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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의 생애 1

Joyfule 2018. 4. 4. 04:56

 

에리히 프롬의 생애

 

1. 어린 시절 – 탈무드 연구가가 꿈이었던 소년

 

에리히 프롬은 1900년 3월 23일, 독일 상공업의 중심지였던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다. 당시 프랑크푸르트는 독일의 어떠한 지역들보다도 자유주의적이고 계몽적인 정신이 강한 도시였다. 부모는 모두 유태인이었고 프롬은 외아들이었다. 프롬은 자신의 부모가 신경질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자신도 매우 신경이 예민한 아이였다고 회상하고 있다. 프롬은 자신이 어릴적부터 인간들의 비합리적인 성향과 행동에 대한 의문에 자주 사로잡혔다고 말하면서, 그렇게 된 원인들 중의 하나를 자신이 조급하고 성미가 까다로운 아버지와 곧잘 우울해 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게 된 데서 찾고 있다.
프롬의 집안은 친가든 외가든 독실하게 유태교를 신봉했으며, 이러한 가정 환경으로 인해서 프롬은 어릴 적에는 탈무드 연구가가 되려고 했다. 라이너 풍크에 의하면 프롬은 나이가 들 수록, 일생 동안 자신의 삶의 귀감이 되었던 유태인 선조들과 교사들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고 한다. 이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적인’ 사람들이었고, 유태인은 돈을 밝히고 사업수완이 좋은 사람들이라는 통상적인 선입견과는 달리 돈과 사업에 무관심한 사람들이었다. 프롬의 증조부에 대해서 전해내려오는 일화는 이들의 삶의 자세가 어떠한 것이었으며, 프롬이 이상으로 여긴 삶의 자세가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프롬의 증조부는 탈무드 연구가 였다. 그는 자그마한 가게를 운영했는데 수입이 너무 적어서 가족을 부양하기 어려웠다. 어느날 그는 한 달에 3일 동안만 외지에 나가서 사업을 한다면 보다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제안을 받았다. 그는 많은 자녀들이 있었고 생계가 어려웠음에도 탈무드를 연구할 시간을 한 달에 3일씩이나 잃게 된다는 이유로 그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하루 종일 가게에 앉아서 탈무드를 연구했다. 손님이 와도 근느 연구 시간을 빼앗긴다고 생각하면서 “우리 가게말고 다른 가게는 없느냐?”고 손님에게 화를 냈다고 한다. 이 증조부는 독일 바이에른주의 유태인 사회에서 가장 유명한 랍비였고 프롬은 일생 동안 그를 흠모했다.
프롬은 유명한 탈무드 연구가였던 외증조부로부터 12세부터 16세까지 정기적으로 탈무드에 대해서 교육을 받았다. 풍크는 프롬이 원래 탈무드 연구가가 될 것을 꿈꾸었던 원인도 상당부분 외증조부의 영향에서 찾고 있다. 이 외증조부가 프롬에게 가르친 삶의 자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프롬은 한 번은 외증조부에게 자신이 장차 어떤 인물이 될 것인지에 대해서 물었다고 한다. 프롬은 외증조부가 자신을 귀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외증조부가 자신이 듣기 좋아할 대답을 할 것이라고 기대했었지만, 외증조부의 대답은 “늙은 유태인!”이었다고 한다. 풍크는 그러한 대답이야말로 모든 종류의 자만심을 배격하려는 전형적인 유태적 대답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프롬은 어릴 때부터 이러한 랍비들의 삶의 태도에 의해 많은 감화를 받고 그들의 정신 세계를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따라서 프롬은 모든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근대 세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프롬은 자신은 돈을 버는 데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프롬의 책 『사랑의 기술』은 독일에서 수백만 부가 팔렸지만, 불성실한 출판사때문에 그는 보잘것없는 인세만을 받았음에도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 흐미 아까븐..거…. RyomaKim 씰데없는 썰..) 프롬은 인세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프롬은 오전은 연구와 사색을 위한 신성한 시간으로 생각하면서 오전에는 절대로 돈 버는 것과 관련된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프롬은 심리치료가로서 돈을 벌 경우에도 오직 오후에만 일을 했다.


2. 제1차 세계대전의 충격.

프롬은 제 1차 세계대전이야말로 자신의 청년기에 겪은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을 19세기에 서구를 지배했던 낙관주의와 계몽사조를 종결시킨 가장 잔혹하고 비합리적인 사건으로 보고있다. 물론 프롬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던 1914년 당시에는 14세의 소년에 불과했기 때문에 전쟁의 원인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다만 독일이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열광하고 가까운 친척들이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슬퍼하는 정도의 어린애다운 관심만을 가지고 있었다. 프롬이 ‘왜 인간은 전쟁을 하는가’와 같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은 전쟁에 대해서 교사들이 보인 태도 때문이었다.
프롬의 라틴어 교사는 전쟁이 일어나기 2년 전에 그는 “전쟁을 막고 평화를 유지학 위해서는 무장(武裝)을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지지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정작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프롬은 이러한 태도를 보면서 전쟁 전에 그가 가졌던 평화에 대한 관심이 진실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평화를 내세우던 사람이 일변하여 전쟁을 환영하는 것은 평화에 대한 그의 관심이 위선적인 것이었음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프롬은 그후 자신은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무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믿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프롬은 자신의 라틴어 교사보다도 선의(善意)와 성실성을 갖춘 사람들이 그러한 주장을 할 경우에도 믿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프롬은 제1차 세계대전과 관련하여 또 다른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은 앞의 경험과는 완전히 성격을 달리 하는 것이었다. 그 무렵 프롬도 독일 전역에 퍼진 영국인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루아침에 영국인은 순진무구한 독일의 용사들을 몰살하려는 악마로 간주되었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기 전 영어 시간에 프롬의 급우들은 영국 국가(國歌)를 암기하라는 숙제를 받았는데, 그때는 아직 전쟁은 일어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새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학생들은 반은 장난기로 그리고 반은 영국에 대한 증오에 사로잡혀서 이제 적국이 된 나라의 국가를 배우는 것을 거부하겠다고 선생님에게 말했다. 그때 교단에 서 있던 선생님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까지 영국은 단 한번도 전쟁에 진 적이 없어!”라고 조용히 말했다.
프롬은 선생님의 이 소리를 광기와 증오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냉정을 유지하고 있는 이성의 소리로서 경험했다고 말하고 있다. 프롬에게 이 한마디의 말고 선생님이 보인 침착하고 이성적인 태도는 두고두고 교훈이 되었다. 이로 인해서 프롬은 증오와 독선과 같은 광적인 기분에서 벗어나, 어떻게 해서 전쟁처럼 비인간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되었다.
프롬이 성장함에 따라 이러한 의문은 더욱 절실하게 되었다. 수백만의 사람이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을 죽이고 죽음을 당하면서 부모나 아내, 친구들을 깊은 비탄(悲嘆)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들은 무엇 때문에 싸우는가? 양 진영 모두 자신들은 전쟁을 바라지 않으며 자신들은 오직 평화와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 주장하는 데도 어떻게 해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후의 사실에 의해 밝혀진 것 처럼 양 진영 모두 소수의 정치 지도자들과 군사 지도자들이 영토를 확장하고 자신의 이름을 떨치기 위해서 전쟁을 했다면, 약간의 영토와 소수의 지도자를 위해 양 진영의 수백만 병사가 서로를 학살하는 사태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프롬은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인간의 비합리성에 대해서 보다 깊은 관심을 품게 되었다. 이러한 관심으로 인해서 프롬은 대학에서 원래 법학을 공부했다가 심리학과 철학 그리고 사회학을 공부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고 정신분석학자가 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프롬은 세계 평화와 형제애에 입각한 사회 구조를 실현하려는 깊ㅇ느 열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모든 공인(公認)된 이데올로기와 공적(公的)인 선언 따위에 대해서 극도로 회의적이 되었으며, “모든 것을 의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3. 인본주의적인 유태고와의 만남과 유태교에 대한 신앙의 포기

프롬은 1918년에 대학 입학 자격 시험에 합격하고 프랑크푸르트대학에 입학하여 두 학기 동안 법학을 공부한다.
프롬이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수학하던 시절 프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랍비인 네헤미아 안톤 노벨 박사(1871~1922)였다. 노벨은 유태교 신비주의자로서 보수적인 종교인이었으면서도 괴테와 칸트를 애호하는 휴머니스트이자 계몽주의자였다. 아울러 그는 『유태교의 원전으로 본 이성의 종교(Die Religion der Vernunft aus den Quellen des Judentums)』에 표명된 헤르만 코헨의 사상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그의 사상을 프롬에게 소개했다. 헤르만 코헨은 1873년에서 1912년까지 마르부르크대학의 교수였고 이 당시 프로이센주에서 단 한 명뿐인 유태인 정교수였다. 그는 에른스트 카시러와 함께 신칸트주의 내의 마르부르크학파를 대뵤하는 인물이었다.
코헨은 당시 독일 내의 유태인 사회와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도 맺지 않았으면서도 ‘유태교의 인본주의적인 사상’을 높이 평가하는 한편, 자신의 사상 내에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는 유태교에서 계몽주의적인 인류애와 보편주의적이고 메시아적인 이상을 재발견했다. 코헨은 노벨을 자주 방문했고 프롬을 비롯한 노벨의 제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프롬이 나중에 유태교의 훌륭한 점들로서 거론하게 되는 것들은 사실은 코헨의 해석에 의한 것들이었다.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두 학기 동안 법학을 공부한 후 프롬은 1919년부터는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사회학과 심리학 그리고 철학을 공부하게 된다. 동시에 그는 여기서 노벨 못지않게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친 랍비 라빈코프(Rabinkow) 밑에서 1926년까지 탈무드를 공부하게 된다. 라빈코프는 그의 마지막 탈무드 교사였다. 프롬은 4~5년 동안 거의 매일 라빈코프를 방문했다고 한다. 프롬은 라빈코프를 통해서 마이모니데스의 사상과 유태교 신비주의인 하시딤을 알게 되었다. 라이너 풍크는 라빈코프의 사상이 프롬의 사상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었는지는 프롬의 박사 학위 논문에서 잘 드러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박사 논문에서 프롬은 하시딤을 특별히 높이 평가하고 있다. 노벨이 보수적인 유태적 삶을 괴테의 시와 칸트의 계몽주의 철학과 결합하려고 한 반면에, 라빈코프는 종교적 삶을 사회주의적인 혁명적 태도와 결합하고자 했다. 그는 예언자들과 마이모니데스의 사상 그리고 하시딤에서 급진적인 휴머니스트적인 태도를 발견했다.
유태교에 대한 라빈코프의 보편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인 해석의 영향을 받고 프롬은 정통적인 유태교에서 벗어나 비유신론적인 휴머니즘을 자신의 신조로 삼게 되었다. 프롬은 이러한 변화를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사건과 비교할 정도로 자신의 삶에서 결정적인 사건으로 여겼다. 정통적인 유태교에는 정결하지않은 음식물뿐 아니라 돼지고기로 만든 소시지까지 포함해서 돼지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계율이 있었다. 1926년에 정신분석학을 배우기 위해서 체류하던 뮌헨에서 프롬은 돼지고기로 만든 소시지를 용기를 내어 사 먹는다.
유태교의 교리를 더 이상 믿지않게 되었지만, 프롬은 자신의 사상을 유태교의 인본주의적인 정신에서 발전되어 나온 것으로 보았으며 그것을 철저히 밀고 나간 것으로 생각했다. 프롬은 원래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수학하던 시절까지만 해도 유태 민족주의인 시오니즘을 열렬히 지지했지만, 코헨과 라빈코프의 영향으로 시오니즘에 등을 돌리게 된다. 프롬은 시오니즘을 코헨과 라빈코프의 휴머니즘적인 유태교와 메시아주의와 모순되는 민족주의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죽을 때까지 시오니즘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햇으며 이스라엘 국가에 대해서도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는 아랍인들의 권리를 열정적으로 대변했으며 아랍인들에 대한 메나헴 베긴의 테러 행위를 비난했다.
라이너 풍크는 프롬이 정통적인 유태교의 교리와 관습을 포기하게 된 또 하나의 동기를 불교와의 만남에서 찾고 잇다. 물론 불교를 만나기 이전에 프롬은 인간의 자율성과 마이모니데스의 부정신학에 대한 강조 때문에 불교적인 정신에 이미 가깝게 다가와 있었다. 프롬은 1920년 중반에 게오르크 그림(Georg Grimm)의 『부처의 가르침. 이성의 종교(Die Lehre des Buddhas)』와 『불교학(Die Wissenschaft des Buddhismus)』을 통해서 불교를 알고난 후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 프롬은 불교야말로 이성에 입각한 종교며 어떠한 비합리적인 신비화나 계시나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종교로서 격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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