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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게티스버그>

Joyfule 2018. 1. 23. 21:44

 

 


 

* 영화 <게티스버그>의 메인 테마,

멋진 장면과 음악이 흘러나옵니다

 

 


* 게티스버그 전투 장면화


 

[ 남북전쟁의 분수령, 게티스버그 전투 ]
 

미국의 남북전쟁(1861년~1865년)이 오늘날의 미국을 이룩하는데 중요한 전쟁이었다면 게티스버그 전투는 그 남북전쟁의 분수령을 이룬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그러니까 게티스버그 전투야말로 현재의 미국을 얘기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인 사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그 게티스버그 전투에 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게티스버그 전투는 남북전쟁이 거의 절반이 지나간 시점인 1863년 7월 1일부터 3일까지 3일 동안 워싱턴 북쪽(자동차로 약 1시간 거리)에 위치한 펜실바니아주의 게티스버그라는 자그마한 도시 근처에서 전개되었습니다.


* 게티스버그 지도



 당시 남군과 북군의 대치상황을 개략적으로 살펴봅니다. 남서부전선에서는 미시시피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는 빅스버그라는 강변 도시 안에 남군이 그랜트가 지휘하는 부군에 포위되어 항복 일보 직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부전선에서는 포토맥군(북군)과 북버지니아군(남군)이 서로 치고 받으면서 혈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 때 남군을 지휘하고 있는 로버트 리 총사령관이 난국을 타개하고자 획기적인 전략을 수립하게 됩니다. 즉 그때까지 일방적으로 밀고 내려오는 북군을 버지니아에서 맞아 싸우기만 했지만 이번에는 병력을 이끌고 북부로 깊숙히 쳐들어가서 북군과 일대 자웅을 결해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배경에는 고전하고 있는 서부의 빅스버그에 대한 북군의 압박을 풀어보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북부 깊숙한 곳에서 북군을 쳐부숨으로써 그때까지 북쪽 정부와 남쪽 정부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저울질을 하던 유럽 열강들(영국,프랑스 등)을 자기편으로 만들려는 의도도 깔려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궁극적으로 북군과의 화평 교섭을 이끌어내어 애초의 의도대로 연방으로부터 남부 연맹의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 오늘날의 게티스버그 전투현장


 

리 장군이 이끄는 남군인 북버지니아 군대는 총 7만 5천명이었고, 미드 장군(전임 후커의 후임으로 새로이 임명됨)이 이끄는 북군이 포토맥 군은 총 8만 8천명이었습니다. 이들 양군대는 우여 곡절 끝에 워싱턴 북방의 조그만 도시 게티스버그에서 역사적인 결전을 벌이게 됩니다.

 

리 장군의 남군은 첫 날(7월 1일)에는 북군의 우익을 때려 보았고, 둘째 날(7월 2일)에는 북군의 좌익을 때려 보았지만 결정적인 승기를 잡을 수 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운명의 마지막 3일째 되는 날(7월 3일)에는 최후의 시도로 중앙 공격을 시도해 보았지만 이도 역시 대실패로 귀결되고 맙니다. 바로 이 세 번째 날에 벌어진 남군의 공격을 '피케트(중앙 공격을 맡은 남군의 장군) 돌격'이라고 하여 오늘날에도 남북전쟁의 사가(史家)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회자되고 있습니다.


 * 첫날 전투, 남군(이월과 힐 군단)은 게티스버그를 지나면서 아래로 밀고 내려오면서

  세미터리 힐에서 멈춥니다.  밀어붙이는 김에 세미터리힐과 컬프스힐을 점령하였다면...역사는?



 

* 전투 이틀째, 북쪽에서는 컬프스힐 점령을 둘러싸고 격전을...남쪽에서는 복숭아 과수원과 리틀 라운드 탑

  (바위 등성이)을 사이에 두고 혈전을 벌였으나 남군의 쓰디쓴 패배가 이어지고...


 

* 운명의 전투 3일째, 북군이 진치고 있는 세미터리 릿지를 향하여 남군의 피켓 돌격,

  그러나 처절한 살육이 벌이지고 남군의 완패, 역사는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미국 남북전쟁의 분수령 <게티스버그 전투> 이야기,

영화 <게티스버그>


 

미국사의 클라이막스가 남북전쟁이라면, 그 남북전쟁의 클라이막스는 게티스버그 전투라고 할 수 있지요, 또한 게티스버그 전투의 클라이막스야 말로 '피케트 돌격'이라고 남북전쟁의 작가인 스튜어트가 말했습니다. 7월 3일 그날, 역사상 유례없는 일대 돌격이 펜실바니아주 평화로운 들판에서 이루어지면서 엄청난 도살이 펼쳐졌습니다. 
 

* 영화 <게티스버그>에서, 피켓 돌격



 

* 피켓 돌격 직전

 

들판 서쪽 숲속으로부터 남군 주력부대 1만 5천명이 총검을 내밀면서 대오를 갖추고 푸른 사단기와 남부 연맹기를 중심으로 수많은 군기를 휘말리면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내 생애를 통해 내가 본 가장 아름답고 가장 장엄한 광경이었다" 이는 전투가 끝난 후 어느 북군 장교가 남긴 말이었습니다.

 

이 벌판에서 일대 살육전이 벌어졌습니다. 최초 남군 포격에 의해 제압되었다고 여겨졌던 북군의 포대가 시퍼렇게 살아 있었고, 이 북군의 포 사격에 의해 벌판을 가로 질러오는 남군을 갈기갈기 찢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맹렬한 북군의 포 사격에도 불구하고 남군은 꾸역꾸역 벌판을 가로질러 전진을 계속했습니다

 

포격을 가까스로 피해 북군 진영으로 가까이 접근한 기다리고 있던 북군들의 총알 밥이 되거나 총검으로 살육되기 시작하였던 겁니다. 남군의 처절한 패배, 30분간 잠깐 사이에 일어난 완패였습니다. 1만 5천명의 남군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패하고 돌아오는 일부 부하들에게 리 장군은 "걱정 말게, 모두가 내 잘못이네, 패전한 것은 나야, 남은 일을 해나갈 수 있게 나를 좀 도와주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리 장군다운 말이었겠지요.

 

 

* 남군의 로버트 리 장군

 

  인격자이자 불세출의 명장, 미국에서는 아직도 군신(軍神)으로까지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 링컨은 리에게 북군 총사령관직을 제의합니다. 그러나 리는 자기는 고향(남부측 버지니아)

 을 향하여 총뿌리를 겨눌 수 없다고 남군으로 향합니다. 그래서 남부군의 총사령관을 맡게되고... 차라리

 그가 없었더라면 남북전쟁은 일찍 끝났을(북군의 승리)거라는 얘기도 전해집니다.

 

 현재 워싱턴에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 자리는 전쟁 전에는 그의 농장(버지니아)이었습니다.



 

그러면  게티스버그 전투의 남군의 패인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리 장군이 너무 자신만만해서 무모한 중앙돌파를 시도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하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입니다. 사실 그동안 리 장군이 이끄는 북버지니아군은 북군과 싸워서 거의 진적이 없었습니다. 상승군에에 대한 굳은 믿음 때문이었을 겁니다.

또 다른 가설은 리 장군이 가장 믿고 있는 롱스트리트 장군의 소극적 자세에서 비롯되었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실제 롱스트리트는 이번 전투를 탐탁치 않게 여겨 직속 상관인 리 장군에게 게티스버그에서의 전투를 피하고 워싱턴 방향으로 군대를 돌려 좋은 지형을 확보하여 북군과 일전을 벌이자고 몇 번이나 건의를 했으나 리 장군은 거부했습니다.


* 롱스트리트 장군

 

  들소같은 완강함과 지칠줄 모르는 강인함을 지닌 장군, 그러나 게티스버그 전투에서는

  리 장군과 의견이 안맞아 마지못해 전투에 임하는 바람에 남군의 패배에 일조를 했다는구설수에 오릅니다



 

게티스버그 전투에서는 북군이 고지 쪽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롱스트리트로서는 정말 피하고 싶은 전투였을 겁니다. 그래서 마지못해 전투에 임하는 롱스트리트를 과감히 다른 장군으로 교체했어야 했다는 일부 史家들의 의견도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롱스트리트는 게티스버그 전투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리를 비난하여 구설수에 올랐지만 리는 롱스트리트에 대하여 한마디도 안했다고 합니다. 단지 스톤월 잭슨(돌담 잭슨)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만 토로했다고 합니다. 

 

 

* 스톤월(돌담) 잭슨 장군

 

 

  게티스버그 전투 직전 첸슬러스빌 전투에서 아군의 오인 사격으로 전사합니다. 리 장군의 탁월했던 오른팔이었던 그는 신출귀몰하는 용병술로 싸우는 족족 북군에 패배를 안겨 주었습니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북군이 상당히 애먹었을 겁니다. 본명은 토머스 잭슨인데 전투시에 돌담처럼 해서 스톤뤌 잭슨이라고 불리웠습니다


 

리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어느 화사한 봄날 화이트 교수(당시 리는 버지니아 워싱턴 대학 총장이었습니다)와 말을 타고 평화로운 버지니아 들판을 산책하면서 문득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잭슨이 살아 있었으면 게티스버그에서는 내가 틀림없이 이겼을 텐데 말이야...." 말끝을 흐리는 노장의 눈에는 눈물이 비쳤다고 합니다. '잭슨이 살아 있었으면'은 '롱스트리트가 아니었으면'이라는 의미였을 겁니다. 그는 부하들의 허물을 이런 말로밖에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3일째 피케트 돌격 직전에 남군 포대가 최후의 한발까지 퍼부은 포격이 정밀하지 못해 북군 포대를 잠재우지 못한 점도 패인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나중에 알려졌지만 남군의 포탄들은 대부분 북군의 진지 뒤편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리가 간과한 것은 북군의 전력이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졌다는 점이었습니다. 허구 헌날 어웨이 게임(버지니아에서 벌어진 전투를 말함)에서 깨지던 북군도 이제 홈 게임에서는 질 수 없다는 단단한 각오로 나섰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날 게티스버그 전투장에서의 북군의 전투 의지는 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승리의 쾌보가 워싱턴에 전달된 것은 다음날이었습니다. 승전보는 북쪽 지방 전체를 전율케 하였습니다. 특히 7월 4일 독립기념일에 전달된 승전 소식은 워싱턴을 더욱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렸습니다. 3일 후 접수된 또 하나의 승전보. 남서부 전선의 빅스버그에서 북군의 그랜트가 거둔 남군의 항복 소식은 이들의 열광을 광희로 만들었습니다.

 

기쁨에 넘친 링컨은 백악관 발코니에 나와 환호하는 군중들을 향해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인간은 누누가 평등하다는 우리의 주의주장을 꺾으려던 반란군 집단이 마침내 우리의 영웅적인 아들들에게 굴복하였습니다."


비록 1년 반 정도 더 버티지만 이로부터(게티스버그의 패배와 빅스버그의 항복) 남부는 서서히 패배의 나락으로 굴어 떨어지게 됩니다.

 

* 오늘날의 게티스버그 마을

 

 

<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 >


 

* 게티스버그 연설 연단의 링컨

 

우리가 민주주의를 얘기할 때 항상 입에 올리는 말,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라는 유명한 구절은 그해(1863년) 11월 19일, 링컨이 게티스버그를 방문하고 전몰자들을 위한 연설에서 언급한 말입니다.

 

 

당일 날 링컨의 연설은 불과 2~3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연설을 하던 링컨은 감정에 복 받혀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사진사는 미처 준비하기도 전에 연설이 끝나버렸다고 마구 욕지거리를 해 대었습니다. 청중은 최면이라도 걸린 듯 망연자실해져 버렸습니다. 박수도 길지 않았습니다. “망쳐 버렸군!” 연단을 내려오면서 링컨이 한 말입니다.
 

‘런던 타임즈’는 ‘한심한 링컨 대통령의 한심한 농담으로 게티스버그 봉헌식은 한심한 꼴이 되었다’라고 혹평했습니다. ‘시카고 타임즈’조차도 ‘지적(知的)인 외국인들에게 우리 미합중국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무미건조하고 답답하고 싱거운 연설을 지껄인 통에 우리 모두가 심한 수치심을 느껴야 했다’라고 꼬집었습니다. 오직 ‘시카고 트리뷴’만이 ‘게티스버그 연설을 영원히 간직할 명문 중의 명문’이라고 격찬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링컨의 이 연설은 영문 사용권에서 전무후무한 명연설의 하나가 되어갔습니다. 아래는 바로 그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87년 전, 우리 조상들은 자유가 실현됨과 동시에 모든 인간은 천부적으로 평등하다는 원리가 충실하게 지켜지는 새로운 나라를 이 대륙에서 탄생시켰습니다.우리는 지금 대대적으로 내전 상태에 휩싸인 채, 우리 조상들이 그토록 자유가 실현되길 바라면서, 그토록 소중한 원리가 충실히 지켜지길 원했던 국가가 얼마나 오랫동안 존립할 수 있을지 우려되는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내전으로 인해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자리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우리나라를 구하려다가 자신의 목숨마저 희생당한 분들에게 마지막 안식처로서 그 싸움터의 일부를 바치고자 합니다.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고도 적절한 조치로서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지만 한층 더 엄밀한 의미에서 살펴보면, 이 땅을 바치고 봉헌하고 성지로 만드는 존재는 결코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끼어들 여지도 전혀 없이, 전사자든 생존자든 여기서 싸웠던 용감한 분들이 이미 이곳을 성스러운 곳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여기서 하는 말에 대해 그다지 주목하지도 않을뿐더러 오랫동안 기억하지도 못하겠지만, 그분들이 여기서 이루어 냈던 업적만큼은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이제 우리는 살아남은 자로서 이 곳에서 싸웠던 그분들이 그토록 애타게 이루고자 염원했던 미완의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마땅히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명예롭게 죽어 간 분들이 마지막 신명을 다해 이루고자 했던 대의에 더욱더 헌신할 수 있는 커다란 힘을 그분들로부터 얻고, 그분들의 죽음을 결코 헛되이 하지 않겠다고 다시 한 번 굳게 다짐함으로써, 우리는 이제 우리 앞에 미완으로 남아 있는 위대한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헌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처럼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일 때, 하느님의 가호 속에서 우리나라는 새롭게 보장된 자유를 누릴 수 있고, 우리나라는 국민의 정부이면서, 국민에 의한 정부이면서, 국민을 위한 정부로서 결코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 영화 ‘게티스버그’ >
 

 

 

미국 남북전쟁의 가장 중요한 승부처였던 게티스버그 전투를 묘사한 영화입니다.

 

<게티스버그>는 1863년 7월1일부터 3일까지 사흘간 엄청난 사상자를 낸 전투를 사실에 기초하여 그린 대작입니다. 러닝타임이 무려 271분(4시간30분), 처음에는 미니시리즈로 계획하였으나 극장용으로 제작하여 1993년도에 개봉하였지만 너무나도 긴 상영시간 때문에 미국에서 흥행은 크게 성공을 하지 못했습니다. 후에 TV물로 다시 방영되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에서도 개봉할 예정이었지만 역시 긴 상영시간 때문에 영화사들마다 수입을 포기하였으며 결국 DVD로 출시되고 몇 년 후 HBO에서 특선 시리즈로 방영되었습니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다 실존인물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북군과 남군의 전쟁 상황을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평하게 보는 시선으로 미국 역사의 최대 비극을 스펙터클하게 그리며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한국 시청자들에겐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대표작 하면 <남과북>을 많이 기억하는지 <게티스버그>는 의외로 잘 안 알려진 작품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남과북>의 메인타이틀 음악 못지않게 <게티스버그>의 메인테마 역시 베스트 오브 베스트로 인정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