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골목길 - 이진숙
나이가 드는 탓일까? 요즘은 작은 것에도 행복하고 고맙고 정스럽다.
새벽 6시 알람소리에 잠이 깨면 간단한 스트레칭을 20분정도 하고 7시부터 시작하는 수영장으로 간다. 아파트에서 수영장이 있는 체육쎈터 까지는 보통걸음으로 10분정도 걸린다. 아침마다 왕복 20분 정도 이 골목길을 걸을 때가 참 좋다. 길 양쪽으로 이어있는 단독주택들이 정(情)스럽고 약간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것 도 좋다. 새로 깐 길바닥이 깨끗하고 길 양쪽으로 심어진 푸르고 넓은 감나무 이파리들의 그늘도, 또한 길가 담 쪽으로 보이는 화분들의 꽃나무들로 사계절을 느낄 수 있어 더 좋다.
처음에 이 골목은 집터가 넓지 않은 단독주택들이기 때문에 차고(車庫)가 없어 길 양쪽 두 줄로 차들이 빼곡히 세워져있어 가뜩이나 좁은 골목이 더 좁아져서 사람들이 다니기도 불편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터「차 없는 거리를 만든다.」고 한집 두 집 대문과 담을 헐기 시작했고 담과 대문이 없어진 그 자리에 훌륭한 차고들이 생겨 그동안 길에 세워놓았던 차들이 집 안으로 쏙쏙 들어갔다. 대문과 울타리가 사라지고 차들이 모두 집 안 으로 들어앉아 길에 차가없으니 좁았던 길이 넓어지고 훤해지면서 쾌적한 동네가 되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 는 우리 속담처럼 차고 만드는 공사덕분에 집집마다 그동안 퇴색한 곳과 헐고 낡아진 곳 들을 조금씩 손을 보며 새로 도색을 하니 집들이 모두 깨끗해져 골목길이 정말 깔끔하고예쁜 새 동네가 되었다. 길바닥은 우레탄을 깔고 인도 쪽은 보도불럭과 유실수인 감나무들을 심어 오고가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상쾌하고 밝게 만들었다.
「생각의 차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집집마다 대문과 울타리를 없애니 넓지 않은 집인데도 이렇게 충분한 주차공간이 생긴다는 걸 왜 진작 생각 못했을까? 아마도 ‘담과 대문이 없으면 안 된다’ 는 우리의 고정관념 때문이었으리라. 담 없이도 아담하고 깨끗하던 일본의 집들이 생각났다 늦었지만 대문과 울타리를 없애고 주차공간을 만든 것은 참으로 획기적이고 정말 잘 한 일이다. 모두 서로 애정을 갖고 신경을 쓰니까 이렇게 훌륭하고 행복한 사회가 되는 것을-
이 길을 걸으며 또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이 있다.
연세가 높은 어르신들이 많이 계셔서인지 집집마다 꽃을 심은 화분들을 창과 길 쪽으로 내 놓아 활짝 핀 그 꽃들이 얼마나 예쁜지- 헌데 더 미소를 짓게 하는 것은 화분모양이 각양각색이라는 점, 대개는 검은색 플라스틱과 붉은 흙으로 빚은 화분이지만 개중엔 하얀「스티로폴박스」도 있고 이상하게 생긴 작은 항아리 등등 재미있다. 그러나 거기서 피운 꽃들은 주인어른들의 사랑과 정성으로 키워져서인지 갖가지 색깔로 꽃을 피우고 있어 골목길을 더욱 환하고 아름답게 한다.
내리막길 손바닥 만 한 삼각형 자투리땅에는 해마다 한 할머님이 열심히 심고 가꾸시는 밭이 있다.
올해도 파랗고 싱싱한 상추, 고추, 쑥갓들이 소복하게 자라고 있다. 밭 가장자리엔 가지나무와 토마토도 몇 그루 심어 놓으셨고. 길 둑 위로도 여러 개의 화분에 각기 예쁜 화초들을 가득가득 심어놓으셨다. 내가 어렸을 때 보던 순수한 우리 꽃들이다. 화려하진 않지만 소박한, 동요에 나오는 채송화, 봉숭아, 백일홍, 금잔화, 맨드라미, 찔레꽃 등등…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애틋한 마음이 되는 그런 꽃들, 지금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보기 드문 꽃들이라서 더욱 사랑스럽고 정이 간다.
봉숭아꽃은 어렸을 때 언니들이랑 같이 백반을 넣고 곱게 찧은 것을 손톱에 올려놓고 길쭉한 봉숭아 잎으로 빠지지 않게 실로 꽁꽁 묶고 혹시라도 밤사이 자다가 빠져나갈까봐 조심스레 두 손을 가슴에 얹고 걱정하며 잠잤던 일이 생각난다.
땅바닥에 납작하게 앉아 예쁜 색깔로 장독대 가장자리를 장식해주던 채송화, 아침이면 이슬을 머금고 나팔처럼 입을 벌려 웃고 있던 분꽃, 닭 벼슬처럼 꼬불꼬불 빨갛게 핀 맨드라미, 옛날 우리 집 대문 양쪽에 빨갛게 피엇던 찔레꽃나무 등등… 모두모두 내게는 너무나 정스러운 꽃들이다. 왜 이 꽃들을 보면 늘 가슴이 짠- 한지 모르겠다.
이 꽃들을 날마다 사랑과 정성으로 열심히 키워내시는 할머니, 오늘도 바가지로 물을 떠다주시느라 바쁘시다. 그새 할머니 허리가 더 꼬부라지신 것 같다
“할머니 힘드시죠?”
“뭐시 힘드노! 꽃이 안존나, 사람들이 이 길을 가메 오메 보문 좋지! 내도 좋고-”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 꽃들처럼 아름다운 마음을 갖고 계신 이 할머니의 사랑의 손길이 이 길을 걷는 모든 이 들을 행복하게 한다. 간혹 마음상한일이 있었던 사람들도 이 골목길을 지나며 이 꽃들을 본다면 잠시라도 마음이 풀리고 미소를 짓고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될 테니 이 할머니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시는 분이 아닐까? 오고가는 이들이 보고 좋으라고 꽃을 가꾸신다는 할머니, 그래서 당신마음까지도 행복하시다는 분, 오래오래 건강하시면 좋겠다.
따스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활짝 핀 예쁜 꽃들과 깨끗하고 환한 길, 그리고 파아란 하늘과 감나무들의 푸르름을 온몸으로 느끼며 행복한 마음으로 오늘도 이 골목길을 걷는다. 할머니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좋은 일, 행복함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느릿한 행복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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