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에세이

열정의 브라질리언 - 조한금

Joyfule 2013. 12. 13. 10:17

 

 

 열정의 브라질리언 - 조한금



세계 3대 미항 중 첫째로 꼽히는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 한 농가의 차도 변에서 파우리스타(토착민)가 짜 주는 사탕수수의 원액을 마시다가 그 맛이 어릴 때 먹던 단수수대와 똑같은 것에 놀라 한참을 지나온 어린 시절 속으로 되돌아 가본다.
결코 노추(老醜)를 보이지 않는 선홍색의 동백꽃이 지천으로 피어 섬 전체가 아름답고 서정도 풍요로운 산수 수려한 고장 완도. 나는 어릴 때 이곳에서 폭 넓은 삶의 체험들을 통해 내면의 세계를 충일 하게 채우며 자랐다.


아버지는 가끔씩 나를 썰물 때의 바닷가로 데려가곤 하셨다. 큰 돌을 지렛대로 뒤집어 주며 그 돌에 붙어 있는 굵은 고둥을 줍게 하거나, 게나 해삼 등도 잡게 했다. 그것들을 바구니에 주워 담을 때마다 옹골진 기분에 탄성을 질러댔고 아버지는 그런 내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시곤 하는 것이었다. 횡재가 따로 없었다. 어떤 날들은 연장 망태를 메고
"나 따라 갈래?"
하시며 휘적휘적 앞장서 걸어 나를 인근의 야산에 데려다 놓았다. 나는 약초 캐는 아버지 곁에서 계절마다 다른 천연의 색채와 정취를 만났고, 또한 그것들의 열매를 나 혼자 실컷 따 먹으며 오붓하고 풍성한 기쁨으로 배를 불렸다.
들 찔레의 어린 순, 더북하게 올라 온 춘란(꽁지마리)의 연초록 꽃대, 나무에 송알송알 매달린 솜털이 보송보송한 빨간 수리딸기, 까맣게 익은 정금열매, 이런 것들은 자연이 계절마다 배고픈 내게 차려 준 서정의 잔칫상이었다.

꽁지마리를 손아귀에 하나 가득 쥐고서 여리디 여린 그 줄기의 보드랍고 달착지근한 맛을 즐기며 떫은 꽃잎은 따서 버리고, 그 속에 감춰진 꽃술을 보면서 남녀의 그것처럼 생겼다고 혼자 후훗 거리기도 했다. 아버지의 망태 속엔 하수오, 둥그레미, 백봉령 등의 약 뿌리가 들어찼고, 내 치마폭엔 인동초의 그윽한 향기와 꽃잎이 그득 차곤 했다. 이런 날들은 약재 채취보다 더 큰 부녀만의 끈끈한 정을 수확했고 나는 그런 날들의 소중한 추억을 유산으로 지금까지 간직해 오고 있다.


들녘에 조와 수수가 서로 자기들끼리 몸을 비벼 서걱거리면 텃밭의 단수수대도 단물이 올라 온몸에 하얗게 분칠을 한다. 아버지는 약이 찬 이걸 베어 묶음으로 내게 안겨 주셨고, 나는 입술을 베어가며 껍질을 벗겨 속살 한 입 베어 물고 '스으읍!'하고 빨아들여 입안에 고인 꿀물을 삼키곤 했다. 꼭꼭 씹어 단물을 다 빨아먹고서도 몇 번이고 더 곱씹고 뱉었던 단수숫대. 그 단수숫대를 이역만리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한 촌락에서 40여년 만에 그것도 한 컵의 액즙으로 만나니 추억 속의 그 맛과 향에 불현듯 아버지의 사랑에 맛들이던 생각이 난다. 그리고 갑자기 브라질이 친숙하게 내게 다가서는 것이었다.


<세계를 간다.> 남미 7개국 편 해외여행 안내 책자를 쥐어주던 남편과 큰딸의 배웅을 받으며 김포공항을 이륙한 지 정확히 25시간 만에 브라질의 상파울루에 내렸다. 남미 최대의 도시가 있고 정열적인 춤 삼바와 축구로 유명한, 적도 이남의 따뜻한 나라라는 겨우 이런 상식만으로 내가 미지의 나라에 내린 것은 12월31일 오전 11시였다. 9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는데 우리가 비를 몰고 왔다며 반갑게 맞는 한국인 현지 가이드는 콧수염을 폼 나게 기른 50대 초반의 신사였다.


연말과 신정휴가로 이미 상가는 거의 철시돼 있었고 주요한 볼거리는 모두 문을 닫은 후였다. 박물관도 미술관도 볼 수 없었다. 서둘러 달려간 '부탄탄' 독사연구소도 직원들에게 휴가를 주어 폐문 했다면서 경비가 정문을 가로막았다. 1898년 건립됐다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 연구소는 독충들의 유독에 대한 백신이나 혈청 제조는 물론 독사의 독을 실제로 채집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고 해서 잔뜩 벼르고 왔는데 헛수고였다. 비싼 돈 주고 별러 온 일정이었는데....


우리나라의 남미 여행상품은 아직은 개발이 덜돼 정보가 부족한데다 이곳의 치안 또한 허술해 모객이 잘 안되어 여러 차례 연기 끝에 간신히 짜 맞춰 온 날이 하필이면 연말연시의 연휴이니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그렇다고 일찌감치 호텔에 들어가 머물긴 아까운 시간이다. 찬바람의 겨울을 가르고 열풍의 여름으로 날아 온 미지에 대한 호기심과 설렘은 더욱 송구영신의 밤 기분을 들뜨게 했다.

72세의 고령에서부터 6살 꼬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구성원의 관광객중 좀 젊다는 사람 몇이서 현지 가이드에게 술 한 잔 할 수 있는 좋은 곳으로 안내하라고 부탁해 들어간 곳이 'my love'라는 간판의 술집이었다. 보통의 나이트클럽이 그렇듯이 나신의 여인들이 올라서서 춤추는 무대가 홀 중앙에 있고, 그 이동식 무대 주위로 손님 탁자가 빙 둘러 있다.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의 아가씨들은 낮엔 직장이나 학교에 다니고 밤엔 아르바이트로 쇼걸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 성이 개방된 나라답다는 생각이 든다.

 

맥주가 팝콘과 함께 탁자에 올려지고, 탁자머리에 대기하고 선 바텐더들의 정중한 서비스가 빈 잔을 채운다. 빠른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흔들어대는 아가씨의 닭털보다 더 가벼워 보이는 엉덩이가 가히 예술의 수준이다. 우리네 같으면 기능보유자라고 대접함직도 하다.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밤은 점점 깊어 간다.

한쪽 구석에선 남자 무릎에 올라앉은 무희 하나가 5분이 멀다하고 남자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미끈한 아가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춤추는 무대 주위에서는 뚱뚱한 사내 하나가 음흉한 눈길로 한 여자의 위아래를 훑으며 노예시장에 나온 노예를 고르기나 하듯 여자의 주변을 빙빙 돌고 있다. 그는 그 아가씨와 뭔가 열심히 흥정하는 눈치다.

지루해서 가자고 일어서려는데, 뭔가 더 에로틱한 쇼가 있을 거라고 현지 가이드가 귀띔 하면서 우릴 주저앉힌다. 본전 생각이 나서 그냥 눌러 앉아 있으니 이윽고 무대가 비워지면서 자그맣고 예쁜 비키니 차림의 아가씨가 무대 중앙으로 올라선다.

그녀는 옷을 하나씩 벗어 던져 완전 나체가 되어 무대에 눕는다. 에로 쇼, 자신의 몸을 더듬는 에로틱한 몸짓이 너무나 태연자약하고 천연덕스러워 오히려 그녀에게서 프로 의식을 본다.

모두의 눈길은 그려가 하는 몸동작에 바늘처럼 꽂힌다. 밤의 문화, 동서양을 막론하고 술손님인 남정네들의 취기 어린 기분을 고조시키는 건 역시 여자의 벗은 모습인가 보다.


요란한 폭죽이 쉴 새 없이 터지는 밖의 소음, 그들은 그 폭죽 소리만큼이나 큰 복을 갈구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의 문화권에 있던 나라들에서 볼 수 있는 제야의 풍습을 몇 년 전 필리핀에 이어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때마침 우리네 제야의 타종처럼 자정을 알리는 축포 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자 갑자기 홀 안의 분위기가 순간 확 달라졌다.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함성을 지르며 신년을 맞이하고, 홀의 종사자들은 손님 모두에게 공짜의 샴페인을 따라주며 축배를 들게 한다. 그리고 이동식 무대가 삽시간에 접어지더니 홀은 이내 무도회장으로 바뀌고 만다. 무희들은 자리에 앉은 손님들의 손을 잡아끌고 홀 중앙으로 나선다.

 남정네들의 음흉한 눈길들이 어느새 축제 무드 속으로 묻히고 만다. 밤의 질탕함이 송구영신의 새 새벽의 희망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우리들도 이들 브라질리언의 손에 이끌려 홀 중앙으로 나갔다. 인종도 연령도 성별도 뛰어 넘은 신년의 축제 현장, 격식도 기술도 필요 없는 동작으로 모두 한마음 되어 춤을 춘다. 서로 포옹하며 새날을 기쁨으로 맞이한 브라질리언들은 손에 손을 잡고 어느새 홀 안을 넓고 둥글게 돌기 시작했다. 이 대열은 삽시간에 큰 원으로 연결, 지구촌은 결국 하나가 되었다. 리듬을 타고 있는 춤은 기쁨을 나타내는 원초적인 몸짓이며, 이 기쁨의 표현은 모든 것을 수용하여 하나로 섞는 물의 역할 바로 그것이었다.


모든 민족을 다 섞어 우수한 새 브라질리언을 만들어 토착화시킨다는 종자개량에 의미를 두고 있는 이 나라의 인종정책은 그래서 모든 이민을 다 받아들인다고 한다. 그러나 유독 한국인과 유태인들만은 다른 종족과 피 섞기를 싫어해 자기네 동족끼리만 어울려 결혼하니 브라질 정부의 종자개량 정책을 위반하는 행위라며 속으론 미워한다는 것이다.
밤의 문화, 이국의 색다른 연말 세시풍속 하나를 수륙만리 상파울로에서 경험하며, 추억 하나 건져 인생의 갈피 속에 소중하게 간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