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모르는 99가지 - 이재현
24. 유부남은 중금속이다
결혼 후 회사에서 직원들과 회식을 할 때면
여직원들은 죄다 총각 사원들을 제쳐두고 내 근처에 와 앉았다.
나는 그때마다 아니, 영계 놔두고 늙은 닭 잡아먹을 일 있냐? 농을 했는데
그러면 돌아오는 대답이 언제나 나를 황당하게 했다.
부장님은 유부남이잖아요!
아니, 유부남은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나는 애들에게 나도 사람이라고 외쳤다.
유부남도 있을 건 다 있다고,
영계보다도 더 무서운게 유부남이라고 소리쳤지만
이 처녀들은 내가 술 마시자고 하면
밤 12시가 넘어서도 한 잔 더 먹자고 혀 꼬부라지는 소리를 했다.
나는 속으로 얘들이 내가 성자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네~하면서
어떻게 좀 해보려고도 했지만 그건 순전히 마음뿐이었고 결과적으로 술값만 나간 셈이 됐다.
미혼 여성들이 유부남에 대해 총각과는 다른 남자 아닌 남자로 보는 경향은
우선 결혼을 한 임자있는 몸이니
자신에게 별다른 흑심은 품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비롯된다.
또 자신 역시 상대가 유부남이니까 그에게 굳이 잘 보일 필요없고
관심의 대상에서 그는 일찌감치 제외된다는 생각이 이를 확대 재생산해
유부남은 남자로서 일단 안심할 수 있다는 이상한 근거를 만들어 놓는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상당히 위험하다.
신혼 초의 젊은 유부남이라면 모르되 결혼한 남자도
엄연히 남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특히 서른 중반을 넘어서 아이가 있는 유부남은 슬슬 권태기에 접어들어
자기 부인에게도 흥미를 잃어가는 시기다.
이때 누가 멋모르고 접근해 오면 의도적이든 아니든
차츰 관심이 가게 되는데 일은 여기서부터 벌어지는 것이다.
남자도 처음부터 이 여자와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은 품지 않는다.
그저 이쁘고 귀여우니까 밥 사주고 술 사주고, 같은 방향이라고 집까지 차도 태워준다.
여자 역시 아무 생각 없이 졸랑졸랑 따라 다닌다.
더러는 자기가 술 한 잔 산다고 나서기도 하고, 이래서 점점 만나는 횟수가 잦아진다.
이 세상에서 가장 모를 것이 남녀 관계다.
처음에는 나는 끝까지 가정을 지킬 거야(남자),
유부남이니 뭐 별 일 있을라구(여자) 했는데 이게 우라질 시간이 흐르면서 정이 드는 것이다.
정이 뭔가.
남녀간의 정은 묵으면 사랑이 된다.
애인이 있는 여자라면 모르되 만날 남자도 없고 퇴근해봐야 집구석에 가서
밀린 빨래나 할 신세라면 이 정은 삽시간에 사랑으로 변한다.
정말 골 패는 사랑이지, 내가 어쩌다가 3류 드라마에나 나오는 유부남과의 사랑에 빠졌을까?
그러나 사랑에 빠지면 눈에 뵈는 게 없는 법이다.
이건 실화인데, 한 번은 내 친구 놈이 만나자고 해서 나갔더니 술을 마시며 이런 소리를 했다.
아, 염병!
왜 그러냐? 뭔 일 있어?
옛날에 걔 알지? 거 있잖아, E대 나온 애 말이야.
니가 어디 여자가 한둘이냐? 관광버스로 하나는 될 텐데.
걔가 말이야, 나더러 이혼하고 같이 살재.
잘 해볼 것이여!
장난이 아니더라구. 이거 돌아버리겠네.
거 봐라. 내가 뭐랬냐. 진작에 찢어지라니까 말 안 듣더니.
그 친구는 다행히 여자가 시집을 가는 바람에 이혼까지는 안 갔지만
한동안 날밤을 샜대나 어쨌대나.
상황이 이 지경이 되면 유부남도 헷갈리게 마련이다.
아이큐가 모자란 놈은 정말 이혼을 결심하게 되고
믿었던 남편으로부터 날벼락 같은 소리를 듣게 된 마누라는
여자를 찾아가 머리채를 잡아채며 난리를 뽀개고
그야말로 완벽한 싸구려 드라마가 연출되는 것이다.
유부남을 조심하라.
총각들이야 아무것도 모르고 망둥이처럼 뛰지만
유부남은 어딘지 여유가 있다고 좋아했다가는 결국 가슴에 멍만 들고 치유할 수 없는 상처만 남는다.
요즘에 누가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겠느냐고 묻겠지만
세상에 어떤 여자가 처음부터 유부남하고 연애하겠다고 마음 먹겠는가.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이다.
유부남이 중금속과 같다는 말은 이게 야금야금 쌓여서 마침내는 사람을 죽게 만든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유부남 알기를 돌같이 알것이 아니라 독으로 알고 아예 근접도 하지 말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