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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인생은 즐거워야

Joyfule 2024. 2. 17. 16:47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인생은 즐거워야


어제저녁 동해시의 외곽 기차길 옆 작은 중국음식점을 찾아갔다. 서울서 내려온 청년 셰프가 혼자 운영하는 작은 가게 같았다. 그 가게에서 추천하는 찹쌀탕수육과 짜장면을 주문했다. 하얀 찹쌀옷을 입고 잘 튀겨진 고기에 야채가 가득 섞여 있었다. 아삭거리면서 적당한 저항감이 있고 새콤달콤한 맛이었다. 짜장면도 기존의 틀을 벗어난 것 같았다. 양파와 야채를 볶지 않고 체를 썰고 칼금이 잘게 난 오징어 조각들이 섞여 있었다. 청년셰프가 내 옆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내 표정을 살폈다. 맛을 칭찬해 주자 아직 여드름 자국이 보이는 청년 셰프가 얼굴이 환해지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딤섬의 여왕이라는 유명한 셰프에게서 배우고 동해로 내려왔습니다. 지방 사람들의 입맛이 보수적이라 아직 딤섬을 내놓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따금씩 작은 맛집을 찾아다니는 새로운 즐거움을 개발했다. 전에는 맛집을 찾아가는 사람들을 시간낭비라고 욕을 했었다. 가난하던 시절 음식은 맛으로 먹는 게 아니라 배를 채우면 되는 거였다. 군대 훈련시절 식사 시간이면 구대장이 삼분 이내에 식사를 끝내라고 했다. 그것도 전쟁시 번개같이 배를 채우는 훈련이라고 했다. 사회생활을 할 때도 나쁜 음식에 익숙해 지는 게 수양의 한 방법이라고 인식했었다. 그런 인식이 백팔십도 전환된 것이다.​

일본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수필에서 그는 모든 걸 즐거움을 기준으로 판단한다고 했다. 이게 내게 즐거움을 주는 것일까를 생각해 보고 행동한다고 했다. 그 즐거움이라는 단어가 물결이 되어 내 마음 기슭을 건드렸다. 그의 말이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향기롭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즐거움이었다. 그 즐거움을 위해 시간과 정성을 쏟는 게 뭐가 어떻단 말인가? 그걸 비난하던 건 나의 고정관념이었다. 나는 요즈음 많은 즐거움을 발견하고 있다. ​

해변 모래사장을 맨발로 걸으면서 파도 소리를 듣고 수평선에서 피어오르는 흰 구름을 본다. 방에 물결처럼 흐르는 바이얼린 연주를 들으면서 하얀 공책에 시를 쓰면서 깊은 평안함을 느낀다. 가족과의 단란함도 친구와의 우정도 모르는 독자와의 마음의 교류도 그 모두가 즐거움이다. 마음이 바뀌니까 주변의 수많은 즐거움들이 보인다.​

그렇다면 왜 전에는 즐겁지 않고 걱정과 근심을 하며 초조하게 살아왔을까. 젊은 시절 나의 인생관은 노력해서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남에게 인정받아야 하고 어떤 지위에 가 있어야 하고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어야 했다. 정상에 꽂힌 성공이라는 깃발만 보이고 가는 길 옆에 피었던 작은 들꽃이나 푸른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파란 하늘에 흐르는 하얀 구름은 보이지 않았었다. ​

너무 지나치게 어떤 목적을 설정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인생에 그렇게 꼭 목적이나 의의가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라며 살 수는 없었던 것일까. 인생은 즐기려고 태어난 것이지 그것 이외에 무슨 다른 목적이 있어야 했을까. 살아보니까 인생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즐겁기 위해 사는 게 맞을 것 같다.​

종교적인 고정관념이나 회의도 나 자신을 묶는 멍에가 된 것 같다. 이 세상은 마귀의 지배하에 있고 그 속에서 우리는 외국인이었다. 우리는 이 세상이라는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 본향인 천국으로 가야하는 나그네였다. 불경을 봐도 인생은 고해라고 하면서 참고 건너가야 했다. 험한 세상을 건너가 다른 세계로 가는 게 구원이라는 인식이었다. 교회를 가면 구원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삶의 즐거움은 그다지 말하지 않았다. 거기서 제시하는 천국도 막연했다. 인간은 천국에 가서 무엇을 하는지 어떤 즐거움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셋째 하늘에 갔다 온 사도 바울처럼 묘사가 불가능해서일까. 단테의 신곡을 읽어봤다. 지옥과 연옥은 아주 생생하게 묘사됐는데 천국은 안개 낀 듯 아주 희미하다. 그에 비해 마호메트는 아주 구체적이다. 파란 풀과 맑은 물이 흐르고 늙은이는 다시 젊어지고 미인들이 시중을 드는 광경이 전개되고 있었다. 예수는 우리를 멍에와 굴레에서 자유 하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그 말을 믿는다. 하늘나라는 눈에 보이는 삼차원에 머무는 것 만은 아닐 것 같다. 셋째 하늘인 낙원과 지옥은 내 마음속에도 존재하지 않을까. 소소한 즐거움을 찾는 평안하고 감사한 인생 그게 낙원이고 천국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