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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의 생애

Joyfule 2018. 4. 5. 09:35


에리히 프롬의 생애


4. 정신분석학과의 만남


프롬은 1922년에 막스 베버의 동생이었던 사회학자 알프레드 베버에게서 박사 학위를 받게 된다.
1926년에 프롬은 정신분석의인 프리다 라이히만(Frieda Reichmann)과 결혼한다. 프롬은 당시 하이델베르크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치료에 응용하고 있던 프리다 라이히만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정신분석학에 접하게 되면서 프로이트의 제자였던 칼 란다우어로부터 정신분석학을 배우게 된다. 나중에 프로이트의 리비도 이론을 철저하게 비판하게 되는 프롬도 1934년까지는 그것을 신봉하는 정통 프로이트주의자였다.
1935년부터 프롬은 카렌 호니(Karren Horney)나 설리반(Harry Stack Sullivan)과 같이 인간 심리와 치료에서 인간 관계를 중시하는 사람들의 영향을 받고 ‘개인을 고립되고 자족적인 것으로 보면서 충동의 실현을 위해서만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고 보는 프로이트 이론에 대해서 거리를 취하게 된다. 이들은 환자의 일상적인 문제들에 함께 관심을 가져주고 무엇보다도 그를 따듯하게 대하면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을 심리 치료의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보았다.


5. 마르크스 사상과의 만남


정신분석학자였을 뿐 아니라 사회학자이기도 했던 프롬은 심리학과 사회학을 결합하고자 했다. 그는 분석적인 사회심리학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관심 때문에 프롬은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탄생시킨 막스 프랑크 사회연구소와 관계를 맺게된다. 그는 1930년에서 1938년까지 연구소 내의 사회심리학 분야의 책임자로서 일했다. 프롬이 가입하게 되면서 막스 프랑크 사회연구소에서는 계속해서 정신분석학적이면서도 마르크스주의적인 사회 탐구가 중요한 연구 분야가 된다. 프롬은 연구소에서 호르크하이머나 마르쿠제를 통해서 마르크스의 사상에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 반면에, 호르크하이머나 마르쿠제와 같은 사람들은 프롬에게서 정신분석학을 배웠다.


프롬은 세계 평화와 사해동포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열정 때문에 마르크스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프롬은 세계 평화와 사해동포주의에 대한 자신의 희구가 어릴 적부터 구약성서를 수시로 접하면서 받은 감동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프롬은 구약성서에서 무엇보다도 이사야, 아모스, 호세아와 같은 예언자들에게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고백하고있다. “모든 나라들의 백성은 그들의 칼을 부수어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부수어 낫을 만들며, 각 나라들은 서로 칼을 들지 않으며 더 이상 전쟁을 배우지 않을 것이다”라는 최후의 날에 대한 예언은 어린 프롬에게 세계 평화와 형제애가 넘치는 인류 사회에 대한 희구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프롬은 자신이 유태인이었다는 것 역시 자신이 세계 평화와 사해동포주의의 구현에 큰 관심을 갖게 된 원인 중의 하나라고 보고 있다. 프롬은 기독교 사회에 살고 있던 유태인 소년으로서 독일 사회에 만연된 반유태주의를 경험했다. 더구나 외아들로 태어난 프롬은 많은 외로움을 느꼈기에 배타적인 태도를 싫어했다. 이러한 프롬에게 세계 평화와 사해동포주의라는 예언자적인 비전만큼 정신을 고양시키는 것은 없었다.


프롬은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해서 인간 개개인의 심리 현상과 사회 현상에 대한 여러가지 의문을 풀고자 했다. 프롬은 개인 생활을 지배하는 법칙과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규정하는 사회 법칙을 이해하고자 했다. 연구가 진척되면서 프롬은 프로이트와 마르크스 양자 사이의 차이를 깨닫고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풀고자 했다. 프롬은 양자로부터 진리라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받아들이는 한편, 양자에 존재하는 시대적인 편견과 선입견을 수정하는 것을 통해서 양자를 종합하고자 했다.


6. 막스 프랑크 연구소(프랑크푸르트학파)와의 결별


1933년 프롬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에 망명한다. 프롬은 미국에서도 계속해서 막스 프랑크 사회연구소에서 일했으나 프로이트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면서 다른 연구원들과 마찰을 빚게 된다. 그러나 프롬의 프로이트 비판을 둘러싸고 연구소 내에서 진행되던 논란은 학문적인 성격보다는 다분히 인신 공격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프롬의 말에 따르면, 연구소장이었던 호르크하이머는 원래는 프롬의 프로이트 비판에 대해서 이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정통적인 프로이트주의를 변호하면서 프로이트를 성욕에 대해서 유물론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이유로 진정한 혁명가로 간주하게 되었다. 호르크하이머의 생각이 이렇게 변하게 된 것은 프롬이 격렬하게 비판한 적이 있는 아도르노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다. 프롬은 프로이트의 성욕 이론을 비롯한 오이디푸스 이론 등이 당시의 가부장적인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프로이트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부르주아 사회의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프롬은 정신분석학을 생리학적이고 생물학적인 토대 위에 세우려던 프로이트와는 달리 정신분석학을 사회학적인 토대 위에 세우고자 했다. 아도르노가 연구소의 전임 연구원이 된 1938년에 프롬은 연구소에서 탈퇴한다.


7. 멕시코로의 이주


프롬은 1940년에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다. 1944년에 프롬은 헤니 구를란트(Henny Gurland)와 두 번째로 결혼한다. 이어서 프롬은 1949년에 멕시코로 이주한다. 멕시코에는 나치에서 도망하는 중에 부상을 입은 부인의 치료에 좋다는 광천(鑛泉)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니 구를란트는 결혼한 지 4년밖에 되지 않은 1952년에 죽는다. (1944년에 결혼해서 1952년이 부인이 사망했으면 8년이 아닌가???? RyomaKim의 씰데없는 썰이었습니다. ^^;;;;)
멕시코 시티로 거주지를 옮겼지만 프롬은 매년 거의 4개월 동안은 강의 등을 위해서 미국에서 살았다. 프롬은 멕시코에서 25년 이상을 살았다. 그는 거기서 새로운 고향을 발견했고 대학에서 정신분석학을 가르치는 것과 동시에 연구와 치료를 겸하는 연구소를 설립했다. 두 번째 부인의 때 이른 죽음으로 프롬은 심각한 정신적인 타격을 입었는데, 그는 미국 출신의 안니스 프리만(Annis Freeman)의 도움으로 그 충격을 극복하게 된다.
그는 그녀와 1953년에 결혼하게 된다.


8. 선불교에 대한 프롬의 관심


프롬은 1957년에 서양에 선불교를 소개한 다이세츠 스스키와 ‘정신분석학과 선불교’를 주제로 한 공동 세미나를 개최한다. 프롬에게 스스키와의 세미나는 극히 중요한 사건이었다. 프롬은 당시 86세의 스스키를 사랑했고 찬탄했으며 그에게서 배우고자 했다.
프롬은 선불교에 대해서 이렇게 평하고 있다.

“선(禪)은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가장 세련된 반(反)이데올로기적이고 이성적인 체계며, 그것은 ‘비종교적’종교(‘nonreligious’religion)를 발전시키고 있다. 선이 지식인들 사이에서 열렬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서양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다.”

선불교에 대한 프롬의 관심은 단순히 이론적인 데 그치지 않았다. 프롬은 매일 아침 10시에서 11시까지 명상을 했다. 프롬은 1975년에 자신의 75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심포지엄에서 발표를 했다. 그는 병 때문에 쇠약해져 있었지만 전혀 피로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두 시간에 걸쳐 발표를 해냈다. 사람들이 프롬에게 그 비결을 묻자 그는 자신이 그날 아침 2시간 동안 호흡과 명상을 했다고 대답했다.


9. 정치 참여와 죽음


1955년에 프롬은 미국 사회당에 가입하고 1960년에는 새로운 당 강령을 기안한다. 이 당 강렬은 당에 의해서 수용된다. 그러나 프롬은 그의 제안들이 당내의 관료주의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보고서 결국은 당을 떠나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그가 모든 정치 활동을 중단한 것은 아니었다. 프롬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정치 활동을 수행했다. 그는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들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담은 편지들을 영향력있는 정치가들이나 기자들에게 보냈다. 이러한 편지들은 특히 소련이나 중공, 베를린 문제 그리고 쿠바 위기와 같은 국제 정치적인 문제들이나 케네디 암살과 같은 문제들과 관련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프롬은 1957년에서 1968년에 걸쳐서 평화 운동을 위해서 많은 시간과 정력 그리고 돈을 쏟았다. 프롬은 군비 축소를 주장했고 심지어는 미국만이라도 군비를 축소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프롬은 풀브라이트 상원의원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풀브라이트 의원의 제안으로 당시의 긴장완화 정책에 대한 프롬의 견해가 미국 상원에서 논의되었다. 그 외에 프롬은 스페인 난민들과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돕는 데 참여했다. 1957년에 프롬은 마르틴 부버 등과 함께 아랍인들에게 그들이 전에 소유했던 재산을 되돌려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 위원회를 세우고자 했다.


68세의 나이로 프롬은 당시 베트남전에 대해서 반대했던 상원의원이었던 휴머니스트 유진 멕카시(Eugene McCarthy)의 대통령 당선을 위한 선거 유세에 참여했다. 그는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수 많은 연설을 했다. 프롬은 닉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것을 저지할 수는 없었지만, 많은 미국인들이 미국을 인간적인 사회로 만드는 데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과중한 선거 유세 활동과 자신의 책 『희망의 혁명』을 선거일 전에 출간하기 위해서 과로한 탓에 프롬은 건강을 상하게 된다. 1968년에 찾아온 심장마비 때문에 그는 모든 정치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프롬은 열 두어 살 때부터 이미 아버지의 회사에서 일하던 사회주의자와 정치를 논하는 등 일생 동안 정치에 깊은 관심을 품어왔지만, 자신의 기질이 정치 활동에 부적합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프롬은 노년이 되어서야 미국 사회당에 입당하여 평화 운동에 적극 가담할 때까지 어떠한 정당에도 속하지 않았다. 프롬이 정치 활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한 것은 파국을 향해서 치달리는 국제 정치 상황을 목전에 두고 방관해서는 안 된다는 의무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프롬은 나중에 자신이 단순한 의무감 이상의 이유로 정치 활동에 뛰어들게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세계가 광기(狂氣)에 빠지고 비인간화되면 될 수록 사람들은 인간적 관심을 나누어 갖는 남녀와 함께 있고 함께 일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는데, 바로 그러한 욕구가 자신이 정치에 참여하게 된 주요한 원인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프롬은 자신이 함께 일했던 사람들과 서로 격려하고 서로에게 용기를 주었던 것에 대해서 깊은 감사를 하고 있다.
1976년에는 『사랑의 기술』과 함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던『소유냐 존재냐』가 출간되었다. 프롬은 1977년에는 두 번째 심장마비를, 1978년에는 세 번째 심장마비를 경험했다. 1980년 3월 18일 밤, 80세 생일을 5일 앞두고 프롬은 아무런 고통스런 기색도 보이지 않은 채 심장마비로 숨졌다. (T.T…넘 슬프군요… Ryoma..)


프롬은 자신이 살던 시대가 소란과 광기의 시대라고 할 만큼 험난한 시대였지만, 자신에게는 이 시대가 무진장한 사회적 실험실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독일에서의 사회주의 혁명과 러시아 혁명,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파시즘과 나치즘의 승리, 러시아 혁명의 타락, 스페인 시민전쟁, 제2차 세계대전, 소련과 미국의 군비 확장 경쟁, 이 모든 일들이 프롬에게 경험적인 자료들을 제공하고 가설을 만들고 그러한 가설들을 검토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프롬은 인류가 건전한 삶과 사회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이론을 개발하는 한편, 인간성과 인간의 진정한 자유의 실현을 위해서 행동했다. 프롬은 알버트 슈바이처와 간디를 존경했지만 그의 삶은 이들의 삶 못지 않게 인간에 대한 신뢰와 사랑에 입각한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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