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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모르는 99가지 - 15. TV 드라마를 죽여라

Joyfule 2021. 7. 14. 08:47
    
     
     
 여자가 모르는 99가지 -  이재현  
 15. TV 드라마를 죽여라
단칸방에서 집사람과 아이 둘 그리고 나까지 복닥거리며 살다보니 
싫어도 TV를 자주 보게 된다. 
이 서울 바닥에서 어디 갈 곳도 없는 내 불쌍한 자식들이 
브라운관에 매달려 있는 걸 탓하지도 못하고, 
만화영화에서부터<열려라 웃음천국>이니 <슈퍼 선데이>니 하는 프로도, 
마누라가 좋아하는 드라마도 억지로 볼 수 밖에 없다. 
TV 시청을 즐겨 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마당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나는 오디오 세대다. 
어려서 줄곧 라디오를 듣고 자라던 내가 TV를 처음 본 것은 예닐곱 살 때쯤인데 
동네에서  가장 잘사는 집에 저녁마다 놀러가 빅 모로와 릭 제이슨이 나오는 <전투>도 보고 
김동건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명랑백화점>도 본 기억이 난다. 
특히 <전투>는 어린 나를 사로잡은 프로그램이어서 일주일 내내 
그 날만 손꼽아 기다리다 손더스 중사가 쏘는 자동소총에 
독일군들이 맞아 죽는 걸 보고서야 직성이 풀리곤 했다.
TV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황홀함 그 자체였다. 
지금 애들이야 태어나자마자 텔레비전을 보니까  신기할 것이 하나도  없겠지만, 
라디오나 듣던  게 고작이던 대가 사람들이 움직이고 소리가 나오는 
조그만 박스를 보았을 때 그 감격이 얼마나 컸겠는가. 
우리집에 처음 TV가 들어오던 날은  내인생에 있어 하나의 사건으로 치부될 정도다.
그런 내가 TV 드라마를 죽이라는 썰렁한 소리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되게 궁금할 것이다. 
내 솔직한 심정으로는 TV를 부숴라 하고 싶지만 
차마 그렇게는 못하고 드라마만 죽이자는 것이다. 
TV중독자들에게 그걸 부수라고 해봐야 소용없는 일일 것 같고 
또 뉴스도 봐야 하니까 내가 평소에 원한이 많앗던 드라마만 두들겨 패보자 이거다. 
얼마전에 신문을 보니 TV 방송 3사에서 내보내고 있는 드라마가 60여개나 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방송국 한 군데서 평균 20종류의 드라마를 일주일 동안 쏟아내고 있다는 얘기다. 
아침 드라마를 필두로 해서 일일연속극, 월화 드라마, 
수목 드라마, 미니시리즈, 특집 드라마, 베스트극장, 테마 게임 등 
갖가지 이름의 드라마가 주로 여성 시청자들을 목표로 만들어지고 있다. 
내가 드라마에 대해 유감이 많은 까닭은 
그 내용이 올바른 여성상을 크게 왜곡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드라마가 시청률 점유에 급급한 나머지 
정신병자나 다름없는 인물 설정에 도저히 있을 것 같지 않는 
좀 어렵게 말하면 개연성이 전혀 없는 황당한 스토리를 보여주고 있다.
드라마에서 이 시대의 여성들은 열 받는다고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남편의 와이셔츠를 발기발기 찢고, 살림을 부수고, 친구의 남편과 연애를 한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괴롭히며 그걸 즐기는 새디스트로 그려진다. 
남자들은 몽땅 밖에서 바람이나 피는 한심한 인간이거나 
여자가 소리를 지르면 시장에 가 장을 봐오는 코미디언밖에 안된다. 
몇 년 전에  방영되었던 <사랑이 뭐길래>라는 드라마도 그렇다. 
이 드라마에서 사람들은 완고한 대발이 아버지가 상당히 인상에 남는다고 했는데 
그건 내가 보기에 작가 김수현의 트릭이었다. 
대발이 아버지가 방방 뜰수록 아들은 바보가 되었고 
부인은  불쌍한, 그래서 모든 여성들이 구원해 주어야 할 여자로 비쳐졌던 것이다. 
지금 세상에 대발이 아버지 같이 집에서 권위를 찾아 먹을 수 있는 구세대는 남아있지 않다. 
여자들이 그걸 용납하지도 않거니와 그만한 용기를 가진 남자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시대 최고의 방송작가 김수현은
이미 죽은 남자들을 다시 한번 확인 사살한 셈이었다. 
그러나 그걸 진정으로 원하는 여자들은 없다고 본다. 
당신은 정녕 아버지가 또는 남편이 당신 엄마나 당신 말 한 마디에 
꼼짝도 못하는 바보가 되기를 바란단 말인가? 
당신은 조형기 같은 남자가 (물론 TV에서의 조형기를 말함이다) 
당신의 아버지 또는 남편이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이 원하는 여성상은 정상적으로 자신의 능력에 의해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는 것이지 바보나 코미디언을 통해 얻는 그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TV는 자구 그걸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세뇌시키고 있다. 
남자를 바보로 만들어라. 남자는 당신이 정복해야 할 적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제부터 TV프로도 골라서 보자. 
거 참, 보던 거 안 볼 수도 없고. 
이렇게 중얼거리며 짜증나는 드라마만 볼 것이 아니라 
가능하다면 다큐멘터리도 좀 보고 뉴스도  꼼꼼하게 봐서 TV를 TV답게  만들자. 
그러면 쓸데없는 드라마는 저절로 죽는다. 
시청률이 떨어지면 드라마는 죽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