같이 부담 없고 마음이 편한 시절이 없어요. 어떤 시인이 말한 것처럼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것 처럼 살려고 애써요. 젊어서는 목표를 정해놓고 그걸 완수하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기계처럼 살았죠. 지금 생각해 보니까 일하러 세상에 나온 것도 아니고 성공하려고 나온 것도 아닌 데 말이예요.” ​

그 말을 듣던 옆의 노인이 화답했다.​

“맞아요. 우리는 이 세상에 놀기 위해서 나왔어요. 아주 귀중한 기회죠. 나는 평생을 비행기 기장으로 여객기를 몰고 세계를 날아다녔어요. 오늘은 이나라 내일은 저나라 세계 오십개국 도시들을 다니느라고 정신이 없었죠. 그러다가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혼자 지내다 보니 이 삶이 얼마나 귀한 건지 이제 알았어요. 같이 있을때는 모르다가 반쪽이 되니까 아내가 소중한 걸 알겠더라구요. 영원히 같이 있는 걸로 착각했었죠. 우리가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기 위해 번호표를 받고 몇백년을 기다린 영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삶을 하늘로부터 선물 받고 지구에 와 있는 거죠. 이 노년의 삶을 생각해보니까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휴가증을 끊어 주신 거 같아. 그 기간을 잘 즐기면서 지내야죠. 참 우리 집사람이 살아있을 때 동양화를 그렸어요. 그 덕에 그림들을 옆에서 좀 봤는데 예전의 산수화 속 초막에서 무심히 흘러가는 시냇물을 내려다보는 노장철학의 노인들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인생에 실패하고 산에 숨어서 세상을 빈정거리는 은둔자쯤으로 여겼죠. 지금 세상에도 사람이 싫어서 산속에 숨어 사는 자연인들이 가끔 방송에 나오잖아요? 그런데 깨닫고 보니까 그게 아닌거야.”​

두 노인은 내 수행처의 방에 책상과 걸상을 옮겨다 주고 물걸레로 바닥을 깨끗이 치워 주고 갔다. ​

젊은 시절의 친구들이 멀어져 가고 노년의 친구들이 다가온다. 옥계 바닷가 작은 집에 살면서 한시를 짓는 노인도 최근에 만난 마음의 친구다. 바닷가에서 처음 만나 짧은 시간 대화를 나누었지만 금세 영혼이 교류되는 것 같았다. ​

나는 요즈음 그런 현대판 은자들을 종종 만난다. 그들은 중소도시에서 칩거생활 비슷하게 하면서 아침에 눈 뜨면 기도하고 텃밭에서 상추나 고추를 기른다. 밤이면 책을 보고 시를 짓기도 한다. 더 이상 이익에 매달리지 않고 맑은 정신으로 살려고 하는 것 같다. 귀촌이나 전원생활을 하면서도 세속을 떠나지 않고 인간성을 찾는 삶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할까. 그들은 현대판 도연명이 아닐까. 농사꾼 시인이었던 도연명은 권세나 사회적 명성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술과 전원을 노래한 조그만 시집과 몇편의 수필 자손에게 보낸 편지와 기도문이 남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의미는 한없이 깊었다. 그는 인간세상을 등진 은자는 아니었다. 그가 피하려고 했던 것은 정치였을 뿐 인생 그 자체는 아니었다. 그에게 아내나 아이들은 너무나 소중한 존재였다. 뜰 안에 뻗은 나뭇가지며 정든 언덕 위의 소나무까지 그는 애착을 느꼈다. 그는 아무것에도 걸리는 것이 없고 근심 없는 인생을 보냈다. 그리고 현명하고 명랑한 늙은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야말로 진실로 삶을 사랑한 인물이 아니었을까. 노년의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과 사물을 보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감사하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