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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청담동 부자 노인

Joyfule 2023. 10. 14. 00:50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청담동 부자 노인



멀리서 내가 사는 바닷가로 마음의 벗 부부가 찾아 왔다.

같이 노년의 헐렁한 시간을 보냈다.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났다. 해변의 작은 레스트랑에서 함박스테이크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레스트랑의 투명한 유리창 저쪽에서 하얀 물결을 얹은 파도가 안으로 들어올 것 같았다. 벗은 성실한 은행원으로 근무하다가 사업가로 변신했었다. 그의 아내는 동네 약사로 일하면서 아이를 키웠다. 그 부부는 주일이면 교회에 나가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했다. 남들은 은행원이었던 그가 사업가로 변신한 것을 보고 걱정했다. 주변머리가 없어서 곧 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부부에게 폭포수같이 재물을 쏟아부어 준 것 같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그들은 엄청난 부자가 됐다. 본인들 말로는 대충 이천억 정도 있는 것 같다고 내게 말했다. 그 부부는 다른 부자들과는 달랐다. 세금을 또박또박 냈다. 탈세를 해서 눈치보며 불편하게 살기 싫다는 것이었다. 원래 가난하게 출발했으니까 다시 가난해져도 상관없다는 식이었다. 

그들은 부자가 됐는데도 자신들에게 무서울 만큼 검소했다. 그러면서도 남에게는 넉넉한 편이다. 얼마 전에도 그 부부는 남모르게 시리아 난민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배워주는 체육관 건물을 만들어 주었다. 그 외에 여러 곳에 많은 기부를 하고 있었다. 그 부부를 작은 상자같은 나의 시보레스파크 뒷좌석에 구겨 넣듯 태우고 묵호등대 부근을 지나갈 때였다. 바닷가 여기저기 높인 캠핑카를 보면서 우리는 요즈음의 젊은 세대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내가 불쑥 그 부부에게 물었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아요?”

부자가 된 그들은 잃어버린 젊은 시절로 돌아가 멋있게 살고 싶을 것 같았다. 그의 아내가 먼저 말했다.

“아니요, 절대로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동네 약방을 하면서 볼꼴 못 볼 꼴 충분히 봤어요. 한번 본 거 두 번 보고 싶지 않아요. 남편이 사업을 할 때 가슴을 졸인게 한두번이 아니예요. 호화로운 대형백화점에서 부자라고 VIP대접을 받는 것도 좋지만 여기 묵호 재래시장 골목에서 만원 주고 산 헐렁한 고무줄 바지가 나한테는 더 편하고 좋은 것 같아요. 늙으니까 그런 옷도 마음대로 입을 수 있어서 좋아요. 아들 딸 다 결혼시키고 이제 막내만 남았어요. 늙어서 한겹 두겹 책임을 벗어나니까 좋잖아요?”

이어서 남편이 말했다.

“청담동과 서초동에 여러채의 빌딩을 가지고 있는 게 얼마나 짐이 되고 불편한지 모르겠어요. 팔아버리려고 하는데 덩치가 크니까 팔리지를 않아요. 세금이 엄청나게 나와서 현찰이 없는 때는 세금을 내려고 은행대출을 신청하기도 했다니까요. 의료보험료도 매달 몇천만원씩 나와요. 그리고 투자하라고 끊임없이 사기꾼들이 찾아오는 거예요. 재산이 있으니까 거기 묶여서 편하지 못해요. 그냥 가게 하나 정도 가지고 노년에 밥 먹고 살 만큼만 있으면 자유롭고 좋을 것 같아요. 불필요하게 많을 필요가 전혀 없어요. 늙은 내가 돈 쓸데도 없다니까요.”

자랑이 아니라 그는 진심을 얘기하고 있었다. 청담동빌딩이라는 말을 들으니까 오래전에 보았던 ‘청담동에 살아요’라는 드라마의 한 장면이 뇌리에 떠올랐다.

동생들을 데리고 가난하게 살던 소녀가 있었다. 부모를 잃은 소녀는 온통 주위가 회색이었다. 소녀가 어린 동생을 업고 달동네 좁은 골목길을 걸어가는데 갑자기 옆에 있는 공중전화의 벨이 울리고 있다. 그 벨은 마치 소녀에게 전화를 받으라고 간절히 말하는 것 같다. 절망에 젖어 있는 소녀는 망연한 눈길로 공중전화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전화의 이쪽에서는 노년의 나이가 된 세월 이쪽의 그 소녀가 송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노년이 된 그 소녀는 전화에 대고 어렸던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아무 걱정하지 말아. 너 앞으로 잘 살 거야. 청담동 빌딩에서 살 거야. 동생들도 다 잘 커서 훌륭하게 됐어. 그러니까 울지 말아. 괜찮아.”

그 장면을 보면서 순간 울컥했었다. 나도 가끔은 까까머리 에 검은 교복을 입고 좌절하던 어린 소년인 나에게 연락을 해 주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노년이 된 요즈음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것 같다. 늙으면 이렇게 편안해진다는 것을 몰랐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할 수 있어서 좋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