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에세이

우주의 보상법칙 - 엄상익 변호사

Joyfule 2023. 3. 8. 01:55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우주의 보상법칙



법률사무소를 처음 차리고 사건이 없어 파리를 날리고 있을 때였다. 변론의 방법을 익히기 위해 법정을 찾아가 방청석에서 다른 변호사들이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국내외의 법정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연구했다. 그러다 어차피 그럴 바에야 차라리 정말 힘든 사람의 무료변호를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젊음과 시간이 저축이 되는 게 노숙자 합숙소에서 일을 하는 목사에게 정말 도와야 할 사건이 있으면 공짜로 변론을 해 주겠다고 했다. 그 목사가 가져오는 사건은 하나님이 맡긴 일로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 했었다. 한적하던 사무실이 바빠졌다. 노숙자 합숙소 담당 목사가 소개한 사건 중에는 대도 조세형도 있었고 탈주범 신창원도 있었다. 무료사건을 하면서 나는 변론기술이 늘고 사건 속에 숨어 있는 본질을 보는 눈이 열리기도 했다. 돈은 눈과 마음을 가리게 되어 있다. 그러나 돈을 받지 않으면 있는 그대로 진실을 볼 수 있었다. ​

우연한 인연으로 서울 변두리 산동네에서 혼자 죽어가는 육십대 남자를 만난 적이 있다. 어둠침침한 방에서 한서린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기침을 하고 가슴이 아파 동네 의원에 가서 엑스레이 사진을 찍어 봤어요. 의사가 폐사진을 들여다보더니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더라구요. 그러면서 그냥 감기약을 처방해 주더라구요.”​

말하는 그는 볼이 움푹 들어가고 장작개비같이 꼬치꼬치 말라 있었다. 그는 흔히들 말하는 독거노인이었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기침이 그치지 않고 피도 토하는 거예 요. 그래서 큰 병원에 가서 다시 폐 사진을 찍어 봤어요. 의사가 그걸 보더니 폐암 말기라고 하는 거예요. 탁구공보다 더 크게 암 부위가 보이는데 처음에 찾아간 동네 의사가 모를 리가 없었다는 겁니다. 전이가 되기 전에 한쪽 폐를 잘라내면 살 수는 있었을거라고 하더라구요. 나는 죽기 전에 꼭 할 일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걸 못하고 죽는 게 정말 억울해요. 내가 마지막 소원이 있는데 한 가지만 들어주실래요?”​

“뭔데요?”​

내가 물었다.​

“나 같이 없는 사람에게 무성의한 진료를 해서 죽게 한 병원에 소송을 걸어주세요. 억울해서 그렇게라도 하고 죽어야 할 것 같아요.” ​

그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아마도 소송의 도중에 저세상으로 건너갈 게 분명했다. 정부에서 주는 기초생활지원금으로 살아가는 그는 변호사비를 낼 능력도 없었다. 나는 말을 들어주는 정도로 위로해 줄 작정이었다. 그러나 죽어가는 그의 요청이 너무나 절실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소송을 제기해 주었다. 그의 남은 생명이 하루하루 촛불이 타들어 가듯 줄어들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 그는 나를 만날 때마다 소송이 어떻게 됐느냐고 궁금해 했다. 그는 죽기 이틀 전 병실로 찾아간 내게 말했다.​

“내가 변호사비를 빚으로 남기고 죽어야 하는데 갚을 길이 없으니 어떻게 하죠?”​

그는 나름대로 개결한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젊어서는 덩치도 좋고 호방한 성격으로 방송국에서 일을 했다고 했다. 내공이 쌓인 사람이기도 했다. 내가 잠시 생각한 후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얼마 후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거 아닙니까? 그때 빚을 갚으세요. 이 지상에서 보다 열배 백배로 쳐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의 얼굴이 환하게 펴지는 것 같았다.​

“저승에 가서 갚겠다고 이 지상에서 각서 한 장 써 주시고 둘이서 증거로 마지막 인증샷을 찍읍시다.”​

내가 제의했다. 내가 즉석에서 그의 공책을 찢어 각서를 작성하고 그가 서명을 했다. 그리고 둘이 침대에 나란히 걸쳐 앉아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가 하늘나라로 갔고 영정사진 앞에는 나 혼자 앉아있었다.​

변호사 일을 하다 보니 후한 보수를 받는 경우와 무료로 일을 해 주는 경우가 있었다. 당연히 돈이 많이 들어오는게 좋고 공짜 일은 기피하고 싶었다. 그런데 예수는 감옥에 있는 나를 찾아오라고 하면서 보수를 못받는 일이 복되다고 했다. 보수가 후한 일은 벌써 지금 여기서 갚음을 다 받아버렸기 때문에 미래에는 아무것도 받을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수가 박한 일은 그 보상을 받을 날짜를 미래로 옮겼기 때문에 그것에는 몇배로 증가된 보상을 받을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나의 정직한 노동과 거짓없는 성실이 지금 이 세상에서 갚음을 받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복되다는 것이다. 우주의 보상법칙이 통용되는 한 우리는 마음놓고 힘써 노력하고 그 결과는 그 법칙에 내어 맡기면 되지 않을까.